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눈만 감았다 하면 초야 날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스레한 불빛, 녹은 촛농에서 풍기던 불 냄새, 그 모든 얕고 자그마한 감각을 짓누를 듯이 장악하던 남자의 권태로우면서도 스산하던 기척.
그는 단순히 유원이 사내 신부라 탐탁잖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적개심으로 물든 눈동자가 검은 독 같았다. 온몸으로 경멸을 드러내다 못해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양반을, 사대부를, 제 부친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이토록 노골적인 적대를 제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었다. 고명딸을 대신해 쓰다 버릴 꼭두각시로 유원을 내보낸 것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겠지. 어차피 반쪽짜리 자식이 가서 무슨 취급을 받든 상관없을 테니까.
억울한 나머지 순간 울컥 눈물이 받쳐 올랐지만 어쩌겠는가. 설령 정황을 알았다고 한들 끝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저녁때가 되자 밥 짓는 냄새가 집 안 곳곳으로 퍼졌다. 석반을 받아 오겠다며 찬간으로 뛰어갔던 막둥이가 돌아왔다.
“더 달라고 말해도 이, 이거밖에 못 준다구, 싫으면 가라고 해서….”
힘없이 내민 두 손에는 낡은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물에 끓인 누룽지와 간장 작은 종지. 그마저도 새 모이만 한 그릇이라 한 사람 배불리 먹기 힘든 양이었다. 며칠 전 유원이 막 저택에 왔을 때 나왔던 진수성찬과 비교하면 완전히 딴판이었다.
의도가 불 본 듯 뻔했다. 신혼부터 영감께 소박을 맞았으니 그 아랫것들마저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태도였다. 유원은 그리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끼니라도 챙겨 준 것으로 봐선 굶길 심산까진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주눅 들었던 막둥이도 막상 입에 곡기가 들어가니 불평이 쑥 들어갔다. 유원은 허겁지겁 술질하기 바쁜 막둥이의 그릇에 제 몫을 덜어 주며 말했다.
“이따 집사 어르신에게 네 거처를 부탁할까 해.”
“저, 를요?”
“옥양으로 편지를 보내더라도 답장 받는 데는 달포 정도 걸리니까, 그사이에 뭐라도 하면 자리 잡기도 편할 거고. 여기도 일손이 넉넉하진 않을 테니 아마 마다하진 않을 거야.”
굳이 막둥이를 유원이 손수 챙길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용무는 끝났으니 제 갈 길 가라 하면 그만이건만 어린 것더러 혼자 옥양으로 돌려보내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구두로 약속한 말도 있고 하니 어떻게든 막둥이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입술에 밥알을 묻힌 채 막둥이가 물었다.
“그, 그럼, 아기씨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음, 글쎄다.”
유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막상 제 앞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고민해 봤자 해결도, 결론도 나지 않으니 외면하고 싶은 탓이었다.
“뭐든지 삼세번은 해 보란 말도 있으니, 그분을 직접 뵐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 후에는 얼굴을 보고, 말도 계속 묻고, 그러는 수밖에.”
“그, 그러다 또 이번처럼 무시당하시면은요. 그러면 아기씨가 마, 많이 소, 속상하실 텐데….”
막둥이가 말끝을 흐렸다. 초야 날 보고 들은 말 때문에 걱정하는 얼굴에 유원은 애써 괜찮다 웃어 보였다. 속상하지 않노라 하면 거짓말이었다. 새벽에 태백훈이 신방을 박차고 나갔을 때의 허망함이 아직도 가슴 속을 찌르는 듯했다.
그렇다 하여 여기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만일 태백훈이 결별을 공적으로 청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옥양으로 돌아갈 기회조차도 사라지는 셈이었다.
심지 끝까지 다 타 버린 밀랍초에서 잔불 냄새가 자욱했다. 이곳 원혜에 온 뒤로 유독 밤이 길어진 기분이었다.
