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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14)화 (14/60)

14화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휙! 불시에 쏘아진 화살이 사람들 한가운데로 날아들었다. 소스라치며 나뒹구는 사람들을 관망하듯 화살은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쳐 담장 아래에 꽂혔다.

“지, 지금 뭘 하시는 게요!”

사색이 된 전 호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눈 위에 손을 대고 활을 쏜 자리를 확인하던 태백훈은 양어깨를 으쓱 추슬렀다.

“별것 아닙니다. 성미에도 안 맞는 찬사 늘어놓기가 지루하실까 하여 좀 자극적인 짓을 해 봤는데 어떠셨습니까?”

“자, 자극적인 짓? 지금 농담하실 기분이요?”

“농담이라니. 나는 정성을 다해 그대들에게 맞춰 주고 있거늘.”

“이보시오, 도백 영감! 아까부터 지나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온 정성을 자꾸 비하하시려 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생원이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놀라 자빠졌다.

“저, 저, 저기! 저기!”

생원이 넋 나간 얼굴로 한구석을 손가락질했다. 눈길이 일제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향하는 순간 경악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커다란 뱀 한 마리가 활에 머리가 꽂힌 채 대롱대롱 담장 너머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쩍 벌린 입에서는 검은 독액이 뚝뚝 떨어지며 땅을 시커멓게 부식시켰다.

길이가 넉 자는 족히 될 듯한 독뱀은 원혜에서도 깊은 산중에서나 사는 요수였다. 독 한 방울로도 멀쩡한 사람을 서서히 반송장에 미치광이로 만들기로 악명 높았다. 이런 무서운 요수가 도시 안, 그것도 관청 내부까지 들어올 만한 일은 흔치 않은 경우였다.

독뱀 앞까지 다가가 상태를 확인한 태백훈이 혀를 쯧쯧, 찼다.

“누군지 몰라도 소지품 간수 좀 잘하셔야겠습니다. 저런 위험한 것을 함부로 풀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도백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저 괴물을 부러 풀어 놨단 것이오?”

“음? 나는 전 호장께서 날 즐겁게 해 주려고 독뱀을 데려다 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허! 우리를 모함하려고 관청에다 몰래 푼 것이겠지요.”

“아하, 그러면 내가 그대들을 겁주려고 저 위험한 요수를 잡아와 풀었다?”

“그, 그런 말이 아니라! 흠, 흠,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소립니다. 영감 탓을 하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나도 아니고 호장도 독뱀의 주인이 아니라면, 저것이 승천하다 말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던 모양이로군요.”

그러자 전 호장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태백훈은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들.”

서슬 퍼런 눈빛에 다들 외면하듯 눈치만 살폈다. 태백훈은 손에 감고 있던 헐겁지를 풀었다.

“훼방을 받아 흥미가 식었습니다. 별말씀들 없으시면 이만 해산하시지요.”

두 손을 턴 태백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호장들을 지나쳤다. 그 누구도 쉬이 도백의 걸음을 막아서지 못했다.

외양간에서 한참 말에게 꼴을 먹이고 빗질하던 관노들이 태백훈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천장 중간이 뚫린 축사로 들어서자 횟대에 앉아 있던 수리 한 쌍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반겼다.

태백훈은 가져온 양동이에서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덩어리를 숭덩숭덩 칼로 잘라 내밀자 수리가 순서대로 꿀떡꿀떡 고기를 받아먹었다.

“맛있느냐?”

배불리 먹은 수리가 삐익삐익 울음소리를 내며 태백훈의 손에 제 부리를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어미를 찾는 아기 새 같았다.

“그 시끄러운 늙은이들과 어울리는 것보단 너랑 있는 게 마음이 편하구나.”

씁쓸하게 웃은 태백훈이 새의 부리 밑을 손으로 긁어 주었다. 눈을 감은 수리가 삐익, 하고 부리를 벌렸다.

“먹이 주는 것 정도야 사람을 시키면 될 일인데 손수 돌보십니까.”

어느 틈에 뒤쪽에 선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송아지만 한 새를 팔 토시 위에 가뿐하게 태운 태백훈이 깃을 손으로 골라 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새끼일 적부터 먹이고 기른 녀석들인데 내가 돌봐야지. 안 그래도 황 부윤께서 쓸데없이 내 쪽으로 사람을 죄다 보내신 덕에 아침부터 기분이 잡쳤거든.”

“하하, 송구하게도 제가 아니라 영감을 찾아온 손님들이라 별수 없었습니다.”

“그래? 난 우리 멋지고 현명하신 부윤께서 늙은이들 상대하기 싫으셔서 내게 떠맡기신 줄 알았는데.”

“이런. 티 안 날 줄 알았는데 눈치채셨습니까.”

농 섞은 대답에 태백훈이 비로소 뒤를 돌아봤다. 쪽색 단령을 말쑥하게 걸친 사내가 점잖게 웃고 있었다. 원혜 부윤이자 평사 황우경이었다. 오전 업무를 막 마치고 나온 모양인지 그에게서 먹과 녹인 밀랍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보좌관과 보초병을 모조리 내보낸 축사 안에는 두 남자뿐이었다. 황우경을 지나쳐 수통 앞에 선 태백훈은 고기 기름과 핏물로 지저분해진 손을 헹궜다. 찰랑거리며 일어나는 물거품을 내려다보던 태백훈이 말했다.

“그래서 부탁드린 조사는 진척이 어떻게 되었는가.”

“영감께서 제안하신 대로 암시장 쪽 장물아비들에게 시신을 보여 주니 알아보는 자가 몇 있었습니다. 이들을 추궁해 보니 송산의 향리 윤 씨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송산?”

