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28/32)

2장

집안의 사내들이 모두 참여를 하는 제사이니만큼 한 가지를 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은 없었다. 같은 식구들이 모여서 이만한 제사를 치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신중하게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술잔을 받아서 한편에 마련된 그릇에 비우는 걸 반복했다.

모여 있는 자들이 질서정연하게 해야 할 일을 하는 동안 이병현 대감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제사에 제주라 할 수 있는 이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절을 하고 술잔을 받아 그걸 비우는 걸 반복하는 다른 이들을 싸늘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경하다 할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그걸 두고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더더욱 몸에 힘이 들어가서 신중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준비한 제사이니만큼 허점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다들 알아서 눈을 감아 주거나 손을 써서 무마하는 식으로 넘겼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불리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고 일어서던 자들은 멀리서부터 나는 고소한 향에 안색을 굳혔다.

처음에는 착각이겠거니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바람결에서 나는 건 분명히 고기 굽는 냄새였다.

이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르지 않았던 자들의 얼굴색은 하나 같이 칙칙하게 변했다. 일부는 고기 냄새에 불쾌함을 드러냈으나. 그중에서도 몇은 빈속에 맡게 된 고기 냄새에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함성과 웃음소리에 진지하게 이어져야 할 제사 분위기가 한 번씩 흐트러지게 된다. 그래도 용케도 집중해서 진행되고 있으나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사내가 조심스레 이병현 대감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감. 제가 언덕 건너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강하게 불만을 표출할 셈이었다. 지금 이쪽에선 한창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걸 이렇게까지 방해하고 싶은 거냐고 말이다.

대감도 자리에 와 있겠다, 여차하면 그의 이름을 들먹일 셈이었으나 그리하려면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리 말을 하는데도 이병현 대감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저 정면을 응시하기만 하는 모습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눈뜨고 자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는 게 아니라―.

“……대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안 좋은 예감에 재차 대감을 불러본다.

하지만 부름에 대답은 없고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자의 모습만 눈에 담겼다.

“…….”

불길한 예감이 든 사내는 주변을 둘러봤다. 선비들이 앞으로 나와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려는 모습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왜 자신들이 이런 곳에 나와서 제사를 치러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병현 대감이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제사를 치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끝낸 자세에 과연 조상님들이 찾아나 오실까. 엉망으로 했다면서 와서 보곤 호통을 쳐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그런 깨달음과 동시에 사내의 손이 앞으로 움직여 이병현 대감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감.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들리십니까?”

그 순간 이병현 대감의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파들, 하고 크게 떨렸다.

고개가 위로 높이 올라갔다가 푹 숙여질 정도로 격한 반응에 놀란 사내가 바로 손을 떼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대, 대감?”

고개를 푹 숙인 대감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덜거렸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고개가 뒤로 확 넘어갔을 때, 이병현 대감의 입에선 게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다들 멈추시오! 다들 절하는 걸 멈추시오!”

다급한 사내의 외침에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모여 있던 자들 모두 눈이 뒤집힌 채로 게거품을 무는 이병현 대감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절을 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그들은, 의자에 축 늘어진 채로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대감을 보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서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있던 누군가 “저게 대체 뭐야.”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 대답해 주는 자들은 없었다.

그저 넋 나간 사람들마냥 이병현 대감을 쳐다보는데 뒤집힌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입을 다물자 게거품과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살피던 이병현 대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는 대감을 확인한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마음 같아서야 이곳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리할 순 없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릴 정도였지만, 용기를 낸 사내는 천천히 이병현 대감에게로 걸어갔다.

“대, 대감 괜찮으십니까?”

물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사내로선 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일이었다.

이리 웃기가 어찌나 힘든지, 말도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대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으아악! 아아아악! 이, 이 요물, 내게로 오지 마라!”

바닥에서 호되게 넘어져서 아플 만도 한데 이병현 대감은 바로 일어나선 사내 쪽으로 양손을 뻗었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마! 말도 걸지 마라! 날 쳐다보지 마!”

크게 떠진 눈동자 가득 공포가 묻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과 마주하고 있는 듯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이병현 대감은 사내를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곳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다. 긴 머리를 풀어 내린 채인 그녀는 알록달록한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혼례복은 흙과 피 등이 묻어서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병현 대감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물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눈을 가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이리로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일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에도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죽은 자의 모습으로 이병현 대감에게 계속해서 걸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소름에 대감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로 덜덜 떨던 이병현 대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이리로 오지 마라.

