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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7)화 (7/60)

7화

빈정거리는 말투, 조소 섞인 목소리는 느른했다. 유원은 입술이 빨개질 정도로 꽉 깨물고서 남자를 노려봤다. 감흥 없이 무심하던 남자의 눈동자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멀리서 말 우는 소리가 나더니 “형님!” 하고 부르짖는 목소리가 산을 흔들 것처럼 메아리쳤다. 반대편 산길에서 한 무리가 말을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사내 하나가 말을 멈춰 섰다.

“대체 한두 번도 아니고 또, 또! 아까 뭐라 하셨소? 분명히! 수색하고 발견하는 대로 연락을 나누자 하시지 않았소? 그런데 또 혼자 해결하면 나만 또 나중에! 잔소리를 한 바가지로 들을 게 뻔하잖습니까! 형님은 내 처지를 생각하지도 않으시오?”

득달같이 쏘아붙인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크게 경악했다.

“이게 뭐야. 사람이 몇이나 죽은 겁니까? 어쩐지 피 냄새가 지독하게 난다 싶더니. 당분간 이 길로는 다니지 말라고 알려야겠구만요. 아니, 잠시만 저, 저건 나티? 나티가 대체 왜 여기 있답니까? 이놈은 아직 활동하기엔 이른 시기일 텐데?”

이리저리 캐묻는 말에도 남자는 대답 없이 태연하게 바닥에 흩어진 총탄을 살폈다. 찌그러진 탄환을 손에 쥔 채 굴리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현욱아. 도망간 놈들은 다 잡았느냐?”

현욱이라 불린 사내가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예. 저를 뭘로 보고요. 한 놈도 안 놓치고 싹 다 잡았습니다.”

뒤쪽에서 사내들에게 포박된 도적 다섯이 질질 힘없이 끌려오고 있었다.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호패를 현욱에게 던져 넘겼다.

“전문적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사기를 치는 놈들이다. 피해만 해도 여러 건이고. 금액은 현재 파악된 것까지 더하면 은전 천을 넘겠지.”

“그러니까 이 자가 그 사기 친 작자란 말입니까?”

“아마도. 금액이 커지니 도적들까지 합세시켰나 본데 한쪽이 배신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던 모양이야.”

덤덤한 상황 설명을 들은 현욱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넘겨받은 호패를 본 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잠시만. 이 호패는 태씨 가문이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지?”

“이, 미친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답니까? 어디 감히 도백이 지라고 거짓을…!”

“그 정도로 끝냈다면 적당히 넘어갈 텐데. 관군 중에서도 정예군한테만 제공되는 화승총이며 갑의까지 입고 다닌 모양이더구나.”

“예? 뭐라고요? 그거 죄다 군용품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데 일개 민간인이 함부로 빼돌려 입고 다녔다니, 자칫하면 내란 방조 또는 역모로 오인될 만한 짓거리가 아니더냐.”

작게 실소한 남자가 검집으로 땅을 탁, 두드리며 말했다.

“부윤에게 알리기 전에, 화승총을 팔아 치웠을 만한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그럼 시신을 다 수거해야 합니까?”

“시신 중 형체가 없는 것은 길이 아닌 쪽으로 던져두거라. 시체 냄새 맡은 요수들이 괜한 사람들 건드리지 않게. 그 외 나머지는 전부 실어라. 직접 대면시키면 제 발 저린 놈이 나올 거다.”

“예, 예. 그럽시다. 아주 그냥 본때를 보여 줘야죠. 저기, 그런데 형님, 이분은… 뉘신지요?”

현욱이 옆에 주저앉아 있던 유원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느릿하게 유원을 돌아본 남자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글쎄다. 누군지 함자를 묻진 않았다만, 아까 내게 말하길 저기 누워 계신 이를 제 서방이라 하더구나.”

“서방?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이라면… 저기 저 사기꾼을 서방이라고 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도백 사칭범을 서방님이라고 불렀다면, 그럼 설마 영감께…?!”

쉿, 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막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냉엄한 눈짓이었다. 입을 꾹 다문 현욱이 복잡미묘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구부렸던 몸을 편 남자가 유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정황을 전부 들었을 유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시선을 피하는 유원을 향해 남자가 말했다.

“죽은 낭군께서 심지어 가짜였다니, 참으로 안되셨네.”

“…….”

“허나 어쩌겠는가. 필연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분명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 어디에도 배려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원은 힘없이 남자를 올려다봤다. 무심한 얼굴에 입가만 비틀려 있었다.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유원의 처지를 조롱하는 듯한 잔혹한 미소였다.

이내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매정하게 몸을 돌린 남자가 갈기와 몸통이 죄다 검은 말에 올라탔다. 사체는 죄다 수습하여 길을 치우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말발굽 달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남아서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하기 바쁘던 현욱이 유원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기,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시거나 그런 곳은 없고요?”

험상궂은 얼굴과 달리 굉장히 다정한 말씨였다. 유원은 힘없이 끄덕였다. 주저앉아 있는 유원을 내려다본 현욱이 속으로 혀를 찼다.

보기만 해도 딱한 모습이었다. 넝마가 된 장옷과 찢겨 나간 치마저고리는 피투성이였고 신발은 어디 갔는지 한쪽은 버선발이었다. 거기다 피와 흙으로 지저분해진 얼굴은 혼이 쏙 빠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밤중에 험한 꼴을 당했으니 놀라 말문이 막힐 법도 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유원을 보다 못한 현욱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어깨에 씌웠다. 당황한 유원이 벗으려 하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입으십시오. 새벽은 어지간히 팔팔한 놈도 못 버틸 정도로 춥습니다.”

“하지만, 나, 나리께서도 추우실 텐데요.”