태백훈이 확인하듯 재차 묻는 말에 황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산이라 하면 원혜에서 동남쪽 삼백 리 정도 떨어진 작은 고을로 산간지방답게 벌채나 버섯 농사 등 임업이 주로 발달한 것 외에 달리 구설도 없었다.

그런 조용한 고을의 향리가 장물아비에게 눈도장을 찍을 정도로 거래가 잦았다니, 실로 좋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향리가 군용품을 빼돌렸다고 시인하던가?”

“윤 씨가 주장하기로는 화승총 중 일부가 불량품이었고 이에 회수 절차를 밟던 중이었는데 도적들에게 빼앗겼다 합니다. 확인차 내보인 일지에도 일자며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긴 했습니다만.”

일순간 황우경이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낯빛에 태백훈이 알 거 같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막상 상부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던 거로군.”

“예, 안 그래도 송산 현령께 슬쩍 말을 돌려 물어봤는데, 전혀 아는 바가 없더군요.”

“그렇게 누락 된 기록이 몇 건이지.”

“현재까지는 여섯 건입니다. 그중 네 건은 특수 물자였습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송산에서는 터줏대감 같은 집안의 차남인데 사실상 그 집안사람들이 현령보다도 원님 소리를 듣는다 합니다.”

급제를 한 것도 아닌 향리에게 원님이라 칭한다 함은 위계, 나아가 조정을 무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경도에서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소리였다.

북관(北關) 지역은 토착 유지인 호족의 권세가 막강했다. 먹고 입고, 심지어 자는 곳마저 호족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으니 지방관들조차 이들 권세에 떠밀려 꼬리를 말고 납작 엎드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고작 임기 이삼 년, 그것도 제비뽑기로 등 떠밀려 발령 온 마당에 호족들한테 대놓고 무시를 받으니 차라리 그들을 뒷배 삼길 택한 것이었다.

“도난품이 있던 곳은 송산이나, 원혜에서 발견됐으니 처결할 권한을 정해야 한다 봅니다.”

“음….”

“일단 지역을 넘어간 사건에 대해서는 가까운 고을이 맡는 것이 관례이긴 합니다만.”

황우경이 품에 들고 있던 권을 양쪽으로 펼쳐 태백훈에게 내밀었다. 각종 법례를 기록한 문서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그가 담백하게 말했다.

“도난품 처리는 이쪽에서 맡되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 대한 처결은 현령에게 맡기지.”

“처결이라 하면, 향리를 처벌하라 명령하시렵니까?”

태백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결정 또한 현령께서 직접 정해야 한단 말이네. 내 말이나 부윤이 관련되지 않았음을 철저히 내세우고.”

“그러면, 필시 가벼운 처벌이 될 텐데요.”

“끽해야 열흘 근신 정도의 경징계 정도려나.”

작게 중얼거린 태백훈이 수리를 앉힌 제 오른팔을 크게 추켜올렸다. 팔에 앉아 있던 수리가 추진력을 받고 휙, 날아올랐다. 큼직한 날개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일으킨 바람은 꽤 매섭고 서늘했다. 이윽고 활공한 수리는 저 멀리 산 쪽으로 날아갔다.

“나나 부윤께서 직접 나선다면 송산 사람들에게도 현령의 입지는 더더욱 별 볼 것 없어질 뿐이야. 그러나 현령께서 근신이든 감봉이든, 혹은 질책에서 그치든 간에 어떤 언행을 드러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전들에게 위신을 세울 계기가 되겠지. 그러니 손수 처분을 결정하시게 해야 하네.”

“그래도 여섯 건이나 되는 횡령 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횡령도 결국 심증일 뿐이지, 고작 장물아비 몇 명이 이름을 말한 것 외에는 확정 지을 만한 증인도 없지 않은가. 무작정 중죄라고 몰아붙였다간 탄압이라며 반발할 거야. 그러면 송산은 손밖으로 밀려나는 거고. 총을 빼돌린 연유도 알아낼 수 없게 돼.”

“그러면….”

“무능한 척 발을 빼되, 현청 내부에 은밀히 감시자를 붙여 두지. 단, 향리 말고도 현령도 감시 대상으로 두고. 놓치는 게 없도록. 아무래도 단순히 횡령 건이 아닌 거 같거든.”

“그자도 의심스러우십니까?”

“그렇다기보다는 현령은 우리 편이라 믿을 거라 생각해서 눈속임을 할 수도 있으니까. 예외를 만들지 말자는 거야.”

군더더기 없는 침착한 지시에 황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도내 자치권을 일부 위임받았다 해도 한 고을의 인사 문제에 무턱대고 개입하는 것이 좋은 방도는 아니었다. 군용품 횡령, 나아가 민병을 방치한 내란죄로 불거질 뻔한 일인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되는 바였다.

거기다 당시 습격했던 도적들 중 하나가 요수를 조종했었다. 요수를 부리는 금기된 사술(邪術)로도 모자라 사람을 해치려 했다. 어쩌면 태백훈의 말 대로 단순 횡령 건에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마땅한 감시자로 부릴 만한 인물을 머릿속으로 추스르던 황우경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참, 사저에서 심부름꾼이 와 있습니다. 영감의 귀가 여부를 여쭙더군요.”

“…….”

태백훈이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흘 전 신방을 박차고 나온 이후로 태백훈은 내내 관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관사야 의대를 찬 관리라면 그 누구든 숙직할 권한이 있다고는 하나 새신랑이 며칠째 방랑하니 아랫것들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닐 만도 했다. 안색을 살핀 황우경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시면 오늘도 관사에 머무실 예정이라 말을 전하….”

“아니, 기방에 갔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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