간절함을 담아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떠 여자를 노려봤다. 다시 한 번 오지 말라고 호통을 쳐 줄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내 외면하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작은 얼굴을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눈은 가로로 길게 베여 있었다.

살짝 벌어진 살과 갈라진 눈알을 통해서 끊임없이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하얀 얼굴은 순식간에 핏물로 얼룩지고, 그녀가 입고 있던 혼례복도 붉은색으로 변했다. 동시에 여자의 붉은 입술이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자, 네놈이 벌을 받아야 할 순간이다.』

“으―아아아악!”

익숙하면서도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병현 대감은 머리통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엄청난 두려움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는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한쪽에 마련된 검은 탁자였다. 그곳에 올려져 있는 검을 발견하는 순간 눈이 크게 뜨여진다.

다른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이병현 대감은 그리로 달려갔다. 검을 쥐자마자 그걸 뽑아 들곤 여자를 노려봤다.

어느새 그녀는 여기저기 사방에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저것들이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저렇게 몰려와 있는 거였다.

이미 죽은 년이, 살아 있지도 않은 것이―!

대감은 분노를 담아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다 죽여 버리겠다아아아―!!”

인간도 아닌 것들이 자신을 어찌할 순 없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라며 대감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여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똑바로 서선 요사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비웃듯 바라보는 얼굴에 대감은 악을 써댔다.

그리고 그런 이병현 대감의 난동에 모여 있던 자들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으아아악!! 누가 대감을 막아!”

누군가 외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병현 대감은 마치 무언가에 쓰인 듯이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댈 따름이었다. 거기다 어찌나 힘이 세고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빠른지 차마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었다.

고래고래 악을 써 대면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암만 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지만, 다들 겁에 질려 움직이질 못했다.

하지만 대감을 저리 두면 분명 희생자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선비 하나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대감! 이러지 마십시오! 진정하십시오!”

그 순간 대감의 눈동자가 선비에게 꽂혔다. 미친 듯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곤 멍하니 바라보는 걸 확인한 선비의 입가로 온화한 표정이 걸렸다.

“그래. 그겁니다. 그리 검을 휘두르시면 모두가 겁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검을 내리시고―.”

그 순간 대감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상함을 감지한 선비가 아차 싶어서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 이병현 대감의 팔이 위로 높이 올라갔다.

그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고, 선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검을 아래로 내린 채로 이병현 대감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정면을 응시하던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윽고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내 눈앞에 알짱거리면 그리되는 것이야.”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서 있던 선비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뒤로 한걸음 물러선 선비는 기침을 했고, 엄청난 피를 뱉어 냈다. 이윽고 선비의 몸통 앞으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선비가 고꾸라지자 이병현 대감이 다른 쪽에 서 있는 이들을 노려봤다.

“다음에는 네놈들이다!!”

설마하니 이병현 대감이 정말로 사람을 벨 줄은 몰랐던 이들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달려드는 이를 두고도 마냥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그것이 시작이 되어서 모여 있던 모두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이병현 대감은 검을 휘두르면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괴이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백정처럼 날뛰었다.

날뛰는 이병현 대감을 말릴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마치 뭔가에 씐 것처럼 날뛰는 그를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쳤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상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히 바깥으로 나가는 길로 달려가는데 암만 움직여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세워진 장승이 눈을 매섭게 치뜬 채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과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온몸으로 소름이 돋은 그들은 다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붙는 이병현 대감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 안쪽이 터진 것인지 핏물도 배어 나온다. 그의 몸은 누군가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걸리는 이들은 여지없이 날이 잘 든 검에 베어져 나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누군가 쓰러진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제사를 치르던 곳이 왜 갑자기 이리 변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히이이익-.”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 상태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살길을 찾아 흩어졌고, 그건 제사를 도맡아 준비했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왜 이렇게 틀어져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는 걸지도 몰랐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허튼 상상도 해 보지만 별 소용없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여기저기서 터지듯 솟구치는 피뿐이고, 고막을 두드리는 건 끔찍한 비명일 따름이었다.

살려 달라 외치는 곳에서 도망칠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다.

말 위에 앉아서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존재.

사또 명월의 곱상한 얼굴을 떠올린 사내는 다급히 언덕으로 달려갔다. 중간까지 미친 듯이 올라가다가 다리를 헛디뎌서 그대로 굴러 떨어졌지만, 다시 기어 올라갔다.

고작 낮은 언덕 하나일 뿐이었다. 그곳을 넘어가면 반대편으로 갈 수 있고, 살 수 있었다.

사또와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있긴 했지만, 이런 사정을 설명하면 그는 분명 이해해 줄 터였다. 이런 참상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거다.