* * *
대화를 피할지도 모른다는 유원의 예상과 다르게 염옥화는 쉽게 대면을 수락했다. 이른 아침부터 그는 행랑채에서 바느질 중이었다. 대부분 이 집 하인들이 입는 옷으로 수북하게 쌓인 옷감만 봐도 하인 수가 대략적으로 가늠이 될 정도였다.
바느질거리를 내려놓은 염옥화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일할 자리를 내어 달란 말씀입니까?”
“네, 오는 길에 이 아이 주인 되시는 매파 어른께서 변고를 당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입니다. 당장 옥양 주인집으로 보내자니 상황이 마땅치 않고요.”
“그렇긴 하나 이런 일은 감히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염옥화가 곤란한 얼굴로 말을 삼켰다. 행랑채를 비롯하여 반가에서 종살이하는 일꾼들은 죄다 안주인의 소관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유원이 처사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타당할 테지만 권솔들 사이에선 유원을 제대로 된 안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초야에 도백 영감께서 사내 신부를 보고는 비위가 상해 박차고 나갔느니. 입이 방정맞은 몇몇 것들 때문에 원혜부 시장 바닥까지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도백께 종놈 한 명 새로 들이시겠냐 묻기엔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태백훈은 여태 저택 일에 관련해서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집안 대소사는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저보다 집사가 더 잘 알 것이란 연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살림부터 인건 등 행랑 관련된 모든 부분은 되도록이면 집사 염옥화와 김수남 두 사람이 의논하여 결정하곤 했다.
“옥양에서 소식 오는 며칠간 군입보다는 일손을 돕는 것이 막둥이한테도, 이 집에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부탁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염옥화는 유원 옆에서 납작 엎드린 막둥이에게 말을 돌렸다.
“전 주인 밑에선 뭘 했었느냐.”
“시, 시, 심부름이라면 다 했었습니다. 말이랑 나귀도 돌볼 줄 알고, 바, 밭일도 아주 조금은….”
“그럼 나무나 장작은?”
“해, 해 봤습니다. 마른, 나, 나뭇가지도 줍고, 자, 장작도 쪼, 조금은….”
발발 떠는 몸이 비쩍 마르긴 했어도 병색은 없었다. 말을 좀 더듬긴 하지만 어차피 종살이라는 것이 말을 하기보다 듣는 일인지라 문제 될 만한 부분도 아니었다.
염옥화는 곧바로 나무꾼을 불렀다. 새 일꾼으로 잘 부리라는 말에 턱밑에 희끗희끗한 수염이 난 늙은 나무꾼은 더 묻지도 않고 막둥이를 데려갔다. 원하는 대로 노비 문제를 해결해 주었건만 유원은 별채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더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염옥화가 다시금 묻자 잠시 뜸을 들이던 유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괜찮다 하시면 저 또한 소일거리라도 하고 싶습니다.”
“…아기씨께서 말입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유원을 보며 염옥화가 곤란한 기색을 웃음으로 무마했다.
“굳이 궂은일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 적적하시거든 소인이 바깥에서 언문책이라도 알아보라 하겠습니다.”
“별채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을 바에는 작게나마 일손이라도 하면 마음이 편할까 하여 드리는 말입니다.”
자진해서 행랑것들이나 할 법한 소일거리를 하겠다니,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었다. 제아무리 서자라 해도, 성씨를 받은 양반집 자제들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부탁이 아니던가.
소일거리야 이 집에서 널리고 널린 것이 손 가는 일이었다. 그렇다 한들 눈앞에 공손하게 서 있는 저 소년에게 여느 아랫것들 대하듯 일을 맡기자니 선뜻 그러기 쉽지 않았다. 아무리 소박을 맞았느니, 영감이 거들떠보지도 않느니 해도, 공식적인 축객령이 떨어지지 않은 한 윗사람이었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으로 대했다간 도백의 권위를 깎는 처사가 될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염옥화의 머릿속에 문득 사랑채 뒤편에 있는 낡은 서고가 떠올랐다. 서고라고는 하지만 태백훈이 중요하게 여기는 책이나 문서는 대부분 외당 쪽으로 옮겨 놔 현재는 창고처럼 쓰이는 곳이었다.
