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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20)화 (20/60)

20화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라온 식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각종 나물과 침채, 고기와 무를 넣은 탕국,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하얀 쌀밥까지.

찬간 하인들이 분주하게 방 안을 들락거리는 동안 유원은 쥐 죽은 듯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난데없이 웬 저녁을 다시 차리라 하셨을까. 분명히 한 시진 전에 저녁을 드셨는데. 무인이라 식사량이 유난하신 걸까.

“영감, 분부하신 대로 석반 준비해 올렸습니다.”

“알겠네.”

그만 나가 보라는 주인어른의 손짓에 김수남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덩달아 유원도 집사의 뒤를 따라나서려 쪼그렸던 무릎을 편 그때였다.

“어딜 가십니까?”

“예?”

“저녁 식사하시도록 새로 준비해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유원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눈앞에 차려진 상을 한 번 보고, 태백훈을 쳐다봤다. 눈썹을 찌푸린 태백훈이 재차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상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방금 내게 저녁을 못 드셨다고 답하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유원은 태백훈이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눈앞에 차려진 상은 다름 아닌 유원의 저녁이었다.

“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내 집에선 허드렛일하는 어린 종놈이든 행랑채 집사든 같은 밥상을 먹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올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요컨대 유원한테만 특별히 내어 주는 상이 아니란 의미였다. 매번 유원의 문안조차 대놓고 무시하던 판에 이제 와서 혼인한 사이라며 챙겨 줄 리 만무했으니 당연한 바였다. 그렇다 쳐도 구첩반상이라니, 융숭하다 못해 과하지 않은가. 도성 내에서도 손꼽히는 벌열(閥閱) 가문 아래에서 십수 년 더부살이했어도 맛보기 힘들 음식이었다.

“왜 보고만 계신지요. 아, 옥양과 다르게 음식이 변변찮아 마음에 안 드시려나요?”

“아, 아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도리질 친 유원은 또 무슨 핀잔을 듣기 전에 앉은걸음으로 상 앞으로 다가갔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에 주린 배가 아우성치는 듯했다.

정말 먹어도 되는 걸까. 별안간 태도를 바꾸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유원은 건너편에 있는 영감을 곁눈질로 살폈다. 보료에 앉은 태백훈은 배가 불러 느른해진 맹수처럼 장침에 기대 늘어져 있었다. 가끔씩 담배를 뻐끔거리는 얼굴은 유원에게 그리 관심을 두는 눈치가 아니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라도 곱다지 않던가. 이미 나온 밥상을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심호흡한 유원은 수저를 잡고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아.”

오랜만에 먹는 쌀밥이 다디단 나머지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뿐인가. 막 무쳐 낸 나물은 고소하고, 따뜻한 국은 간간해 입맛이 돋았다. 며칠 내리 도토리 같은 구황 열매로 끼니를 때우던 입에 곡기가 닿으니 이보다도 천상의 음식일 수가 없었다.

유원은 밥그릇에 코를 박은 채 허겁지겁 밥을 퍼넣었다. 찬이 유달리 맛깔스럽기도 했지만 이때 아니면 굶어야 할지 모르니 양껏 먹어 둘 필요가 있었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태백훈이 턱을 괸 채 유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굶었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셨나 봅니다.”

“캑, 캑.”

순간 사레들린 유원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한번 터진 기침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다급하게 마실 거리를 찾아 허둥거리던 손끝에 슬그머니 차가운 것이 닿았다. 보다 못한 태백훈이 내민 주전자였다.

“가, 감사합니다….”

기침 때문에 가늘어진 목소리가 영 멍청스럽게 들렸다. 유원은 물을 단번에 마시고도 수차례 명치를 팍팍 친 후에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한심하단 얼굴로 노려보던 태백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배고프셨으면서 왜 여태 말도 않고 참으셨습니까.”

“……제게는 내어 줄 밥이 없다 했습니다.”

“…그 말을 믿으셨다고요?”