원래 일이 터지면 그걸 수습하는 것도 고을 사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을 위로 뻗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언덕을 넘어갈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을 담아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 그림자가 위쪽에서 아른거렸다.

누군가 서 있었다. 설마하니 포졸인가. 끔찍한 비명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와 본 것인가.

살려 달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사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서 있는 존재의 모습이 뭔가 좀 이상했던 거다.

그때 구름에 잠시 가려져 있던 달이 환한 제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것은 여인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지닌 미인.

그녀는 호접화였다.

그녀가 왜 이곳에 와 있는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게 중요했다. 사내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날 살려 주시게! 내 손 좀 잡아 주게!!”

다급한 외침에도 호접화는 미동이 없었다. 아래에선 미친 이병현 영감 때문에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뭘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다. 애가 탄 사내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뭘 보고만 있는 게야! 당장 내 손을 잡으래도!!”

기녀라서 머리가 나빠 사람이 하는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참자면서 말을 삼킨 사내는 애써 웃어 보였다.

“지, 지금 내가 힘이 들어서 그러네. 나 좀 끌어 올려 주게. 다리에 힘이 빠져서 올라갈 수가 없군.”

그리 말하면서 사내는 위로 뻗은 손을 내려서 풀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몸이 뒤로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이곳 언덕의 경사가 심하긴 해도 높은 편이 아니라서 낮에 넘어갈 때에는 수월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리도 힘든지 모르겠다.

풀을 잡은 사내의 손으로 힘이 들어가고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팔을 덜덜 떨면서 힘겹게 매달려 있던 사내는 재차 호접화를 올려다봤다. 어서 날 붙잡지 못하겠느냐며 호통을 치려던 순간 검은 무언가가 눈앞으로 내려왔다. 그것은 호접화의 발이었다.

호접화의 발이, 사내의 이마를 밟았다. 처음엔 그걸 인지할 수 없었던 사내는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년이 미친 게 아니냐면서 호통을 치려는 순간에 맞춰서 호접화의 발로 힘이 들어간다.

그리 센 힘도 아니었다. 가볍게 머리를 누르는 걸 버티지 못한 사내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렇게 아래까지 굴러 떨어진 사내는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이병현 대감이 다가왔다.

피가 잔뜩 묻은 검을 질질 끌고 온 이병현 대감은 쓰러져 있는 사내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호접화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다.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본 호접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게 다 네놈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황천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우니 네놈도 똑같아져야 하지 않겠느냐. 네놈의 손으로 그동안 네놈이 일군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거라.』

나풀거리듯 움직이던 입술이 다물리고 호접화는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대감을 응시했다.

한기가 들 정도로 차디찬 시선에 이병현 대감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친 것인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병현 대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사, 살려 주시오. 대감,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대로 죽고 싶진 않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내는 조금 더 이병현 대감에게 접근했다. 그에게 매달려서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대감은 크게 검을 휘둘렀고, 사내의 목에선 피가 튀었다.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한 사내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대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그의 옆으로 호접화가 나타났다.

엉망이 된 이병현 대감과 달리, 그녀는 흠 하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얼굴을 가까이 붙인 그녀는 연인을 대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무얼 하느냐. 아직 많이 남았다.』

이병현 대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접화를 바라봤다.

『조금 더 하거라. 그래야 저승에 계신 내 부모님과 그가 기뻐할 게 아니겠느냐.』

호접화의 붉은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대감은 뒤를 돌아봤다.

계속해서 도망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다.

몇몇은 제사상을 엎어서 그 다리를 부러뜨려 무기로 사용하려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아직도 100명이 넘게 남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던 이병현 대감의 옆에선 호접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더 하거라. 그 목소리가 귀 안쪽에 닿는 순간 이병현 대감은 다시 움직였다.

* * *

돼지 두 마리가 통째로 불 위에 걸렸다.

엄청난 크기였지만, 살이 많은 부분은 잘라서 물에 삶고, 굽는 쪽에도 틈틈이 칼집을 내서 잘 익도록 했다.

애초의 목적이 훈련이었던 만큼 다들 당파를 휘두르거나 활을 쏘거나 하면서 제 기량을 선보였다. 그러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서로 지적을 하면서 고쳐 나가고 있었다.

늘 관아 안에서나 이루어지던 일을 외부에서 하니 기분이 색다른 것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아까부터 맛있게 익어 가는 고기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몇몇은 참지 못하고 그 옆에 서서 고기가 익는 걸 구경했다.

불로 굽는 건 조금 더 시간이 걸려야 했지만, 삶는 건 아니었다.

