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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16)화 (16/60)

16화

딸꾹질이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은 유원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쉬이 나오는 기색이 없자 태백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단숨에 목련목 앞까지 다가왔다. 칼등으로 마른 수풀과 천을 걷어 낸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웬 좀도둑인가 했더니, 당신이었습니까.”

무심한 눈동자에 설핏 짜증스러움이 담겼다가 옅어졌다.

“차라리 좀도둑이 나았겠군.”

달갑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낮고 음산했다. 겨눴던 검을 거둔 태백훈이 재차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창고를, 정돈하고 있었습니다.”

“창고?”

후원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고서고를 한 번 돌아봤던 그가 유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러지. 시선이 향하는 곳을 손으로 더듬거리자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지푸라기들이 손에 걸렸다. 인기척에 급하게 나오느라 정돈하지 못한 탓이었다. 민망하여 뺨은 물론이고 귀까지 붉어졌다.

고개를 숙인 유원이 서둘러 옷을 추스르는 동안 태백훈은 사당 앞으로 돌아가 있었다. 당장 나가려는 기색은 아니긴 했지만 언제 그가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태백훈과 대화하려면 지금뿐이었다.

심호흡하며 가슴을 한번 두드린 유원이 슬그머니 그의 뒤쪽으로 다가섰다. 불 피운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내가 꽤 유예해 준 것 같은데 아직도 여기 빌붙어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할 말이…….”

“할 말?”

날이 선 대답에 유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득이든 애원이든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목구멍에 단단한 돌을 쑤셔 넣고 풀로 봉한 것처럼 갑갑했다. 태백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생각해 보니까 무턱대고 쫓겨나긴 싫었습니까? 하다못해 패물이라도 좀 받아 볼까 싶어서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은? 나를 몰상식한 남편으로 모함할 거리라도 찾으려고요?”

“소인은… 저는, 영감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폐를 끼칠 생각도 없고요.”

“폐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밤 녘에 검게 물든 눈이 유원을 응시했다. 이내 그가 탄식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 말하고도 가책 하나 느끼지 못하나 본데 그대가 이 집에 버젓이 남아 있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껄끄럽고 폐가 되거든요. 그대의 아비는 나를 무뢰배로 만들고 그대는 나를 남색가로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는 폐를 끼치려 하지 않았다고? 그리 부드럽게 호소하면 내가 옳다구나, 하며 이해라도 할까 봐요?”

“영감.”

“앞뒤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하면서, 뻔뻔하게 무슨 이야기를 더 하시려고요.”

덤덤하던 말투가 격양되었다. 독에 받쳐 날카롭고 사나운 눈길이었다.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낸 유원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태백훈에게는 그 어떤 손익도 없는 혼약이었다. 그러나 유원에게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눈앞에 서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저 남자만이 오로지 주어진 선택지였다.

“일 년만….”

파르르 떨린 입술이 벌어졌다.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한차례 음색을 가다듬은 유원이 뒤이어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년만, 여기 남아 있게 해 주세요.”

“일 년?”

“그런 뒤에는 영감께도, 여기서도 멀리 떠나겠습니다. 쥐 죽은 듯이 살라 하면 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지금은 쫓아내지만 마세요.”

“내가 굳이 그대를 일 년씩이나 감내해 줘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

조소 어린 말투에 유원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유원이라 해서 신부복을 입고 색시 노릇하고 싶진 않았다. 순전히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리 고백하면 조금이나마 참작해 줄까. 자그만 이해라도, 아니면 동정이라도 해 주실까.

그 순간 곰방대로 탁자 두드리는 환청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빌어먹을 망나니 도백한테 어떤 말이든 함부로 지껄일 생각 말거라. 그놈한테 괜한 트집거리를 줬단 말이 돌기라도 한다면 네 어미부터 발가벗겨 저잣거리에 돌팔매질 당하게 할 것이다.’

경고하던 아버지의, 싸늘한 얼굴이 생생했다.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서 도와주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 남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설령 말한다 해서 뭐가 나아질까. 저와 그깟 사정이 무슨 상관이냐 하면 유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태백훈에게 전부 고한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면 기어코 대감은 어머니를 잔인하게 내칠 터였다.

오래전, 아버지를 처음 뵈러 갔던 날처럼.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 어머니께 심병까지 앓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친부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살짝 숙인 태백훈이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응? 대답을 왜 못 하십니까. 그럴싸한 이유라도 말해야 내가 생각이라도 해 볼 것 아닙니까.”

“부부간의, 인연을 맺었으니까….”

“인연? 나와 그대가 인연이라고 할 만큼 애틋한 것이 있었습니까?”

