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말에 최 부인이 곤란한 내색을 비쳤다. 신부가 초야 전에 외간 남자에게 얼굴을 드러내면 평생 팔자가 사나워지니, 설령 신랑도 먼저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마치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니 어찌 반응해야 하는가.
최 씨가 썩 달갑지 않아 하자 도백이 크흠, 헛기침했다. 씩 웃어 보이는 얼굴이 마치 부인을 안심시키려는 듯했다.
“농담이었네. 내가 어찌 그런 걸 모르겠나. 이 먼 길까지 곱게 숨어서 온 새색시를 소중하게 여겨야지.”
그리 말한 도백이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가마꾼들 대다수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술판을 벌이던 중에 대뜸 도백이 직접 주막으로 행차하다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할 상황인지.
상 위에 널린 술병을 확인한 도백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자,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원혜로 가는 게 어떻겠는가? 자네들을 맞으려고 술이고 밥이고 근사하게 준비해 놨네. 기생들도 여럿 불러 줄 터이니.”
“기, 기생이요?”
그 말에 서로 눈치를 살폈다. 도백을 모시는 사내 하나가 도백의 말에 추임새를 넣듯이 말을 얹었다.
“거기 자네들, 원혜의 여인들이 얼마나 아리따운 줄 아는가? 겨울에 핀 해어화처럼 곱고 명석하다지. 게다가 술은 어떻고? 백복주(白福酒)라 들어 봤나? 저어기, 북쪽 저 끝 관모산에서 채취한 깨끗한 눈만을 녹여 빚는데 임금께도 진상하는 진품이야.”
“히야, 임금께서 마실 정도면 무척 귀하고 좋은 것 아닙니까?”
“아무렴! 빼어난 미인에 맛깔나는 술상까지. 다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말씀이야.”
하나하나 늘어놓는 말만으로도 진수성찬이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으니 가마꾼들이 군침을 삼켰다. 해가 저물어 먹물을 끼얹은 듯 어두컴컴해진 산길을 올려다본 최 씨 부인이 곤란한 듯 도백에게 말했다.
“영감. 밤길에 괜한 것이라도 만날까 염려되온데,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마자 움직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어허, 부인. 여기 정정한 사내만 스물이고 그중 무장한 자는 열인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대장의 말에 앉아 있던 가마꾼들이 동조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혼인날에 맞추려면 빨리 걸음을 재촉해야 마땅했다. 최 씨 부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자네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네. 하지만 밤중의 산은 요수의 영역이니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팔도 산 곳곳에 온갖 짐승이 날뛰는 가운데 원경도의 산은 호환보다도 더 무서운 요수가 판을 치는 곳이었다.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나그네를 잡아먹는다는 식인조부터, 바위만 한 늑대, 독 구렁이까지 온갖 끔찍한 괴물들이 도사렸다. 오죽하면 원경도에 갔다 돌아오는 것으로 한 해의 운을 다 썼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요수라면 염려 말게. 내 그 괴팍한 짐승들이 얼씬도 못 할 방도가 있지.”
도백이 소매 안쪽을 뒤적여 종이 뭉치를 꺼내 눈앞에 내밀었다. 싯누런 종이에는 박(縛)이라는 글자가 덕지덕지 쓰여 있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용한 도사가 쓰는 부적인데, 이무기의 피로 쓴 것이라 어지간한 잡것은 피 냄새에 도망치고도 남는다네.”
“이, 이무기의 피요?”
“그렇다니까? 그래도 덤비는 것들이 있다면 총 한 방이면 다들 나가떨어질 일이야.”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관병이 손에 쥔 총을 달칵 흔들어 보였다. 부적에 총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안심할 만한 일이거늘, 최 씨 부인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노련한 엽사와 장수라 하더라도 굳이 위험을 마주할 필요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기민한 아녀자가 노심초사하든 말든 가마꾼들은 이미 도백에게 설득된 뒤였다. 가마에 올라타라 마라 성화를 부려 대니 멀찍이 서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던 유원도 서둘러 채비할 수밖에 없었다.
가마에 오르기 전 유원은 힐끔 감나무를 돌아봤다. 빈자리만 홀연했다. 분명 제 눈으로 본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한 맺힌 귀신이라도 본 것인가. 아직도 눈에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기분이었다.
* * *
둥실둥실 흔들리는 가마는 한결 편안했다. 낮에만 하더라도 가마를 탄 게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듯했는데, 도백이 동행하는 앞에서 허투루 일하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원은 휘장을 살짝 걷어 올리고는 말을 타고 가는 도백(道伯)을 훔쳐봤다. 예비 신랑으로 동행 중인 남자는 줄곧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다소 범상하다고 해야 할까, 풍채는 여느 사내보다 아주 약간은 왜소했다. 이목구비는 둥글둥글하니 검을 쓰는 무인보다는 셈에 능숙한 총무나 상인 같은 인상이었다. 십만 병사가 말과 창을 버리고 달아났느니, 귀신조차 졸개 삼는다던 온갖 수식어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피곤하시오, 부인?”