꽤 많은 양의 삶은 고기가 나왔다. 그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썰어선 김치를 두고 소금도 살짝 뿌렸다. 보는 순간 바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완벽한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리로 손이 가지만, 저것은 그들이 먹을 게 아니었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만큼, 달리 챙겨야 할 존재가 있었다.

이방은 먹음직스럽게 챙긴 고기를 들고 일어섰다. 음식이 다 되었으니 가장 먼저 사또에게 갖다 주는 게 옳았다. 그때 한 포졸이 뒤로 다가왔다.

“이방 나으리.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나으리를 찾으십니다.”

“뭐? 집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가씨가 찾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집을 나설 때 분명히 야외 훈련을 해서 들어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 둔 참이었다. 그런데 왜 찾아왔단 말인가.

어쩌면 밤을 지새운다 하니 걱정이 되어서 필요한 물품을 챙겨온 걸지도 몰랐다.

사또도 있는데 물색없이 자신의 것만 챙겨선 아니 될 말이었다. 일단은 돌려보내야겠다면서 이방은 급히 접시를 포졸에게 건넸다.

“갔다 와 볼 터이니 넌 이걸 사또께 가져다드리거라. 실수 없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때 다른 쪽에 있던 포졸이 이방을 붙잡았다.

“이방 나으리. 이제 저희도 이걸 먹어도 되는 겁니까?”

그리 묻는 포졸은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기가 익어 가는 동안 내내 냄새만 맡았으니 이제 슬슬 한계일 터였다.

이방은 딱하다는 양 혀를 차며 먹어라, 라고 말했고 포졸들은 쾌재를 부르며 불 앞에 몰려들었다.

* * *

쟁반을 들고 걸어가는 포졸의 걸음은 불안했다. 실제로도 주변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곤 뚜껑을 이로 물어서 연 후에 그걸 그릇 위에 마구 뿌렸다.

액체가 따끈한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 위에 그대로 뿌려진다. 김치에다도 몇 번 뿌린 후에 다시 병을 품 안에 넣은 포졸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푹 숙인 포졸은 걸음을 서둘렀고 이윽고 사또가 있는 천막에 도착했다.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월등하게 좋은 것이었다. 그 안쪽에서 은은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걸 확인한 포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월을 불렀다.

“사또.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락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것을 명월에게 줘야만 했던 포졸은 허리를 굽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스레 천막으로 들어선 포졸은 그릇을 양손에 든 채로 말했다.

“돼지고기가 잘 삶아져서 먼저 들고 와 봤습니다. 식기 전에 드시지요.”

말할 때 가능한 목소리가 떨려서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걱정과 달리 자연스럽게 잘 나온 것 같지만 아직은 안심하기에 일렀다.

이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명월이 그걸 먹는 걸 확인하기 전에는 말이다.

차마 명월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그는 내내 눈을 내리뜬 채였고,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뭔가 말을 하면 반응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천막 안은 무척 조용했고, 오히려 바깥소리가 더 잘 들렸다.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건지 뜨겁다면서 난리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상하다 싶어서 인상을 쓴 채로 있으려니 천막 안에서 탁,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다. 작은 나무끼리 부딪치는 이 소리가 대체 무언가 싶었던 포졸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안쪽 자리에서 장기를 두는 사또 명월과 스님을 발견했다.

팔짱을 낀 채로 장기판을 내려다보는 어린 사또의 곱상한 옆얼굴을 살피던 포졸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뭐야. 지금 장기를 두고 있어서 이쪽이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없었던 건가. 조용한 이유가 달리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진다.

포졸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명월의 곁에까지 가선 슬그머니 접시를 내려놓았다.

두툼한 천이 깔린 곳이었다. 그냥 접시를 내려놓아도 괜찮을 거다. 명월은 장기에 푹 빠진 얼굴이었으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게 귀에 들리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잘되었다면서 포졸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대로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었다.

그때 중얼거림이 들렸다.

“고기인가.”

바로 포졸의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 녀석 먹음직스럽게 생겼군.”

백호의 말에 명월은 눈만 위로 움직여 그를 쳐다봤다.

장기를 두던 손으로 고기 한 점을 들어선 그대로 입 안에 넣는 백호의 행동에 명월의 안색이 굳는다.

젓가락은 장식용으로 챙겨 온 게 아니었다. 제대로 도구를 써서 먹으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명월은 접시 위에 올려진 돼지고기를 살폈다.

