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광 (3)화 (3/60)

3화

태백훈.

본년(本年) 서른인 그는 숙용 태씨의 친혈육으로 어릴 때는 동궁전을 지키는 일개 졸병이었다가 공적을 쌓아 왕의 눈에 들면서 오늘날 장수급에 이르렀다 하였다.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오랑캐를 잡초 뽑듯이 죽이니 그 모습이 야차 같다고도 했고, 인두겁을 쓴 귀신이라고도 불렸다.

왕에게 직접 관을 하사받아 장수가 된 뒤에도 사특한 악첩 숙용과 더불어 성총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니 경도(京都)인 옥양에서 그 기세를 막을 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 대단한 권세며 여동생이며 전부 도성에 남겨 두고는 덜컥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벌써 두 해가 지난 일이었다.

신랑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곤 귀신이니 야차니 하나같이 끔찍하고 삿된 것들을 일컫는 단어뿐이었다.

정말로 그리도 잔인무도할까. 그렇다면 마음에 차지 않는, 아래 달린 신부라 하여 내쫓을까. 답이야 불 본 듯 뻔할 터였다.

제아무리 왕명으로 맺게 된 가약이라지만 대개 멀끔하고 정숙한 여인을 바라지 사내 신부를 기대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남색을 즐기며 공공연하게 사내 정인을 둔 양반들조차 정실을 사내로 맞는 경우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니 가마꾼들이 떠들어 대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아무리 정혼(定婚)이래도 사내 색시를 맞으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게 자명했다.

저라고 신랑 맞을 팔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피차일반이지만.

주막 입구에 나란히 앉은 까마귀 두 마리가 말라비틀어진 땡감을 쪼아 댔다. 길게 한숨을 내쉰 유원은 까마귀를 가만히 구경했다. 북쪽은 까마귀가 참으로 많이 보이는구나. 밤낮이 멀다 하고 까마귀 우는 소리가 유난히 많이 들리는 듯도 싶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차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날아간 반대편에 수리 두 마리가 빙글빙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까마귀를 잡아먹을 듯이 사나운 기세였다. 까마귀에 이제는 수리라니. 깊은 산골이라 그런가, 싶던 그때였다.

문득 묘하게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유원을 관찰하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곳은 감나무 밑이었다.

나무 아래 펼쳐 둔 평상에, 웬 삿갓 쓴 젊은 남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전신을 새카맣게 두른 남자였다. 검은 두루마기는 그렇다 쳐도 팔에 낀 가죽 토시에 장화까지 검은색이었다. 그뿐인가. 남빛 목도리를 복면처럼 두른 탓에 얼굴이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다면 수상쩍은 차림이었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행색이었다. 그런데도 한 번 눈을 두니 쉬이 거두기 어려운 존재감이었다.

남자는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유원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태평한 태도였다. 분명히, 이쪽을 보는 듯했는데. 흥청거리는 가마꾼들 때문에 사방이 부산스럽긴 했지만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까지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워낙 사람들 눈총을 받는 일이 많았던지라 유원은 타인의 눈길에 무던하면서도 민감했다.

조용히 술을 홀짝이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복면 위로 드러난 무심한 눈동자가 먹처럼 짙어 선득했다.

“……!”

당황한 유원이 등딱지 속에 숨는 거북이처럼 장옷을 크게 뒤집어썼다.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가슴이 쿵쾅거리고 윗배가 울렁거렸다.

“아, 아, 기씨, 왜 왜, 그러, 세요? 추, 우세요?”

매어 둔 나귀를 살피고 돌아온 막둥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말없이 고개만 도리도리 저은 유원이 슬그머니 뒤집어쓴 장옷을 올렸다.

평상에 앉아 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놀라 퍼뜩 일어난 유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갔지. 방금 전만 해도 저기 앉아 있었는데. 왼쪽 측간에도, 오른쪽 마구간에도 남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도깨비?

“아기씨?”

“저기, 앉아 있던 사내, 혹시 못 보았어?”

“예? 사내요?”

“분명히, 분명히 나무 밑에 있었는데. 술을 마시면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유원이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중얼거리자 막둥이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 제가, 올 때는 아, 아무도….”

막둥이가 말을 채 맺기도 전이었다. 현관 쪽에서 웅성거리는 기척이 났다. 그 바람에 주막에 앉아 있던 사람들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곧이어 대문 아래에 사내 무리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섰다.

“흠, 흠, 게 있는가!”

우렁찬 호출에 술청에서 술 푸던 중노미가 잽싸게 객을 맞았다. 동달이에 가죽을 꿴 흉갑으로 무장한 모습을 봐서는 단순히 지나가는 나그네 같지 않은 행색이었다.

요기를 하시겠냐, 묵고 가시겠느냐 묻는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주막 안을 빙 둘러보더니 중노미와 뭐라 말을 주고받았다. 중노미가 이쪽을 힐끔거리더니 사내에게 다시 속닥거렸다. 이윽고 사내 무리가 유원에게 다가왔다.

