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6)화 (6/60)

6화

유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눈시울에 그렁그렁 맺혔다.

한 번도 욕심부리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자라 보이지 않으려고, 괴물 같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마저도 한낱 천것에게는 큰 야망이었던 걸까.

“두목, 저것은 어떻게 할까요?”

“뭘 말이냐?”

“저 기집… 아니, 놈 말입니다.”

젊은 부하가 넋이 나간 듯한 유원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꼴은 저래도 꽃가마까지 태울 정도면 양반집 자식인 것은 틀림없어 보이는데, 인질 잡아 흥정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게다가 옥양에서 왔다잖습니까? 옥양 양반집이면 꽤 짭짤하게 뜯어낼 수 있지 않….”

“멍청한 놈! 생각이라고 하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냐? 양반집에서 굳이 아래 달린 놈을 신부랍시고 꾸며다 보낸 걸 보면 모르겠느냐? 필시 가라로 색시를 보낸 건데 흥정을 해 줄 턱이 있냐?”

“그, 그렇겠군요.”

“까마귀 우는 소리 때문에 재수 없는 날인가 했더니, 이런 염병할!”

가래를 모아 바닥에 뱉은 두목이 여전히 시신에 달라붙어 있는 유원에게 다가섰다. 이렇게 된 이상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일 작정이었다. 살려 둬 봤자 쓸모도 없는 것인데 죽여 분풀이라도 해야 성이 찰 듯했다.

휘파람 소리를 들은 나티가 고개를 돌렸다. 두목이 입을 열었다.

“포상이다. 저놈부터 먹어 치워라.”

쿵, 쿵, 다가오는 괴물을 마주한 유원은 덜덜 떨리는 턱을 앙다물고 신음을 삼켰다. 하다못해 날붙이라도 손에 쥐고 있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텐데. 손에 잡히는 건 차가운 눈과 낙엽뿐이었다.

“계집이었더라면 서방질 실컷 하게 해 줬을 텐데. 꼴값을 못 하는 놈이로구나.”

멀찌감치 물러나 지켜보던 두목이 히죽 웃었다. 다른 사내들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무력한 사냥감이 살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을 구경할 생각에 벌써 몸이 들떴다.

그때였다. 쉭, 바람을 날카로운 것으로 베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늘이 도적들 머리 위로 드리우더니 몸집이 커다란 수리가 날아들어 도적 하나를 할퀴었다.

“끄아악!”

발톱에 눈이 찢긴 사내가 얼굴을 감싸며 울부짖었다. 또 다른 한 마리가 내리꽂듯이 하강하며 날갯짓을 하니 도적들이 돌풍에 부러진 가지처럼 나뒹굴었다. 두목이 기다란 창을 휘두르며 수리를 몰아냈다. 수리가 향한 곳은 나무 꼭대기도 높은 벼랑도 아닌, 웬 남자의 팔 위였다.

“멀리 날아가기에 담비라도 잡아 오나 했더니, 더한 것을 찾아왔구나.”

삐익, 삐익, 대답하듯 지저귀는 수리의 턱을 긁어 준 남자가 웃었다.

“그래, 그래, 착하기도 하지.”

부드러운 말투와 다르게 암굴 속에 메아리치는 것처럼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네, 네놈! 어디서 온 놈이냐!”

도적 하나가 횃불을 남자 쪽으로 들이밀며 소리 질렀다. 사박, 사박, 눈을 밟는 발소리가 느긋했다. 이윽고 훤한 달 아래로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두목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방해꾼을 노려봤다. 삿갓에 팔 토시하며 솜을 틀어 만든 외투. 사냥길에 오른 매꾼인가. 감찰 다니는 관병대라면 곤란할 테지만 겨울 북쪽 산을 드나드는 사냥꾼은 그저 또 다른 사냥감일 뿐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소란을 듣고는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잘 만났다. 분풀이도 할 겸 모자란 벌이도 두둑하게 채울 수 있겠구나. 음흉하게 웃은 두목이 목을 좌우로 우둑우둑 돌렸다.