금방 삶은 것을 들고 온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확실히 맛있게 생겼다. 하지만 승부욕에 불타는 명월은 그걸 봐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의 허벅지 위에 멋대로 올라타 앉는 기행을 일삼은 백호는 명월이 암만 밀어내고 등을 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구석에서 고집이 있는 백호였다. 보통 방법으로는 그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천막 안에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의 위에서 비켜 날까 싶어서 이런저런 말을 던지자 장기에 관한 말도 나왔다.

백호가 장난스럽게 ‘네가 이기면 여기서 나가게 해 주마.’라고 말했고, 그게 시작이 되었다. 결국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장기를 두게 된 것이다.

원래 장기는 못 두는 편인 명월이었다. 거기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라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생각하자 더더욱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간신히 빠져들고 있었는데 포졸이 들어와 그 흐름이 깨졌다.

고기는 먹고 싶지 않지만, 속은 출출하다. 어찌할까 싶었던 명월이 젓가락 쪽으로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서 있는 포졸을 올려다봤다.

“거기에 서서 뭐 하나. 여기까지 고기를 들고 와 준 게 고마워서 그러는데 앉아서 한 점 들지그래?”

백호의 말에 명월은 물론이거니와 포졸의 표정도 이상하게 변했다.

이건 자신 먹으라고 일부러 챙겨온 거였다. 그걸 두고 포졸에게 먹으라 하면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 하려던 참에 백호가 돼지고기 한 점을 들어선 포졸에게 내밀었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말고 한 점 먹어 봐. 막 삶아서 그런지 아주 쫄깃하고 고소해. 감칠맛에 약간 신맛이 나는 걸 보니 달리 양념도 한 모양이로군.”

날이 더워서 음식이 쉰 것이 아리나면 신맛이 날 리가 없었다.

원래 먹는 걸 즐기고, 그중에서도 고기를 특히 좋아하는 백호가 신맛 운운하는 게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 외에 다른 상대에게 고기를 권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 순간 명월은 설마 싶어서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포졸을 올려다봤다.

포졸은 당황해선 고개를 저었다.

“바, 바깥에 고기가 넉넉하게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먹겠습니다.”

“됐고. 지금 내가 이걸 너에게 먹으라고 주는 거잖나.”

포졸의 필사적인 변명을 중간에서 잘라 버린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내가 직접 네놈의 입을 벌리고 그 안에 고기를 처넣어 줘야 먹을 테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응시해 오는 백호의 표정은 살벌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린 포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백호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 입만 벌려라. 내 직접 네놈 입 안에 이걸 밀어 넣어 줄 테니―.”

정말로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해서 고기를 밀어 넣을 백호의 기세에 포졸은 다급히 입을 막았다. 얼굴이 벌겋게 된 포졸은 굵직한 눈물을 질질 흘렸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포졸을 두고 백호는 이를 갈았다.

“이 개놈의 자식이, 감히 저 녀석이 먹는 음식에 장난을 쳐?”

자신이야 쇠를 씹어 먹든 달군 돌을 삼키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명월이 먹는 건 그리되어선 안 되었다.

저 녀석의 목구멍이나 위는 여리디 여렸다. 이런 이상한 게 묻은 걸 먹게 된다면 바로 문제가 생길 거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짜증이 나는데 이런 놈들까지 자신을 건드리고 있다.

그냥 목을 비틀어 버릴까. 그리 생각하며 매섭게 노려보는 순간 포졸이 당장 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빈 병을 꺼내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제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리하게 되었습니다! 귀신도 퇴치하시는 사또에게 이런 짓을 해 봤자 쓸모없다는 걸 알지만, 할 수밖에 없었던 절 이해해 주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포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선 흐느껴 울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하려던 짓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른 이도 아닌 사또에게 이런 수작을 부리려 했다니. 들키는 게 당연했다.

제 주먹으로 머리를 두드리면서 자학을 하는 포졸을 두고 백호는 혀를 찼다. 그는 접시를 들어선 그걸 포졸에게 던져 버렸다.

“네놈이나 다 처먹어라―!”

“히에엑!”

독이 묻은 고기가 몸에 달라붙는 것뿐인데도 포졸은 경기를 일으키면서 뒤로 물러났다.

본인도 먹기 싫은 걸 왜 남에게 먹이려 드는지 모르겠다.

독살이라는 걸 생각하는 인간들이야말로 진짜 또라이라면서 백호는 제 발 앞으로 날아온 고기를 들어서 다시 포졸에게 던졌다.

잔뜩 몸을 웅크린 포졸은 그때마다 숨죽인 소리를 내면서 떨었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이쪽에서 그를 괴롭히는 것만 같다. 피해자인양 구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시킨 건지 알 것 같았던 명월은 한숨을 쉬었다.