“저야 어지간한 팔팔한 놈들보다도 잘 버팁니다. 게다가 산 사람 얼어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고, 그, 그리 헐벗은 꼴이신 것이 민망하여 그렇습니다.”

그제야 유원은 제 꼴이 엉망인 것을 깨달았다. 장옷이며 저고리 고름이 찢어발겨 속곳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잊고 있던 추위가 한발 늦게 찾아왔다. 손이며 발이 따끔따끔 저리다 못해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유원은 현욱에게서 받아 든 외투를 걸쳤다. 보기에는 투박하고 낡은 외투인데 입자마자 신기하게도 한기가 싹 사그라졌다.

“불개로 만든 외투라 바람에도 식지 않을 겁니다. 본시로는 가죽에서 나는 냄새가 살짝 고약한데, 이것은 숯가루를 갠 물에 담갔던 것이라 좀 덜할 겁니다.”

“불개?”

“아, 아랫지방에서는 드문 놈이려나요. 보기에는 들개와 비슷한 놈인데 온몸이 새빨개서 불개라 부릅니다. 가죽이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열기를 내서, 방한복으로도 지어 입습니다. 토끼보다 더 많이 보이거든요.”

즉, 요수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란 말이었다. 도성에서 요수 가죽은 귀하고 값진 물건이었다. 아무리 흔해 빠진 것이라 해도 요수 가죽으로 방한복으로 지을 정도라니, 실로 대단한 사냥 실력을 갖춘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유원의 눈치를 살피던 현욱이 이내 제 소개를 했다. 그는 곽씨 성의 현욱이란 자로 원혜부 엽사였다. 한참 도성으로 올려 보낼 산달 가죽을 모으던 중에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난데없이 수상한 자들이 갈래로 뛰어나오는 걸 보고 급히 이곳으로 온 것이라 했다.

엽사라는 말에 유원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도성만 하더라도 착호갑사 같이 산속을 누비며 요수 및 산짐승을 내쫓는 전문 공(公)엽사들이 항시 있었다.

“헌데, 그, 아기씨께서는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저는 유원… 홍, 유원이라 합니다.”

유원은 가시를 삼키는 것 같은 심정으로 간신히 이름 석 자를 말했다. 이번 혼례로 호적에도 제 이름을 올려 주겠다, 하며 하사받은 성씨인데도 여전히 제 것 같지 않았다.

“저, 그런데 아까 그분께서도 나리와 같은 엽사이십니까?”

“그분이라면?”

“저쪽으로 먼저 가신 분 말입니다.”

당황한 얼굴로 산길 쪽을 바라본 곽현욱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형님께선… 대장 같은 분이십니다.”

“대장?”

“예, 뭐, 그런 게 있지요.”

어딘가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더는 묻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유원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 많은 사냥꾼 무리를 눈짓 손짓만으로 부렸으니 대장 같은 사람일 터였다.

유원은 문득 남자의 시선을 떠올렸다. 오금이 저릿해질 정도로 서슬 퍼런 눈이었다. 동시에 분노가 가득했다. 일개 가짜를 서방이라며 감싼 자신이 추해 보였던 걸까. 그도 아니면 유원이 귀한 신분은 아니라는 사실까지 꿰뚫어 본 걸까. 그렇다 한들, 마치 원수 대하듯 사람을 그리 야멸차게 대할 필요까진 없었다. 가짜인 걸 알려 줬다면 유원도 굳이 그를 막아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칼날처럼 얇은 바람이 뺨과 목덜미를 스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위였다. 유원은 덜덜 떨며 몸을 웅크리고 외투를 더욱 단단하게 여몄다. 하필 이럴 때 한쪽 신까지 잃어버릴 줄이야. 버선이 속까지 젖어 얼음물에 담가 놓은 것만 같았다.

“다행히 신을 만한 상태더군요.”

주변을 잠시 돌고 온 곽현욱이 유원에게 품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비단신이었다. 유원이 신기 편하도록 어깨를 빌려준 곽현욱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아기씨. 형님께서 좀 매정하시긴 했지만, 나쁜 분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진 마세요.”

어쩐지 그를 대신해 변명하는 듯한 말이었다. 행여나 제 생부에게 한탄이라도 전할까 싶었던가. 어차피 곽현욱이 우려하는 비난은 일어날 일도 없을 터였다. 일개 천것이 모욕당한 것이 무슨 대수가 되겠는가. 그러나 유원은 굳이 이런 사정까지 입에 담지 않았다. 구태여 그들이 알 필요는 없을 사연이었다.

“나리! 여기 수거 다 했습니다.”

어느새 주변 정돈을 마친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곽현욱을 불러 댔다. “알았다, 이놈들아! 속히 돌아갈 준비들 하거라!” 소리를 크게 지른 곽현욱이 뒷목을 벅벅 문지르며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저어, 그럼 아기씨는 어찌하시렵니까?”

그는 사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당장은 날도 어두워 멀리 가기 힘드실 겁니다. 여긴 노련한 산쟁이들도 힘들다 하는 곳입니다. 아랫것 중 길눈 밝은 녀석을 하나 붙여 드릴 테니 가까운 주막에서 숨을 좀 돌리신 다음, 사가로 돌아가시지요. 일단 그, 집안 분들께도 사정을 알리셔야 하지 않습니까.”

정중한 물음에 유원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원혜로 가겠냐는 말도 아니고 굳이 사가로 돌아가라니.

“송구하오나, 여기서부터 원혜가 많이 멉니까?”

곽현욱이 입술을 우그러트렸다. 몹시 곤란한 기색이었다.

“음, 그게 그러니까, 멀진 않습니다. 바삐 걸으면 한나절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다만….”

“다만?”

“당연히 저희도 아기씨와 동행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당장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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