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19)화 (19/60)

19화

“나리가 까마귀들로 하여금 감시시키신 겁니까?”

“감시는 아니지만, 쭉 지켜보긴 했습니다. 도백께서 손수 감찰 나가실 때 뒤를 지키는 것이 제 소임이라, 먼 곳을 보고 들어야 할 때는 이 아이들이 도와주고 있거든요.”

“쭉, 이라면 그게 언제부터?”

“으음, 아마 원경도에 입도하실 때부터이려나요.”

턱을 쓰다듬은 청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어쩐지 그 까마귀들이 산에 사는 무리가 아니라 가마를 쫓아오는 듯했건만 착각이려니 했다. 고된 여정에 지나치게 과민해진 나머지 잘못 보고 느낀 것이라 믿었다.

말인즉 그때부터 태백훈이 유원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다는 의미였다. 역시 그날 산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구나. 생각해 보면 처음 주막에서 그를 봤을 때부터 너무 태연하다 싶었다.

왜 줄곧 유원을 지켜본 걸까. 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혼자를 기다려야 해서? 그날 태백훈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유원은 진즉 나티한테 잡아먹혔을 터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었는데도 태백훈은 굳이 제 목숨을 구해 줬다.

집안 간의 불화가 주상 전하에게 끼칠까 염려했던 걸까. 하지만 제깟 것이 죽는다 해서 홍세환이 트집 잡을 린 없을 텐데.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골몰하던 순간 손청준의 주변을 맴돌던 까마귀가 휙 날아와 유원의 어깨에 앉았다. 마치 인사라도 하듯 까마귀가 친근하게 제 머리를 유원의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에 청준이 웃었다.

“그 아이가 아기씨께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답니다.”

“…진짜로 까마귀들의 말을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알아듣는다고 해야 하나. 이 녀석들이 워낙 영리해서 알기 쉽게 표현하거든요.”

손청준은 휙, 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까마귀들이 반응하듯 깍깍거리며 합창했다. 신기한 광경에 유원이 작게 감탄했다. 그러자 까마귀들이 내려와 유원의 주변을 춤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이 녀석들이 아기씨가 좋은가 봅니다.”

“제가요?”

“예, 자고로 짐승들도 어진 사람, 예쁜 사람을 잘 알아본답니다.”

어진 사람, 예쁜 사람을 알아본다. 멋모르는 까마귀들도 이리 반겨 주는데. 참았던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계십니까?”

“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표정이 이리 어두우신데요.”

유원은 눈을 내리깐 채 두 손만 어루더듬었다. 이를 가만히 쳐다보던 손청준이 손등에 까마귀를 태워 가까이 내밀었다.

“이 까마귀한테만 말한다 생각하시고 한 번 이야기해 보시지요.”

“까마귀… 한테요?”

“제가 들을까 걱정되신다면 귀를 막겠습니다.”

유원은 까마귀를 얼떨결에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손청준은 웃으면서 두 손으로 양쪽 귀를 감쌌다. 까마귀의 머루 같은 눈동자가 유원을 빤히 올려다봤다. 손으로 가만가만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깃털이 손에 감겼다.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나 싫으신 걸까.”

태백훈이 자신을 싫어하는 까닭은 충분히 알고 있다. 왕명만 아니라면 이 집에 유원을 남길 이유도 없었다고도 말했다. 아마 지금도 제 발로 직접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작정하고 돌 같은 미물 이하로 여기는 것이었다.

남들한테 무시 받는 삶이 익숙하여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괜찮지 않았다.

“모르겠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상하게도 태백훈의 외면을 직시할 때마다 심장이 가라앉는 듯했다. 가끔은 종놈처럼 마구 부려 먹어도 괜찮으니 차라리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럼 그때, 왜 나를 구해 줬을까.”

그날,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었다면 전부 편해졌을 텐데.

순진무구하게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의 눈도 이런 식으로 검푸른 빛이었다. 그 눈이 무섭기도 했지만 싫진 않았다. 새벽녘 같아 아름답게 느껴지는 색이었다.

“다 이야기하셨습니까?”

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까마귀를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까마귀를 팔에 태운 손청준은 잠시 까마귀를 들여다보더니 유원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이 까마귀가 그러는데, 영감과 아기씨 사이가 안 좋다 하는군요.”

“예? 어찌 들으셨습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아이가 알려 줬다고요.”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아건대 순 거짓말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유원은 저를 놀렸다며 화내지 않았다. 영감께서 유원을 싫어하다 못해 아예 멸시한다는 바는 행랑채 어린것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최측근인 손청준이라면 더더욱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순간 손청준이 팔을 위로 크게 뻗었다. 푸드덕, 주위에 몰려 있던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제 까마귀를 구해 주셨으니, 보답으로 조언 하나 해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조언이요?”