“백호. 이제 그만해. 그러다가 기절하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막의 입구가 옆으로 치워지고 이방이 들어왔다.

“사또! 괜찮으십니까?!”

그리 외치며 안으로 들어온 이방은 천막 안의 상황을 보곤 움찔했다.

사방에 흩어진 고기와 김치, 그리고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그릇. 웅크린 채로 떨고 있는 포졸과 그 앞에서 인상을 쓴 백호.

딱 봐도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던 이방은 이를 악물었다.

“이놈이 감히―.”

백호에 비견할 바가 아닌, 어마어마한 분노를 드러내며 이방은 그대로 포졸에게 달려들었다.

중간에 부웅 뜬 이방의 발이 포졸의 어깨에 닿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포졸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이방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바로 일어선 이방이 재차 “이놈!” 하고 외치면서 구석으로 밀려난 포졸에게 달려들었다.

백호를 말릴 생각만 하고 있었던 명월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이 몸을 날려 포졸에게 한 방 먹이는 걸 보곤 놀라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다급히 백호의 팔을 붙잡았다.

“말려!”

“내가 왜?”

이방 저놈이 아주 잘해 주고 있는데, 그걸 왜 말려?

오히려 말리라 하는 게 이상하다는 양 바라보는 백호를 두고 명월은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명월은 혀를 차면서 벌떡 일어나, 포졸을 잡고 있는 이방에게 달려갔다.

* * *

“집안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이상하다 싶었으나 딸이 왔다는 식으로 넌지시 건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원래 애비가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근처에도 얼씬도 하지 않는 아이인데. 제가 그간의 일로 마음이 많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낚여서 사또의 곁에서 떨어지다니요―.”

암만 생각해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 양 이방의 악문 턱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곤 재차 옆에 앉아 있는 포졸을 매섭게 노려본다. 놀란 포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졸은 쌍코피를 흘리는 데다 눈두덩이와 턱과 오른쪽 뺨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명월이 급하게 떨어뜨린다 했는데도 이방의 주먹이 워낙에 빨라서 그걸 미처 다 막을 수 없었던 거다.

저런 놈에게 속아서 명월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뻔했다는 걸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듯 이를 가는 이방과, 그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포졸을 보자니 뭔 말을 못 하겠다.

분명 노려진 건 자신인데, 주변에서 나서서 다 처리를 해 주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신도 나서서 뭐라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실제로 포졸은 잔뜩 기가 죽어서 명월이 한 번 더 말을 꺼내면 당장 목을 맬 기세였다.

독을 먹이려 한 건 괘씸하지만, 가족이 협박을 받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참 발전이 없는 녀석이었다. 툭 하면 가족을 물고 늘어지는 건가. 물론, 그만큼 효과가 있는 협박이 없지만서도―.

무거운 한숨을 쉰 명월은 포졸을 지그시 바라봤다. 보기만 하는 건데도 포졸이 더 깊이 고개를 숙인다. 자라목이 되어선 덜덜 떠는 걸 보고, 명월이 물었다.

“화소군이더냐.”

포졸은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방은 그게 아니었다.

화소군이 명월에게 독을 보내다니. 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월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고, 한참 후에 포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은 세상에, 하고 신음을 흘렸으나 명월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니만큼 그런가―싶었다.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백호가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독이라. 놈도 끝이로군.”

그래도 그간 재주를 부리던 가닥이 있으니 달리 거창한 걸 준비해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람을 시켜 음식에 독이나 타게 하다니.

방법이 너무 유치하고 저열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있는 백호를 두고 이방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왜 화소군이 사또께 독을 보낸단 말입니까.”

이방은 명월과 백호가 화소군에게 한 짓을 모르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좋은 건 아니나, 그래도 독을 보낼 정도는 아닌데―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바라는 얼굴로 응시해 오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옆에 둔 부채를 집어 들었다.

부채를 넓게 펼쳐서 흔들자 시원한 바람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두어 번 부채질을 하던 명월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 화소군은 어디에 있더냐?”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만 하셨습니다.”

“너에게 독약만 건네고 다른 곳으로 갔을 리가 없다.”

단정 짓듯 하는 말에 당황한 포졸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저에겐 분명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갈 거라고. 그러곤 저에겐 꼭 서, 성…….”

포졸은 뒷말을 흐리면서 머뭇거렸다. 사또 앞에서 왜 말을 더듬는 건가 싶었던 이방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포졸을 노려봤다.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고 타박하는 시선을 던지자 포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반드시 사또에게 독약을 먹여야 한다 하셨습니다.”

