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8)화 (8/60)

8화

“예?”

“그, 저희도 지나가던 길에 이 사태를 우, 우연히 보게 된 것뿐이라서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대답이었다. 방금 사내들에게 돌아갈 준비 하라 명령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다른 고을이 목적지였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양해 구할 것 없이 제 갈 길 가면 그만인 일이었다. 어쩐지 말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이 유원을 원혜로 들이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유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무턱대고 같이 가 달라며 억지라도 부려야 할런가.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은 고용된 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던 사냥꾼일 뿐이지 않은가. 거기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 한들 유원에게도 초면인 사람들이었다. 이미 한 번 풍파를 맞은 상황에서 섣불리 동행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혼자 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데, 그것대로 막막했다.

한나절이라 했다. 한나절. 유원은 저 너머 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원혜에 가야만 했다. 죽더라도 원혜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제 아비가 병든 어머니를 먼 곳에 버릴지도 몰랐다.

가까운 곳에서 나귀 울음소리가 났다. 안장 얹은 나귀가 나무 아래에서 홀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최 씨 부인이 타던 나귀였다. 나귀에게 다가간 유원이 두 손으로 나귀의 머리를 붙잡고 살살 부드럽게 달랬다. 불안하게 콧숨을 벌렁거리던 나귀가 금세 진정했다.

“방향만 알려 주시면 스스로 가겠습니다.”

부탁이되 단호한 어투였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모른다고 잡아뗄 수도 없는 판이었다. 한숨을 쉰 곽현욱이 고개 위를 가리켰다. 북서로 길을 따라 쭉 오르기만 하면 원혜라 하니 여기서 멀지 않다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유원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곽현욱에게 돌려주려 했다. 곽현욱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그냥 아기씨 입으세요.”

“귀한 물건을 어찌 빈손으로 받겠습니까.”

“여기선 흔한 가죽 외투입니다. 게다가 날이 이리 추운데 외투마저 없이 산길을 지나시려면 힘드실 겁니다. 오신 것에 대한 약소한 성의라 생각해 주십시오.”

한사코 돌려받지 않겠다 하니 하는 수 없이 유원은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에 올라탄 곽현욱이 한참 걱정스레 서성거리다 이내 힘겹게 말머리를 돌렸다.

말발굽 소리가 사그라졌다. 유원은 다시 홀로 남았다. 헛헛하긴 했지만 서럽지는 않았다. 약초를 캐느라 도성 인근 삼림을 오르내릴 때도 심마니들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피해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안장을 고쳐 매고 나귀 등에 짐을 실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마 밑에 숨겨 두다 보니 비단보가 눈에 젖어 엉망이었다. 다행히 서신보에 넣어 둔 편지는 멀쩡했다.

휘영청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던 유원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어여쁘기도 하지. 방금 있었던 일련의 불행은 영 모른다는 듯, 백치처럼 밝은 달이었다. 그래도 달이 환한 덕에 등촉이 없어도 산길이 어둡지 않아 망정이었다.

그렇게 걸음 옮기던 중이었다. 숲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원은 우뚝 멈춰 서서 소리가 난 곳을 응시했다. 피 냄새를 맡고 내려온 요수인가. 기척이 크지 않으니 자그만 토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우나 족제비일 수도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수풀 사이로 인영이 슬그머니 비쳤다. 생각보다는 몸집이 조금 컸다. 나뭇가지를 집어 든 유원이 눈과 낙엽이 무성하게 덮인 덤불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놔두고 달아나기엔 뒤를 습격당할지도 몰랐다. 귀신이든 요수든, 차라리 눈앞에 끌어내는 것이 나을 듯했다.

덤불 사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것은 귀신이나 산짐승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막둥이?”

최 씨 부인과 동행하던 시동 막둥이었다. 다행히 사람이구나. 나뭇가지를 든 손을 내린 유원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둥이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아, 아기씨. 무사하셔서, 참말로 다행이에요.”

“마님은? 마님은 어디 계시고?”

“마, 마, 마님께서, 마님께서… 다, 다, 달아나시다 칼에 맞으셨어요. 그래서, 그래서….”

말을 채 잇지 못한 막둥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타깝게도 그 역시 산적 떼를 피해 달아나다 참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유원은 훌쩍거리는 막둥이에게 다가가 소매로 젖은 뺨과 코를 닦아 줬다.

“죄송해요, 참말로 죄송해요. 아기씨.”

막둥이가 훌쩍거리며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비록 저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나 타박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열넷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무장한 장정 어른들도 놀라 달아난 마당에 아이가 무슨 수로 그 상황에서 영특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최 씨 부인은 안됐지만 그나마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부지한 게 기적이었다.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어디 크게 다쳤어?”

“저, 저는 괜, 괜찮아요. 으윽….”

막둥이가 순간 한쪽 눈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꼴이 엉망이었다. 바지는 길게 찢어져 양 무릎에는 피가 맺히고 짚신을 구겨 신은 왼쪽 발은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도망치느라 산을 뛰어오르던 중에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이었다.

디딜 수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골절은 아니겠지만 복사뼈가 저 정도로 부어올랐으니 서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최대한 힘을 뺀 손길에도 아파 움찔거리는 게 뻔히 보이건만, 막둥이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픈 티를 냈다가는 산중에 버리고 갈까 싶어 참는 것이리라.