뜻밖의 말에 유원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조언을 해 주려는 걸까. 슬그머니 몸을 가까이 기울인 손청준이 유원에게 속닥거렸다.

“미인계를 써 보시죠.”

“네? 미인계요?”

“무릇 사내들이란 미인에게 약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여, 여인이라도 붙이시란 겁니까?”

음? 손청준이 의아하단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여인 말고 아기씨 말입니다.”

“나리, 농이 지나치세요. 저까짓 것으로 무슨 미인계란 말입니까. 게다가 저는… 사내인걸요.”

유원은 망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손청준은 잠자코 유원을 살폈다. 비록 사내였고 차림새가 누추해도 빼어난 미색이었다. 스스로를 미인으로 여기지 않는 미인이라니, 보석인 줄 모르는 옥이지 않은가.

하기야, 태백훈은 색을 밝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를 흠모하며 정인 삼아 달라 구애하는 사람들이 사내 여인 막론하고 줄을 섰지만 살을 섞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손청준이 아는 태백훈은 한 번 눈 밖에 난 자는 곁에도 두지 않았다. 차라리 어디다 보내 두고 감시를 붙였으면 모를까.

그런데 곁에 두고 일부러 무시를 일삼아가며 손수 괴롭히기까지 한다니, 태백훈의 평소 성향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러니 손청준 또한 유원에게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시면 동정심을 자극해 보십시오.”

“동정심?”

“가령, 아기씨께서 까마귀를 구해 줬을 때처럼요.”

“예?”

이번에도 유원은 썩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살짝 얼빠진 얼굴이 퍽 귀엽게 느껴져 작게 웃음을 터트린 손청준이 슬며시 귀에 속닥거렸다.

“믿거나 말거나, 영감께서는 꽤나 마음이 여린 분이시거든요.”

유원은 한 식경이 넘도록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동정심(同情心).

그는 며칠 전 손청준이 남기고 간 말을 두고두고 곱씹었다. 태백훈의 동정심을 자극하라고는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놓고 저더러 싫다, 밉다, 짜증 난다고 한 사람이 갑자기 유원을 가여워할 리도 없지 않은가.

역시 손청준 그자는 태백훈이 일부러 보낸 게 틀림없었다. 어디 한번 객기 실컷 부리다 쫓겨나 봐라, 하며 판이라도 깔아 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나 태백훈한테 일말의 호소가 먹힐 수 있다면? 하다못해 도중에 쫓겨날 일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휴우, 됐다. 관두자, 관둬.”

동정심 자극은 무슨. 혼잣말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유원이 빗자루로 바닥을 세게 쓸었다. 눈 밖에 날 일 만들 바에야 조용히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괜히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 보겠다고 애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매타작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조언을 신경 쓰는 게 가당치도 않겠지만 유원은 나름대로 잘 지내고 싶었다. 적어도 태백훈에게 얹힌 신세인 이상 그와의 관계가 더 나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

평생 무시당했어도 새로운 사람한테 받는 미움은 여전히 서럽기 마련이니까.

더군다나 싫다는 사람 상대로 아무리 용써 본들 개선될 리 없었다. 유원이 노력한다 해서 누군가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면 진즉, 물건처럼 원혜로 올 일도 없었으리라.

행랑과 외당 사이 중문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돌아오셨냐 묻는 김수남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태백훈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최근 태백훈은 아침 일찍 나가선 밤늦게나 들어왔다. 그래서 오늘도 일찍부터 출타하기에 늦게 귀가할 줄 알았더니,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중문이 열리며 익숙하디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유원은 얼어붙어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태백훈을 맞았다.

“영감, 다녀오셨습니까.”

그저 격식에 맞는 인사를 올렸을 뿐이었다. 지나가던 태백훈의 무표정한 얼굴에 파동처럼 짜증이 퍼졌다. 유원에게 들릴 정도로 큰 숨을 내쉰 그는 유원을 쌩하니 지나쳤다.

동정심은 무슨. 눈만 마주쳐도 저리 싫어하는 사람인데 저 같은 것을 동정할 리가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유원은 곧장 태백훈이 지나갈 길목에서 가장 먼 자리로 피신했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지고 곳곳에 둔 등촉에 불이 켜졌다. 외당 주인방 앞은 찬간 하인 너덧이 식상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염옥화가 큰 그릇 뚜껑을 열고서 편히 진지 잡수시라며 물러났다. 집안 큰 어른인 태백훈이 먼저 식사를 한술 떠야 비로소 다른 하인들도 순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보통은 찬간에서 주인의 식상을 차리고 남은 밥을 나눠 먹는 법이었다.