이젠 모든 걸 다 포기하게 된 것인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웅얼거린다.

말을 들은 이방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말이라고 하는 것인지.

통탄할 노릇이라며 안색을 굳힌 채로 있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세게 포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퍼억,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지만 포졸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습을 봐도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포졸을 살피던 명월은 부채를 접었다. 그 끝을 한 손으로 쥔 채로 느리게 주물렀다.

“화소군이 다른 곳으로 갔다라―.”

중얼거린 명월은 옆을 확인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백호는 뚱한 얼굴이었다. 그걸 유심히 살피던 명월은 느린 한숨을 내쉬면서 부채를 내려놨다.

“됐다. 날 죽이려 한 놈이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는데 네놈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어 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이만 나가 봐라.”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한 짓이 워낙에 극악하니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이방의 생각이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도 이놈은 그걸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명월은 가벼이 말했다.

“이미 이방 자네에게 실컷 두들겨 맞았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걸세. 다음에 화소군이 나타나 무언가를 부탁해도 그걸 거절하는 편이 낫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을 테니 말이야.”

흘려 넘기듯이 하는 말처럼 들려도 정말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뭘 해도 안 되는 놈이 있다. 지금의 화소군이 그렇지. 그러니 더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다음에 걸리면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릴 거다. 호의엔 호의로 답하지만, 아닌 경우에는 나도 화소군 못지않은 악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거다.”

숨죽인 채로 있던 포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월은 나가 보라고 말했고, 그것에 포졸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포졸이 나가고 난 후, 이방은 신경이 쓰이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명월은 이것으로 가볍게 끝낼 생각인 것 같지만, 이방은 그리할 수 없었다. 저런 놈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재차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처음에 제대로 막지 못했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 이방은 명월을 똑바로 바라봤다.

“일단은 관아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리해서 자네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 그리하게.”

명월을 위해서라곤 해도 정말은 그래야 자신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바로 나가서 포졸을 관아로 보내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든다.

화소군. 그자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토록 무모한 일을 꾸민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물어도 괜찮은 걸까.

다시 부채를 펼치고 그걸 흔드는 명월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질문을 던져도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이방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소군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거야. 정말로 반양을 뜬 걸지도 모르지.”

이미 이곳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든 걸 잃었으니 눌어붙어 있어 봤자 자신에게 탈탈 털리는 일만 남았다.

정정당당하게 나서지 못할 정도로 구석에 몰린 상태인 걸까. 그래도 한 방을 먹여 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뭐, 애초에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려 했다면 이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되진 않았겠지만―.

재차 백호를 흘겨본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장기판이 쓸쓸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보면서 다음 수를 헤아려 봤지만, 이길 것 같진 않았다. 장기를 둔답시고 앉아만 있는 건 시간 끄는 짓밖에 되지 않았다.

부채를 접은 명월은 이방을 바라봤다.

“건너편 상황은 어떤가?”

“포졸을 보냈습니다만, 당장 보고가 들어온 건 없습니다.”

“제사를 일찍 시작한 것 같던데,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몰려든 사람이 많으니 그들이 모두 앞으로 나가 절을 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겠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얼굴에 달라붙는 백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 일은 관심 끄라니까. 그런 느낌으로 주시해 온다.

하지만 애초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 이곳에 와 있지도 않았을 거다.

명월은 부채를 접어서 그 끝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러자 바깥 소리가 잘 들린다.

고기를 먹으면서 기분이 좋아진 건지 포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쩌렁쩌렁 울릴 정도도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횡설수설이라 할 수 있는 시조를 제멋대로 만든 음에 맞춰서 불러대니 귀가 괴롭다.

이만한 소리라면 건너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들릴 터였다. 그런데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을 터인데―.

뭔가 좀 낌새가 이상했다.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포졸을 보내서 언덕을 넘어가 보도록 해라. 언덕 위에 일렬로 서서 소변을 보든가. 고성방가를 하든가. 엎드려서 진상 짓을 하든가. 뭐라도 좋으니 소란스럽게 굴라고 해라.”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암만 이병현이 하는 짓이라곤 해도, 건너편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는지 모를 명월이 아니었다.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이방을 두고 명월은 태연히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흥이 깨지기 전에 판을 엎어 버려야겠다.”

흥은 무어며, 판을 엎겠다는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싶었다. 지금 정말로 저들의 제사를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걸까.