“…….”

“나는 그대에게 미운 정은커녕.”

유원의 몸을 위아래로 내리훑은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알량한 몸 정조차 맺을 생각이 안 드는데.”

느른한 목소리는 권태롭기까지 했다. 유원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굳이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한심한 것을 보는 듯한 멸시와 혐오, 그리고 비웃음이 눈과 입에 선명하게 담겨 있을 터였다. 이내 긴 침묵을 지우며 태백훈이 말했다.

“일 년이든 몇 년이든 난 그대를 부인으로 불러 줄 생각이 이만큼도 없습니다.”

“굳이 부인으로 대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설마 종놈으로 취급이라도 해 달란 말씀입니까?”

“그리하셔야만, 참을 수 있겠다 하시면요.”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낸 태백훈이 쏘아붙였다.

“그대는, 수치심이란 것도 없습니까? 내가 무슨 모욕을 주던, 혼인만 유지할 수 있다면 족하다는 겁니까?”

“그리도 싫으시면 차라리 혼담을 거절하지 그러셨어요.”

결국 욱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태백훈이 눈썹을 찌푸렸다.

“감히 전하의 뜻을 거역하란 말이오?”

“그럼 전하께서 맺어 준 인연으로 생각하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백훈이 멱살을 잡아챘다. 몸이 가까워지고 그의 얼굴이 바짝 눈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 앞에서 함부로, 전하를 들먹이고, 전하가 맺어 준 인연이라 지껄이는 겁니까? 그대의 아비가 전하의 뜻을 마음대로 헤아려, 나를 이리 기망하는데 인연이라 생각해 달라?”

“영감….”

“그렇다면 그대는 전하께 감사하셔야겠소이다. 내가 여기서 칼을 뽑아 그대를 베지 않은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배필로 보내 준 자이기 때문이니까.”

유원은 저를 노려보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산에서 요수를 잔혹하게 베어 죽일 때의 얼굴. 상종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이었다.

천한 것을 업신여기는 멸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명한 증오였다.

이 남자는 정녕 저를 미워하는 것이다.

태백훈이 멱살 잡았던 손을 풀었다. 햇빛 비친 고드름처럼 차갑고 살벌한 눈동자가 유원을 내려다봤다.

“나는 그대를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대 말대로 우린 지난날, 전하의 축복 아래 부부지간이 되었으니까. 허나 내 그대를 평생 반려로서 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안채를 내주지도 않을 것이고, 눈 한 번 두지도 않을 겁니다.”

“…….”

“이딴 허울뿐인 결혼이라도 좋다는 겁니까?”

그대로 주저앉은 유원이 무릎 꿇었다. 찬 바람에 입김이 하얗게 식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고 깨물었다.

“여기에, 남겠습니다.”

정실 대접은 바라지도 않았다. 도백 부인이란 감투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일 년만. 단지 일 년만. 가시방석이라 해도, 그 가시가 생살을 뚫는 걸 알더라도 있어야만 했다.

유원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어머니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버티나 했더니, 아예 나를 기만하고자 작정하고 오셨던 거였군.”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린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 어디 한번 원하는 대로 해 드리죠.”

불시에 팔이 덥석 붙잡혔다. 유원은 그대로 태백훈에게 질질 끌려갔다. 태백훈이 향한 곳은 본채였다. 꾸벅꾸벅 기둥에 기대앉아 졸던 청지기가 본채 마루로 울리는 발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기립했다. 그늘진 대청마루 위에 영감이 서슬 퍼런 얼굴로 서 있었다.

열흘 만에 주인어른이 돌아오셨다 하여 본채 앞이 삽시간에 벅적해졌다. 안쪽 자리에 앉은 태백훈이 집사에게 말했다.

“앞으로 사랑채 일은 전부 저 사람이 할 것이네.”

저 사람? 두 집사는 빠르게 태백훈이 눈짓하는 쪽을 돌아봤다. 마루 밑에 유원이 죄인처럼 무릎 꿇고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사람을 불러들인 이유가 심상치 않으리라 짐작한 염옥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부라고 하시면….”

“마당이며 외당 청소부터 시작해서 번(番)을 서는 일 등등. 자질구레한 잡일 모두 말이네.”

사실상 종인(從人)처럼 부려 먹겠다는 엄포였다. 김수남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 그리하면 저분께서,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두 눈을 갸름하게 휘어 접으며 태백훈이 빙긋 웃었다. 오만하고도 우아한 얼굴이 유원을 눈짓했다.

“그 정도도 못 감당하겠다면 그때는, 제 발로 떠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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