“어디서 날아든 잡새인가 했더니만, 매꾼이면 얌전히 토끼 사냥이나 할 것이지.”

“글쎄, 토끼보다 더한 사냥감이 있으니 여기로 온 것 아니겠는가.”

“저놈 하는 소리 들었느냐? 눈바람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 틀림없구나. 하하하!”

기세등등한 도발에 부하들도 덩달아 히죽거렸다. 그래 봤자 새를 부리는 놈이었다. 아무리 조련이 능숙하다 해도 술수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스물이요, 저쪽은 혼자였다. 도끼를 고쳐 잡은 두목이 발을 쾅 굴렸다. 공격하라는 지령에 무기를 쥔 도적들이 일제히 남자 쪽으로 뛰어들었다.

“하아.”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쉰 남자가 안장에 앉아 있던 수리를 휙 날려 보낸 것과 동시에 눈보라가 쳤다.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다들 팔로 눈앞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빠르게 사내들 사이를 파고든 남자가 검집 채로 검을 잡아 올렸다. 단숨에 몇 명을 검등으로 튕겨 낸 그가 빠르게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대여섯이 넘는 도적이 창을 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가운데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춤사위 같은 우아한 몸놀림이었으되, 칼이 닿는 곳마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여 참상이었다.

어떻게든 막아 볼 심산으로 총을 집어 든 사내들이 무작정 총을 쏘아 댔다. 그때마다 눈이 나비 떼처럼 휘몰아치며 남자의 움직임을 숨겼다. 절반은 쓰러지고 남은 절반은 달아나니 어느덧 두목 홀로 남아 있었다.

주변을 돌아본 남자가 양어깨를 추슬렀다.

“내 말했잖는가. 토끼보다 더한 사냥감 잡으러 왔다고.”

“이, 건방진, 새끼.”

남자의 말에 두목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깟 한 놈을 스무 명이 달려들어도 해코지 못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호각을 입에 문 그가 삑삑 사정없이 불어 댔다.

“빨리 가서 죽여! 죽이란 말이다!”

급한 마음에 마구잡이로 불어 댄 호각 소리가 찢어지는 듯했다. 고개를 마구 젓던 나티가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연거푸 이어진 호각 소리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짐승이 두목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그만! 그만둬!”

만류하는 목소리에도 나티가 입을 쩍 벌렸다. 유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목이 찢긴 시신에서 굴러떨어진 머리가 유원의 바로 앞에 멈췄다. 참혹한 모습에 유원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륵, 그륵, 입에서 털을 게워 낸 나티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알이 데굴데굴 좌우로 돌아가며 새로운 먹잇감을 찾기 바빴다. 발름거리는 코끝이 유원 쪽을 향한 때였다.

휙! 입에 손을 대고 휘파람을 불자 어디선가 날아든 수리가 나티를 할퀴었다. 머리를 마구 털며 수리를 쫓아낸 나티를 향해 남자가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요수를 도발하려는 듯했다. 이윽고 나티가 남자를 돌아보고는 크게 포효했다.

말도 안 돼. 유원은 속으로 신음했다. 총을 든 장정 열 명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괴물이었다. 심지어 나티를 직접 데려온 도적 두목조차 살해당했다. 이러다간 저 남자마저 죽을지도 몰랐다.

“도망쳐요!”

손에 힘을 꽉 쥔 유원이 그를 향해 크게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나티가 울부짖으며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검을 쥔 손을 뒤로 크게 젖힌 남자가 힘껏 도약했다. 시퍼런 날 주변으로 안개 같은 하얀 빛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나티를 사뿐하게 지르밟는 것과 동시에 검을 목뒤에 정확하게 내리꽂았다.