유원은 사랑방에서 멀찍하게 떨어진 마루 밑에서 개암을 깠다. 그중 안쪽 흰 알맹이만 골라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었다. 평소처럼 찬간에 가서 저녁을 받아 오려 했다. 가끔 부엌데기 정애가 혼자 있을 때는 공기에 찬밥을 더 꽉꽉 눌러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찬간 앞에서 웬 젊은 하인 하나가 그를 가로막았다.

‘오늘은 먹을 것이 모자라 도련님 드릴 게 없구만요.’

어깨 너머로 보이는 국과 밥이 한가득인데도 부득불 밥이 없다 우겼다. 심지어 어제는 이미 돼지들 밥으로 줬다면서 돼지우리에 가 보시면 꿀꿀이죽이라도 얻어먹을 거라며 저들끼리 웃었다. 그 탓에 어젯밤부터 입에 댄 것이라곤 물과 개암뿐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초야 날 소박을 맞았단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이후로 도백 저 하인들은 걸핏하면 유원을 무시했다. 그때마다 막둥이가 속상해하며 제 몫을 나눠 줬지만, 매번 그 어린 것의 밥을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여차하면 도토리라도 까먹고 뿌리 캐서 먹고 버티는 거지. 굶는 일은 이제 일도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이른 오전에 산에 슬쩍 올라가 식용 열매라도 주워 먹으면 되니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유원이 개암을 까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잠자리 드시기 전까진 방 안에서 쉬리라 여겼던 태백훈이 대뜸 방을 나오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무시하고 지나치겠거니 싶어 두 눈을 내리깔았다. 태백훈은 신발을 찾다 말고 문득 유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 뭘 그리하고 계십니까?”

약 열흘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일 줄이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황한 유원이 부산하게 주위를 정리했다. 눈썹을 찌푸린 태백훈이 성큼성큼 다가와 유원의 손에 든 면포를 빼앗았다.

순식간에 개암 껍질과 열매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일순간 정적이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발치에 굴러떨어진 개암을 내려다본 태백훈이 물었다. 민망함과 무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유원이 결국 실토하듯이 말했다.

“…개, 암 열매입니다.”

“개암?”

“바, 바깥을 나간 건 아닙니다. 같이 왔던 아이가 산속에서 가져다준 것입니다. 독이 든 열매도 아니고 먹는 것이고요.”

“이걸, 뭐에다 쓰시려고요.”

“…제, 저녁밥입니다.”

그 말에 태백훈이 황당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저녁밥? 이게 저녁밥이라고요?”

“예.”

“그럼 아침은? 설마 아침에도 이걸 잡수셨습니까?”

“…예.”

“어제도? 어제도 이걸 먹은 건 아니겠지요?”

“…….”

차마 더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고 온 열매를 문제 잡는 건 아닐까. 허락도 없이 바깥 것을 들였다고 트집 잡자면 저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불안한 나머지 손이 벌벌 떨렸다. 차라리 태백훈이 잠들었을 때까지 참을걸. 고새 배고픔 하나 못 참고 왜 이런 사달을 냈을까.

“김수남은 어디 있느냐.”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 태백훈이 큰 소리로 행랑아범 김 씨를 찾았다. 행랑 쪽에서 김수남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여, 영감,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자네는 내가 이 집에 왔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어떤…?”

“내 밑에선 먹을 것으로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했었지.”

그제야 김수남이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백훈은 저택 내에서 남녀노소 누구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차등을 두지 않았다. 그 덕에 바깥에서는 산해진미라 입도 못 대 볼 진귀한 고기반찬이 종놈들 밥상에 오르기도 했다. 태백훈의 철칙이었고, 때문에 어느 하인이든 먹을 것으로 장난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 집에서 사람이 끼니 대신 다람쥐같이 열매를 주워 먹는 꼴이 보이지?”

“예? 끼, 끼니 대신 열매를 주워 먹다니요? 분명 찬간에서 밥을 공평하게 나눠 줄 텐데요. 늦어도 식은 밥을 내주라 하였습니다.”

“그럼 저 사람이 한 말이 전부 거짓이라?”

태백훈이 눈짓으로 유원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수남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행랑채 몇 놈들이 옥양 도련님 골탕 먹인다며 일부러 쫓아냈다고 듣긴 했다. 그래 봤자 한두 번이면 말 줄 알았더니 하필 영감이 알게 될 줄이야.

“뭔가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분명 석식 때 한 사람도 안 빠지고…!”

김수남의 변명이 이어지기도 전에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유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 같아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사람도 안 빠지고. 그다음 말이 왜 없는가?”

“그, 그러니까, 그게….”

하아.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쉰 태백훈이 도끼눈을 뜨고 김수남을 노려봤다.

“뭘 그리 서 있는가? 당장 석반 차려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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