“거기, 옥양의 홍세환 참판 대감 댁에서 오신 게 맞소이까?”

그중 가장 앞장선 사내가 물었다. 눈빛이 게슴츠레하여 어딘가 마뜩잖은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유원을 살핀 사내가 히죽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에 유원이 외면하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에 막둥이가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허, 헌데 무슨 일이신지요?”

“우리는 원혜에서 왔소이다. 신부를 마중 나왔소.”

“예? 시, 신부를… 말입니까?”

막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산중에 마중이라니. 본디 신랑이 신부 태울 가마를 치장해 수모(手母)를 들려 보내는 것이 관례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신랑이 사는 지역까지 간 다음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신랑 쪽에서 마중을 나온다는 말부터가 금시초문이었다. 만일 입성하기 전에 호위하러 온 것이라면 진즉 소식이 있어야 마땅했다.

난감한 얼굴로 쩔쩔매는 막둥이를 상대로 사내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막둥이가 놋방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방문을 훤히 열어젖힌 최 씨가 고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 원혜에서 왔다 했는가?”

“그렇소이다.”

“무슨 신원으로 말인가? 무턱대고 신부를 데려왔다고만 하고 누군지 밝히지도 않으시면 어쩌는가.”

“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혜부 관아 소속 대장 김덕래라고 하네.”

자신을 원혜부 소속 관군이라 밝힌 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당당했다. 확실히 협수며 허리춤에 찬 검이나, 같이 온 자들이 들고 있는 화승총을 보니 무관이 맞기는 하나 어딘가 어색한 품새였다. 이런 외진 산에는 신분을 속이고 나그네의 금품을 노략질하는 자도 많다고 하지 않는가. 의심을 거두지 못한 최 씨 부인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내 그런 말을 전해 들은 기억이 없네. 게다가 여기서 원혜까진 아직 백 리는 족히 가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정녕 원혜에서 온 것이 맞는가?”

“참나, 그래 봤자 하루면 가는 거리요.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이 근방에서 꼬박 두 시진이나 기다렸소.”

“기다렸다 해서 그것이 해명할 근거가 되진 않네.”

“뭐, 뭐요? 지금 그럼 우리를 의심하기라도 한단 말이오?”

뒤에 서 있던 툽툽한 사내가 벌컥 화를 냈다. 한숨을 쉰 최 씨 부인이 재차 말을 이었다.

“옥양에서 오는 신부 가마이네. 먼 길을 지나는 중인데 신중해야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도백께서 직접 써 보낸 서찰이라도 내밀든가 해야 자네들 말을 믿….”

“하하, 그럴 필요 없소.”

다른 목소리가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리 사이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남자는 푸른 철릭에 끈이 화려한 갓을 쓰고 있어 몹시 튀는 외양이었다.

씩씩 화를 내던 사내가 서둘러 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도, 도백 영감.”

그 말에 최 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 근방에서 ‘도백’이라는, 왕께서 직접 하사하신 명예 직품(職品)으로 불릴 수 있는 자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원혜부 도백 태백훈.

창백하게 굳은 최 씨 부인을 바라보던 도백이 사람 좋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

“보름 전에 진즉 보장사를 보냈었네. 원혜까지 오는 길이 험하여 내 직접 신부를 모시러 가겠다 하였거늘, 하필 길이 엇갈린 모양이네. 그런 와중에 무작정 마중 나왔다고만 하니, 의심하실 만도 하지.”

도백이 가마 쪽을 힐긋 쳐다보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내 신부를 얼른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더군. 그래서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정녕… 태백훈 도백 영감이십니까?”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최 씨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도백은 두말 않고 호부 주머니에서 호패를 꺼내 보였다. 은칠한 나무패는 손때라곤 타지 않은 듯 깨끗했다. 그 위에는 호랑이와 동백, 그리고 이름 석 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자, 이러면 믿겠는가?”

도백이 밀어붙이듯이 호패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호패에 새겨진 동물은 문무 신분을, 꽃나무는 왕께 하사받은 오등작을 상징했다. 호랑이는 장수요, 동백은 삼공(三公)에 버금하는 백(伯)이라. 게다가 이런 첩첩산중에 무장한 군병을 하나도 아니고 한 무리로 대동한 귀한 신분이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이 자는 원경도 작은 나라님이라 불린다던 도백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방문 밖으로 튀어나온 최 씨 부인이 황급히 예를 갖췄다.

“여, 영감께 인사 올립니다. 몰라뵙고 무례를 범했으니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참으로 귀한 분을 모시고 오시는 길인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도백은 마루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유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장옷 사이로 상황을 살펴보던 유원이 도백과 눈이 마주치고는 놀란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휙, 휘파람을 분 그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신부께서 아주 고우시군.”

그 말에 최 씨 부인이 앞을 가로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영감, 송구하나 혼례 전에는 신부 얼굴을 함부로 보는 것이 아니옵니다.”

“어차피 이젠 내 사람이잖나. 신방에 들이기 전에 신부 얼굴 좀 본다고 닳기라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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