한숨을 삼킨 유원은 차가운 눈으로 열기를 식히고 옷자락을 찢어 능숙하게 붕대를 만들었다. 부목으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발에 대고 붕대로 꽉 죄어 감았다.

“아까보다 좀 나아?”

“예. 훠, 훨씬요!”

막둥이가 신기하다는 듯 제 발을 까딱거렸다. 그저 발목에 막대기를 대고 묶어 줬을 뿐인데, 신통방통하게도 아픔이 한결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두 손을 가볍게 턴 유원이 막둥이를 부축해 나귀에 그를 태우려 했다. 막둥이가 손사래를 쳤다.

“제, 제, 제가 아니라 아기씨가 타셔야죠!”

“그런 다리로 어찌 걸으려고?”

“아, 아니에요. 아까보다 훨씬 아, 아, 안 아파요.”

“임시방편이라 그렇게 느끼는 거야. 괜히 무리했다간 영영 다리를 못 쓸 수도 있어. 그리되고 싶진 않을 것 아니냐.”

다리 불구가 된다는 말에 겁먹은 막둥이가 더는 마다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나귀 등에 올라탔다.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는 것이 퍽이나 어색하고 무안한 얼굴이었다. 여태 주인이 탄 나귀나 짐수레를 끌면 끌었지, 시중 받아 본 적 없는 탓이었다. 행여나 흔들려 고꾸라질까 막둥이의 허리춤에 안장을 단단히 고정시킨 유원이 대답했다.

“하루 단디 걸으면 원혜라더구나. 가서 의원께 보이면 금방 고쳐 주실 거야.”

“예에.”

막둥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원은 위로 대신 어린 시동의 너저분한 앞머리를 쓸어 정돈했다.

* * *

바람이 습하다 싶더니 나풀나풀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춥다. 뺨과 목덜미에 닿는 뒤바람에 유원은 어깨를 깊이 움츠렸다.

지난 대설에 큰스님께서 돌아가셨다. 주인 잃은 산사를 새로 이어받은 승려는 절을 보수하는 대신 헐값에 용지를 팔아 치웠다. 두 모자가 살던 곳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리하여 짐을 꾸린 어머니가 결심하듯 말했다.

‘도성으로 가자꾸나. 거기에 뵐 분이 계신단다.’

남쪽에서 윗지방까지 오는 데만 달포 가까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어머니는 앞이 보이지 않아 걸음이 느렸다. 수중에 있는 조막만 한 여비로는 마차 하나 빌려 타기도 힘들 정도였다.

간신히 입성한 수도는 화려한 도시였다. 편편한 돌을 깐 대로 위로 마차와 수레가 끊임없이 지나다녔고 저잣거리는 북적거렸다. 우거진 나무와 메아리치는 새소리 외에는 인적 하나 보기 드물던 산사와 딴판이었다.

홍 대감댁을 묻는 말에 주막집 주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홍 씨가 어떤 가문이던가. 이곳 옥양에서도 권세가 대단한 양반이시라 여럿 높으신 양반분들 기거하신다는 사대문에서도 안쪽에 계시는 몸이셨다. 집안 어른 되시는 대감께서는 물러났으나 그 아들 되는 홍세환 지평 나리만 해도 남부권에서 벌어진 역모를 왕께 읍소한 공으로 대청에 그 이름이 오르내린다 했다.

그런 대단한 집안을 찾아뵙겠노라 하며 주소를 묻는 나그네라. 주모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손님을 훑어봤다. 누덕누덕한 장옷을 뒤집어쓴 젊은 여인은 허름한 행색에도 선녀처럼 어여뻤다. 헌데 문제는 옆구리에 딱 붙은 어린아이였다.

애 딸린, 아리따운 처자. 벌써부터 머릿속에 사연이 그려지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술국을 퍼마시던 사내들조차 흥미로운 눈길로 흘깃거렸다. 조만간 영 좋지 못한 치정 소문이 저잣거리에 돌겠구나 싶었다.

거년에 장남 홍세환이 장가든 일을 모르는 자가 없는 판인데. 허나 남의 사정에 무슨 말을 얹으랴. 측은한 한숨을 삼킨 주모는 말없이 고갯짓으로 사대문 안쪽을 가리켰다.

그리하여 어머니 손을 이끌고 당도한 곳은 집집마다 본새가 화려한 도성에서도 돋보이는 기와집이었다.

장옷을 내려쓴 어머니가 대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한참 만에 머리를 쪽진 노파가 얼굴을 드러냈다.

‘어디 사는 누구인데 대감댁을 찾아오신 건가.’

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말이 들리는 방향으로 더듬더듬 나선 어머니가 조심스레 용건을 답했다.

‘홍 지평, 나리를 뵙고자 합니다.’

‘작은 주인마님을?’

‘예, 명래사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것입니다. 여기 산사에 계시던 스님께서 제 처지를 대신하여 써 주신 글입니다.’

어머니가 품에 고이 간직하던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일전 큰스님께서 어머니를 위해 써 주신 편지라 했다. 노파가 주름진 눈을 치켜뜨고서 어머니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다음에는 치마폭에 숨은 유원을 쏘아보는 게 아닌가.

흡사 물건 따위를 평가하는 것처럼 매정한 눈초리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