게다가 바로 옆이 사당이다 보니 종들도 장독간을 가거나 뒷마당 우물 청소를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굳이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랫것들과 반경이 겹칠 일도 적을 테니 군말이 돌 일도 적어질 터였다. 즉, 영감의 귀에도 들어갈 말이 줄어든단 뜻이었다.
이에 염옥화는 곧바로 유원을 뒤뜰 서고로 안내했다. 오래 방치된 흔적으로 가득한 서고 안에는 갖가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한가하실 때마다 이곳 정리를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하루 만에 하기 힘든 일이니 촉박하게 서두르시지 않으셔도 되고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없는지요?”
“바로 옆이 사당이긴 합니다만, 사람 드나드는 일이 거의 없으시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사당이란 말에 유원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위패를 모신 자리는 외부인이 사사로이 걸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도 아는 수준이었다. 날이 좋을 때 사당 문을 열고 환기 정도 해 두면 될 듯싶었다.
“그럼 소인은 할 일이 있어 돌아가 보겠습니다. 힘드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인사를 마친 염옥화가 창고 밖으로 물러섰다. 홀로 남은 창고에선 휘익,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만 적적하게 맴돌 뿐이었다. 거미줄과 먼지로 가득한 서고 천장을 올려다본 유원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 * *
볕과 그늘이 맞닿은 자리에 선 태백훈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팔을 뒤로 젖히며 어깨를 든 그가 크게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던 현이 풀어지기 무섭게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과녁판에 꽂혔다. 방금 쏜 것을 더하고도 정중앙에 꽂힌 화살이 마치 바늘집 같았다.
“이야, 명궁이십니다!”
“실로 놀라운 솜씨이십니다. 가히 전한 명장 이광에 견준다 해도 지나치지 않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과 칭송이 쏟아졌다. 관노가 미리 가져다 둔 수건으로 땀을 훔친 태백훈이 뒤에 일렬로 선 사람들을 돌아봤다.
“별것 없는 연무장에 이리 많은 사람이 서 계신 걸 보니 내가 재밌는 구경거리긴 한가 봅니다.”
“허허, 감히 도백을 구경거리 삼는다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도백의 솜씨가 워낙 경이롭다 말들 하니 그 진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자 함이지요.”
익성군의 군수이자 호장인 전 씨의 말에 생원이며 진사며 어중이떠중이들까지 합세해 다들 옳다, 하며 가세했다. 이에 태백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기야, 며칠 전에 이보다 더 재밌는 일이 있었군요.”
“재밌는 일이라면 무엇을 말하십니까?”
“뭐긴 뭐겠습니까. 내 혼례를 말하는 것이지요. 굳이 하례품까지 들고 와 얼굴을 비출 정도로, 꽤 흥밋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던데. 고작 이런 활쏘기로는 그대들 김이 샐 만도 하지요.”
“아니, 그것은 그러니까…….”
“덕분에 뵙기도 힘든 분들을 다 만나 보게 되고,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가늘게 휘어진 두 눈에 일제히 꿀 먹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태백훈은 유유히 과녁대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마치 춤을 추는 듯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과녁대에는 방금까지 그가 쏜 화살 수십 개가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장신구를 고르듯 손가락으로 깃을 고르던 그가 개중 하나를 단숨에 쑥 뽑았다.
“그런데 이렇게나 좋은 자리에.”
활 머리를 돌린 그가 활시위를 잡은 어깨를 뒤로 힘껏 젖혔다. 호장들을 응시하는 눈빛이 살벌했다.
“불미스러운 잡것이 기어들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