쓰러진 나티가 피거품을 쏟으며 경련하더니 마침내 괴물의 움직임이 식었다. 검을 잡아 빼자 남자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후두둑 튀어 올랐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피를 소매로 닦아 낸 남자가 무심히 죽은 두목을 돌아봤다.

“한심한 놈.”

유원은 멍하니 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십수 명을 벌레 짓이기듯 죽일 만큼 무시무시한 요수였다. 그런데 사내 열을 거뜬하게 상대하고도 모자라 요수를 단번에 죽이기까지 했다. 자그만 요수라면 모를까. 곰이나 호랑이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를 가진 요수는 전문적인 사냥꾼들조차 여럿이 함께 사냥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마저도 덫을 놓거나 함정으로 유인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들었다.

눈보라가 그쳤다. 새하얀 달빛이 차가운 밤을 적시듯 내려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삿갓을 집어 든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훤한 달빛에 의지해 유원은 비로소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겨울 산 같은 남자였다.

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인가 싶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 소름 끼쳤다. 만일 그의 입가에서 부서지는 하얀 입김이 아니었다면 정녕 저승사자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귀기 어린 두 눈은 섬뜩할 정도로 새카만데, 목련처럼 희고 아름다운 얼굴은 표정 하나 담기지 않아 오싹했다. 그런데도 차마 시선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자였다.

헌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흐리멍덩한 머릿속을 더듬던 유원이 작게 입을 벌렸다.

주막에서 저를 보던 그 남자다. 틀림없었다. 인상착의도, 눈빛도 같았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왔을까?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빤히 유원을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치도 망설임이 없는 걸음에 유원이 긴장한 얼굴로 몸을 가렸다. 그러나 남자가 관심을 둔 것은 유원이 아닌, 등 뒤에 있는 도백이었다.

검을 쥔 흰 손이 도백에게 향하기 직전, 다급하게 일어난 유원이 온몸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아, 안….”

안 된다는 말 한마디조차 쉬이 나오지 못해 입술만 벙긋거렸다. 눈보라와 한기 때문에 입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자를 독대했을 뿐인데도 위압감에 몸이 달달 떨렸다.

무섭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오금이며 두 팔까지 오들오들 떨렸다.

“…비키거라. 안 그러면 너도 베어 버릴 것이다.”

내려다보는 눈에는 그 어떤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유원은 벌벌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눈 섞인 광풍이 설렁거렸다. 남자가 검을 쥔 손을 뻗었다.

“비키라고 말했다.”

스르륵, 검 끝이 뺨에 닿았다. 차가운 칼날이 얇게 베인 얼굴에서 피가 가늘게 흘러내렸다. 단순한 겁박이 아니라 진정으로 유원을 죽이려는 태도였다. 이 와중에 죽는 것이 무슨 대수던가. 어차피 여기서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죽거나 죽지 못해 살 터였다.

미간을 가늘게 찌푸린 남자가 말했다.

“보아하니, 이 자들과 같은 한 패인 거로구나.”

한패라니. 도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두 눈으로 그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도 저들과 한패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차갑게 식은 입술을 달싹이던 유원이 간신히 대답했다.

“이, 이분은 소인의… 서방 되실 분이셨습니다.”

“서방?”

“비록 이리되었으나 죽은 자를 여기다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례라도 치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시큰하게 붉어진 눈이 남자를 쏘아봤다. 서방이란 말에 남자가 한동안 오묘한 눈길로 유원을 응시했다. 놀랍다는 듯도 싶었고, 혹은 당황스러운 듯도 보였다.

그러나 그런 반응조차 얼마 가지 않았다. 검을 거둔 남자가 발로 유원을 걷어찼다. 밀려난 유원이 허둥대는 사이 남자는 도백의 허릿대에 찬 호부를 뒤적였다. 손에 쥔 호패를 뒤집어 글자를 확인한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하, 그래, 원혜부 태백훈 도백한테 시집가는 귀한 몸이셨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