불쑥 건네는 말에 유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느 틈에 도백이 유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유원이 휘장을 내리려 하자 도백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대로 둬도 괜찮다는 의사 표시였다. 휘장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리던 유원이 입을 열었다.
“그, 가마를 이렇게 오래 탄 적이 처음이기도 하고, 혼자만 앉아 가려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해서….”
“하긴, 멀리서 오셨으니 피곤하셨겠지요. 몇 고개만 넘으면 되니 이해하시오. 부인.”
부인, 이라고 부르는 것에 저도 모르게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꼴사나운 신부를 데려왔다며 면박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막상 저를 걱정해 마중까지 나온 데다 볼품없는 신부를 보고 싫은 내색도 없었다.
휘장을 반쯤 접어 올린 유원은 바람 쐬는 척하며 남자를 훔쳐봤다. 졸지에 부부지연을 맺게 되었지만 어쨌든 신랑이라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백은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급기야 느릿하게 말의 보폭을 맞추더니, 아예 유원에게 눈까지 맞추며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리 고운 부인을 맞게 되어 참으로 기쁘지 뭡니까.”
정녕 그, 야차 같다던 소문이 무성하던 사내가 맞나 싶었다. 말이 와전되었던 걸까. 하지만 유원은 왜인지 모르게 그가 썩 미덥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알고 주막에 불쑥 찾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차림새도 꼭 보여 주려고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부인?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원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전문 중매인인 최 씨도 별말 없는데 제가 괜한 말로 혼사를 그르칠 순 없었다. 원혜까지는 한나절이면 도착한다 했다. 거기까지 무사히 가서,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길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가.
신랑이 다정하니 다행이다, 그렇게 애써 안도했다.
눈 덮인 고갯길을 오르자 눈보라가 서서히 굵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갖옷을 단단히 여몄다. 그때였다. 앞서가던 길잡이가 불시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최 씨가 덩달아 멈춰 서자 길잡이가 앞쪽을 가리켰다. 유원도 자연스레 위쪽을 올려다보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터에 웬 무리가 불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산중이긴 해도 버젓이 사람 다니는 길이니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길이면 서로 길을 묻고 동행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러니 지나가던 상단이나 사냥꾼인가 할 수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최 씨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나가던 행상인이라기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려 수상쩍었다.
“아무래도 이 길 말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왜 그러십니까?”
“저 위에, 수상한 자들이 있네.”
최 씨 부인의 말에 대장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불 앞에 앉은 무리를 살펴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마님, 별일 아닙니다. 여긴 날이 추운 곳이라 불 피울 자리가 마땅하면 야영을 하는 이들이 많거든요. 아마도 저들은 산쟁이나 엽사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복면을 쓰고 있는데….”
“이 강풍에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입이 죄다 돌아갈 겁니다. 보십시오. 따지고 보면 이쪽도 다 목도리로 얼굴을 가렸지 않습니까. 저들이 보기엔 우리도 수상쩍을 것이니 피차일반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 해도 볼끼며 목도리며, 손발에는 토시를 둘둘 휘감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몇 겹을 입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니 저들도 그저 추워서 꽁꽁 감췄을 뿐이겠지만, 최 씨는 좀처럼 불안함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슥한 밤길을 지나려니 긴장한 탓인가 싶었다.
“김 대장 말이 맞네. 보아하니 아마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들이 쉬는 모양일 거야. 그러니 염려 말게.”
“영감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 말을 믿게나. 설령 도적 떼라 치더라도, 어느 도적이 굳이 불까지 피우고 있겠는가? 그야말로 나 잡아가시오, 하고 홍보하는 꼴이 아니겠나.”
도백마저 나서서 괜찮다며 말을 거드니 최 씨로서도 안 된다, 만류하기 무안한 꼴이었다. 하긴 여기 장정만 스물이고, 오랑캐 수백을 토벌한 장수가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앞장선 도백이 산 너머를 눈짓하며 가마꾼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아침까지 쭉 달리면 원혜까지 금방이네. 이 길이 제일 빠르니 서둘러 가세.”
“예!”
이랴! 하며 도백이 먼저 고삐를 재촉하자 가마꾼들도 더는 의심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가 근처를 지나칠 때, 유원 또한 긴장하여 바깥을 은밀히 살폈다. 그러나 도백 말대로 그저 사냥꾼들이 쉬던 중인지 이쪽을 보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다행이구나. 이대로면 별 탈 없이 도착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눈보라에 말도 나귀도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푹, 푹, 밟히는 눈이 어느덧 발목께까지 올라올 기세였다. 요수도, 산적도 아닌 눈이 무섭다며 가마꾼들이 한숨 쉬던 차였다.
“내가, 도착만 하면 아주 푸지게 먹고 놀…!”
순간 가마꾼 하나가 컥,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당황한 가마꾼이 동료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가슴을 꿰뚫은 화살 탓이었다.
“웨, 웬 놈들이냐!”
어수선해진 가운데 관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덩달아 주변을 살피던 가마꾼이 사색이 되어 숲 안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그놈들!”
아까 본 그 사내들이 길게 한 줄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도끼와 낫을 매단 창을 들고 서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당황한 병졸 하나가 들고 있던 총을 그들을 향해 발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