“되물어도 그저 없다고 하니 그렇구나, 할 수밖에요.”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대감집에서 빌붙어 지낼 때도 그랬었다. 식은 밥은 고사하고 누룽지라도 얻어먹으면 감지덕지했고, 소여물만도 못한 찌꺼기를 받은 적도 있었고 밥보다도 눈칫밥을 먹는 날이 허다했다.

한 번은 너무 오래 굶어 쓴 물을 토한 적이 있었다. 배가 아파 우는 유원을 두고 홍세환이 한 말은 간단했다.

저 밥버러지가 계속 시끄럽게 울거든 어미 곁으로 내쫓아 버리라고.

그래서 울지 않았다. 굶주림도 참다 보면 익숙해졌다.

“영감께서도 제가 밥을 축내는 꼴이 보기 싫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말을 하다 말고 태백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부리를 물고 있던 입술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심기 불편한 얼굴에 유원은 제 생각이 들어맞는구나, 싶었다.

태백훈에게 있어 유원은 졸지에 들어온 식객이었다. 당장 얼굴 보기도 싫은 사람 입에 들어가는 쌀 한 알이며 물 한 모금이 얼마나 아깝겠는가. 갑작스레 저녁상을 내어 준 연유는 알 수 없다만, 이마저도 눈치 주려는 의도일지도 몰랐다.

담배와 화로에서 피어오른 불 냄새가 방 안 가득 은은하게 번졌다. 묵묵히 담배를 피우던 태백훈이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집에선 천인공노할 만큼 죄인이 아니고서야 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으며 굶기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사사로운 감정 하나로 그대를 굶길 리도 없고요.”

“…….”

“그러니 앞으론 이딴 식으로 고집부리지 말고 집사에게 말씀하세요.”

“예?”

“드실 만큼 드신 듯하니 이만 나가 주십시오.”

태백훈은 유원에게 나가 보라는 눈짓을 마지막으로 보료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방해받기 싫다는 듯 아예 벽 쪽으로 돌아누운 영감을 바라보던 유원은 남은 상을 들고 방을 나섰다.

마당에는 대기하던 김수남이 유원을 보고는 서둘러 달려왔다. 대관절, 이 밤에 그쪽 때문에 무슨 소란이냐며 잔소리라도 할 줄 알았거늘. 김수남은 군말 없이 유원이 가지고 나온 상을 받아 들 뿐이었다. 오히려 유원에게 괜찮냐며 묻기까지 했다. 마치 저에 대해서도 고했을까 염려하는 듯한 눈치였다.

* * *

밤새 쏟아진 눈으로 기와며 마당까지 하얗게 뒤덮였다. 그렇게 내리고도 모자라 초저녁에도 눈 섞인 바람이 문간을 달칵거리며 두드렸다.

“저기요!”

땔감을 들고 지나가던 유원을 발견한 정애가 반색하며 손짓했다. 유원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눈에 얼어붙은 고목 한 그루가 전부였다.

“그쪽 말이에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잠깐 여기 와 보시겠어요?”

주변의 눈치를 보는 듯, 목소리를 낮춘 은밀한 지시에 유원은 머릿속으로 깜빡한 일이 없나 되짚었다. 영감은 이른 새벽부터 나선 뒤였고 저녁 자실 때나 돌아오실 예정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별건 아니지만.”

눈을 깜빡거리는 유원을 향해 씩 웃어 보인 정애가 함지를 열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이 걷히며 드러난 건 두부였다.

“방금 만들어서 엄청 뜨끈뜨끈해요.”

“우와.”

뽀얀 두부를 내려다본 유원이 작게 감탄했다. 찬 공기를 제치고 코끝을 간질이는 따끈따끈한 냄새에 군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였다. 칼로 두부 테두리를 슥슥 크게 잘라 낸 정애가 유원의 코앞에 불쑥 내밀었다.

“맛 좀 보시라고요.”

“제가 먹어도 돼요?”

“자투리인데 뭐 어때요. 그쪽 먹어 보라고 부른 거예요.”

얼른, 손 떨어질라. 경애가 채근하자 머뭇거리던 유원이 작게 아, 입을 벌렸다. 몰랑하고 뜨뜻한 두부를 맛본 순간 유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달고 고소하고 맛있었다. 옆에서 반응을 살피던 정애가 궁금하다는 듯 감상을 재촉했다.

