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눈이 쌓인 곳을 발로 누르자 뽀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몇 번이나 눈이 쌓인 곳으로만 걸어가는 동안 점점 목적지와 가까워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벌써 그곳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
넓은 마당 위로 티 없이 하얀 눈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눈이 쌓인 숲의 풍경도 절경이었지만, 지금 이 그림도 나쁘지 않았다.
언덕 끝에 자리한 낡은 오두막과 그 옆에 붙어 있는 창고, 그리고 양옆으로 세워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장승도 말이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항아리 몇 개가 비워진 것 같다면서 명월은 아무도 걷지 않아 새하얗게 눈이 쌓인 길로 걸어갔다.
뽀득 뽀드득,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오두막 쪽으로 가려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누군가 얼굴을 내민다.
꼽추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다. 검은 개 한 마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곤 명월을 보고는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꼽추는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건가. 그리 생각하며 명월은 일단 오두막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문 입구에 서 있는 검은 개가 보였다.
의젓하게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명월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입구를 막고 서 있는 게 마치 자신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같아 명월은 안쪽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지금 명월이 찾는 이는 덩치가 좋으니 이렇게 보면 바로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는 건 작업실 쪽으로 간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바로 아래쪽에서 냥냥―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내리떴고, 문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상자 속에 깔린 짚과 그곳에 들어가 꾸물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건 하얀 털을 지닌 고양이와 검은 털을 지닌 강아지 새끼였다. 각각 두 마리씩, 딱 봐도 다른 종의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신기했던 명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검둥이, 네 새끼인 거냐?”
여기서 처음 보는 검은 개였지만, 어느새 검둥이라는 이름을 붙여 버렸다.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명월을 올려다보던 검둥이는 새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작은 상자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새끼들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검둥이 품으로 파고든다. 그때 맞춰서 상자 뒤에서 하얀 털복숭이가 나타났다.
육중한 몸을 지닌 그것은, 나비였다.
“돼지 고양이. 너는 여기에 또 어쩐 일이냐?”
묻는 말에 나비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명월을 보더니 상자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곤 새끼 강아지를 혀로 핥는다. 그걸 본 명월은 기겁을 하면서 안으로 손을 뻗었다.
“너 거기 들어가면 안 된다? 상자 부서져―.”
강아지와 새끼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보이는데 거기에 나비까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다급한 명월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나비는 고개를 들곤 냥―하고 크게 한번 울었다. 찬바람 들어오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고 문 닫고 나가, 그리 말하는 것 같은 억양에 명월은 혀를 찼다.
“까칠한 녀석 같으니라고.”
다음에 관아 안에서 보이면 한소리 해 줄 거라면서 명월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새끼 고양이와 강아지가 귀여워서 만지고 싶었지만 그 옆에 붙어 있는 다 큰 녀석 둘이 걸린다. 함부로 건드리면 할퀼 것 같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조합이 요상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잠시 드는 이상한 생각에 명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야.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어.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면서 고개를 저은 명월은 옆 작업실로 향했다.
건물을 돌아간 명월은 일부러 더 안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백호가 가마에 불을 피워 놓고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거다.
그 몰골이 궁상맞은데 가마 속을 응시하는 얼굴은 진지했다. 털로 된 조끼에 옷도 두툼하게 입은 주제에 뭐가 춥다고 저렇게 가마에 딱 달라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타박을 해도 백호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거다. ‘내가 추위를 탄다고? 그렇지 않아.’라면서 정색할 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재생된다.
명월은 백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옆에 서서 내려다보면 그 시선이 느껴질 만도 한데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그저 가마 안쪽을 주시했다.
그곳에 다른 뭔가가 있나 싶었던 명월은 허리를 굽히곤 안쪽을 살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고, 특이점도 없었다.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인지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있던 명월은 포기를 하곤 등에 메고 온 걸 풀어냈다.
두툼한 하얀 천이 벗겨지고 그곳에서 돌돌 말아진 게 드러난다.
“백호.”
부르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든다.
뚱한 얼굴이다. 저건 분명 오늘 새벽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오려 했던 걸 발로 차서 밀어 낸 것 때문에 토라진 거였다.
하지만 오늘은 일이 있어 아침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찾아봐야 할 게 있었다. 미리 말을 해 두었는데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오니 밀쳐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백호는 꼭 아침 일찍 뭔가를 해야 한다 하면 그날 건드리려 한다. 처음에는 모르고 받아 줬더니만, 이젠 그게 못된 버릇으로 굳어진 것 같아 이번엔 좀 단호하게 거절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쌩하니 이리로 올라와 가마 앞에 붙어 있으면 되는 건가 싶었다. 네놈 나이가 몇이냐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명월이 말했다.
“일어나 봐라. 줄 게 있으니까.”
“……뭘 주려는 거냐.”
줄 게 있다고 하니 대답은 한다. 그러곤 명월이 들고 있는 걸 흘깃, 하고 봤다. 뭔가 두툼한 게 손에 들려 있었다. 언뜻 봐서는 이불 같다.
설마하니 이불을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싶었던 백호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있지만 말고 어서 일어나 봐. 네가 똑바로 서야지만 줄 수 있는 거다.”
“…….”
“계속 그러고 있을 거라면 난 그냥 내려갈 거다. 그리고 앞으로 열흘 동안 네 얼굴은 보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알아.”