“어때요? 맛있죠? 응?”

“예.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떡 같아요.”

“그치요? 돌아가신 우리 큰아매가 저어기, 광릉에서 제일가는 두부 장수였거든요. 예전에는 임금님 수라상 올리는 상궁 마마님께서도 큰아매한테 비법을 전수 받으러 오신 적도 있다대요.”

“진짜요?”

“그렇대도요. 우리 집안 제일 자랑거리거든요.”

젖은 면포를 탈탈 턴 정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만하면 전국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음식만 잡수시는 상감마마께서도 극찬하실 만했다.

기왕 찬간에 온 김에 아침밥이나 먹고 가라며 소매를 걷어붙인 정애가 금세 밥상을 차려왔다. 간단한 아침이라기에는 꽤 묵직한 양이었다. 비지떡을 크게 베어 문 정애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참, 듣기로는 어제 영감께서 갑자기 저녁상 내오라 하신 이유가, 정말로 그쪽 때문이에요?”

“아… 저 때문인 게 맞는 거 같아요. 예, 아마도요.”

“어머, 진짜였어요? 어, 어쩌다가요?”

“쉬시는 줄 알고 마루 밑에서 개암을 까먹다가 들켰거든요. 제 저녁이라고 하니까, 화를 내시고요.”

유원은 멋쩍어하는 한편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어쩐지, 두부나 먹어 보라며 저를 불렀을 것 같진 않다 싶었는데 어지간해도 어젯밤 자초지종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먹을 것으로 회유해 가면서 은근슬쩍 물어보는 거겠지.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찬간 하인인 정애 입장으로는 그 소란의 진상이 퍽 의아했을 만했다. 유원도 태백훈이 왜 그렇게까지 간섭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찬간 하인들이 때아닌 밤중에 수고로웠을 것만은 자명했다. 순순한 대답에 정애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니, 다름이 아니고 어제 김 씨가 한바탕 난리를 부렸거든요. 난 뭔가 했더니 사랑방 쪽에 왜 밥 따로 안 들어갔냐면서 버럭 화를 내고 있더라고요. 난 이 밤에 웬 손님이 오셨나, 했더니 상을 받는 식객이 그쪽이라데요?”

“죄송, 합니다.”

“아이, 죄송하기는 뭐가 죄송해요. 사과는 여기 놈들이 도령한테 할 말이지. 하여간 어디서 나쁜 짓만 배워 와서는.”

바깥쪽을 흘낏 본 정애가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참으로 고맙긴 하나 아마 정애 말고는 태반은 유원이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여길 터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새색시라며 손님 대접을 받던 대갓집 도령이 종놈처럼 사랑채를 지키고 있으니 우습게 여길 만도 했다. 지나가던 하인들과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그들은 유원더러 들으란 듯이 떠벌거리곤 했다. 개중에는 유원이 초야 날 영감께 극심한 불경죄를 저질러 종살이로 면죄한다는 비방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튼, 여기서는 먹는 것 가지고 절대 야박하게 안 그래요. 우리 영감께서는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랑 먹을 것. 이 두 가지만큼은 영감한테 올릴 것과 똑같이 하라고 하셨거든요.”

“영감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 덕에 배부르고 등 따시고 좋죠, 뭐. 안 그래요?”

“그렇긴 한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요.”

“영감 인심이 곳간만큼 커서 그렇겠죠. 그러니 도령도 줄 밥 없다, 이러면 당당하게 요구하세요. 알았죠? 그래도 배짱부리면 내한테 말하구요.”

유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애가 염려하지 않아도 당분간 별일이 없을 듯했다. 전날 밤에 김수남까지 나서서 쓴소리까지 늘어놓은 탓에 하인들 누구도 지나가는 유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는 오래 가진 않을 터였다. 이들에게 유원은 미워해도 되는, 무시하고 천대해도 상관없는 외부인이었다. 뒷배 없다는 사실도 공공연하게 드러났으니 오죽할까.

그나마 굶기지는 않는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게 무던히 넘기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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