그 순간 백호는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열흘 동안 명월이 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건 싫었던 모양이었다. 말을 해도 꼭 그런 걸로 쥐고 흔들려 한다면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명월은 모르는 척 또 말했다.
“걸치고 있는 조끼 좀 벗어 봐라.”
그 순간 백호는 당장 팔짱을 끼었다.
“날도 추워 죽겠는데 왜 조끼를 벗으라는 거야?!”
더운 것과 추운 것에 특히 예민한 백호였다. 더군다나 평소 겨울만 되면 애용했던 호랑이 가죽은 다른 놈에게 줘 버린 참이었다.
그러하니만큼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춥고 혹독했다.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명월은 차분하게 재차 요구했다.
“줄 게 있으니까 조끼 좀 벗어봐.”
“춥다니까. 날 얼어 죽게 만들 셈이냐?”
“굳이 조끼를 걸치고 있지 않아도 네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얼어 죽긴 뭐가 얼어 죽는다는 거야. 엄살 좀 부리지 마.”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춥다고―!”
백호는 아예 몸을 반으로 구부렸다. 다른 건 몰라도 조끼는 절대적으로 사수하고 말겠다는 그의 강렬한 의지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명월은 심경이 복잡했다.
……그냥 등짝을 때려서 억지로 조끼를 벗겨 버리고 싶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하겠지. 결국 명월은 돌돌 말고 있던 걸 펼칠 수밖에 없었다.
보란 듯이 백호 눈앞으로 펼친 그것은 두툼한 두루마기였다.
몸을 굽히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백호는 그걸 보곤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물건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백호를 향해 보란 듯이 두루마기를 흔들면서 명월이 말했다.
“―이래도 그 조끼를 입고 있을 거냐?”
백호는 허리를 세우곤 명월이 들고 있는 두루마기를 만져 봤다.
푹신하고 두텁다. 입으면 분명 따뜻할 터였다. 하지만 이건―.
“답답하고 무거워서 겨울용 두루마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안에 다른 걸 집어넣었어. 부드러운 새의 깃털만 골라서 집어넣었으니 다른 것보다 훨씬 더 가볍고 따뜻할 거야.”
거기까지 말한 후 명월은 입을 다물고 백호를 올려다봤다.
내가 할 말은 다 했고, 네 결정만 남은 거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명월은 기다렸다.
백호는 몇 번이나 명월을 보고 그가 들고 있는 두루마기를 확인했다. 그러다 입을 꾸욱 다무나 싶더니 천천히 조끼에 손을 댄다.
꽤 좋은 털로 신경 써서 만든 조끼를 벗어서 가마 옆의 나무 의자에 올려놓자 명월이 바로 백호의 뒤로 넘어가서 두루마기를 입혀 주었다.
뒤로 팔을 뻗은 백호가 순순히 받아서 입자,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추워하면서 가려 입으면 어쩌자는 거야. 일단 입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그때 벗어도 되잖아.”
팔을 다 집어넣은 후 앞을 여미면서 백호가 물었다.
“……이걸 네가 만든 거냐?”
“난 바느질 같은 건 못해. 그저 시키기만 했지.”
다시 앞으로 넘어온 명월은 다른 두루마기와 달리 목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제대로 잘 여며 주었다.
목부터 발목 위까지 기장이 꽤 길었다. 안쪽에 달린 동정으로 옷을 바로 잡아 주고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 주면서 명월은 백호를 올려다봤다.
“겉보기로는 잘 맞는 것 같은데, 어때?”
백호는 양팔을 벌린 채로 본인이 입고 있는 걸 내려다봤다.
다른 것과 달리 몸을 구속하는 느낌도 없고, 잘 맞는 데다가 가벼웠다.
나쁘지 않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해?”
몸 전체를 감싸 주니 입는 순간 추위가 사라졌기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수 있겠어?”
이 정도라면 당연히 입을 수 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백호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마음에 들어?”
명월이 웃고 있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지금 이걸 준비한 게 명월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괜히 아침에 툴툴 대면서 산으로 올라왔다. 자신을 찾아 이걸 들고 오느라 명월이 고생한 걸 생각하니 묘한 죄책감이 든다.
명월은 백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아침에 이것 때문에 나가 봐야 할 일이 있었던 거다. 할 일이 없어서 널 걷어찬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한다면……마음이 풀릴까?”
“―벌써 풀렸다.”
웅얼거리듯 말한 백호는 그대로 명월을 끌어안았다. 이번엔 명월도 순순히 백호에게 안겨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따뜻한 옷을 입고, 명월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까는 불 앞에 앉아 있어도 손끝이 저리고 마음엔 찬바람이 쌩쌩 불어 한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냥 좋다.
겨울이 사라지고 봄이 찾아온 것만 같다.
백호는 명월의 귓가에 코를 댄 채로 속삭였다.
“닭장에 있는 닭 몇 마리 잡아서 맛있게 삶아 줄까?”
“그거 꼽추가 키우는 거 아니었어? 함부로 잡아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 녀석은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니까 괜찮다.”
“그래? 그러면 한 마리만 잡아서 먹고 갈까?”
“거기다 술도 좀 곁들이면 더 좋겠지.”
“술 좀 작작 마셔.”
술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타박하는 명월이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명월을 끌어안은 채로 백호는 나물도 해 주고, 겨울 열매도 구해 주고, 시원하고 달콤한 꿀도 맛 볼 수 있게 해 주마, 라고 속삭였다.
백호에게 안겨 몸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명월은 그렇게 해 주라며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