얼어붙은 이방과 달리 명월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내뱉은 말에 대해서 철회하는 법이 없었다. 단호하다 할 수 있는 명월의 눈빛을 읽은 이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명월이 시킨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명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눈 딱 감고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거나 고민이 많아지면 더더욱 하기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방은 벌떡 일어났고, 그가 몸을 돌렸다. 그것에 맞춰서 백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말 진짜 안 듣는군.”

“여기가 네 땅일지 몰라도, 일단은 나도 여기 사또거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처리하는 건 나다. 냄새가 나면 맡으러 가는 게 당연한 거야.”

명월은 부채 끝으로 백호의 가슴을 살짝 눌렀다.

“빤히 보이는 수를 앉아서 읽기만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게 없는 법이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이방이 천막에 처진 발을 옆으로 치웠다. 백호는 명월이 찌른 가슴을 긁적이면서 심통 난 얼굴이 되었다.

하여튼 말 안 듣는 녀석. 자신이 이 정도로 안달 낼 정도라면 다른 자들은 오죽하겠는가.

명월은 사람 사귀는 게 힘들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다. 겉모습이 암만 보기 좋아도,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은 배척되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친해지고 싶어서 접근해도 이런 식이니, 금방 질겁하며 멀리하려 들 거다. 백호는 혀를 찼다.

“너―. 친구 없지?”

“…….”

그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농담 던지듯 가볍게 꺼낸 말에 바로 굳어지는 명월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백호는 아뿔싸 싶었다.

바로 입을 다물긴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굳은 명월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은 처음 보는 게 아니지만,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랐다.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을 찌른 것 같은 느낌에 당황한 백호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이 헛나간 거라고 하려는 순간 묘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지금까지 맡아 본 적 없는 그런 알싸한 향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명월은 이방을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발을 옆으로 치운 자세로 굳어 있었다. 왜 저런 우스운 모습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나가려면 나가고 말려면 말아야 할 게 아니던가.

자네 왜 그러고 있나. 그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지금 이방이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가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멈춰 있었고,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옆을 확인하지 않아도 백호가 꼼짝도 못한 채로 앉아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한 손에 부채를 쥔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천막 안에 등불을 건드렸다.

불씨가 가볍게 흔들리고 천막 안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에 한 존재가 명월의 눈앞에 나타났다.

장막이 쳐진 듯 길게 내려앉은 검은 도포를 가장 먼저 확인한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드디어―.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은 가면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사내를 확인하곤 입술을 열었다.

입을 열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겁니까.”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담담했다. 만약 떨리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듯 경직되어 있었다면 조금 싫었을 것 같았는데.

명월은 고개를 든 채로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렸을 적에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존재건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왜 그럴까.

의아함을 가질 새도 없이 사내가 눈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잡고는 그걸 천천히 벗겨 냈다. 눈을 내리뜬 그는 가면을 아래로 내리곤 재차 명월을 내려다봤다.

가면을 벗은 모습은 처음 본다. 그런데 역시나 낯설지가 않았다.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가자.』

어디를 가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곁에서 흡, 하고 막힌 숨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었던 명월은 옆을 확인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채로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백호가 보였다.

앞에 서 있는 존재의 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백호는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힘을 주는 모습이 보기에 안되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힘주지 말라 하려는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정수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란 명월이 고개를 들자 그에게 손을 댄 독각귀가 바로 손을 움켜쥔 채로 그걸 뗀다. 그러곤 언제 만졌냐는 듯 뒤로 손을 물리는 걸 본 명월은 조금 더 시선을 올렸다.

독각귀, 자신의 아비인 존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차가운 느낌이 풍기긴 하지만, 무척 잘생긴 생김새였다. 모르고 봤더라면 호감을 느낄 만큼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생김새를 지니고 있던가.

이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건가.

‘그’는 자신을 인간들 사이에 두고 이자와 함께 있었던 걸까. 이 사내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행복했을까.

백호가 계속해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하면서 자신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내 온다.

‘저 독각귀가 무슨 말을 해도 넘어가지 마. 저놈은 미쳤어. 널 이용해서 자신의 반려를 되살릴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야.’

같은 생각들을 보내 왔다.

앞서 독각귀하고 부딪친 백호에게서 반혼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그런 게 진행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명월은 독각귀의 눈빛을 확인했다.

수면처럼 고요한 그 눈빛 안쪽으로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걸 보고 백호는 그가 미쳤다고 말한 건가. 하지만 저것은―.

“…….”

독각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고만 있을 뿐이었다.

명월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머리도 차갑게 식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독각귀의 손을 잡아 버렸다.

그 순간 백호가 헛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놀란 듯 급박하게 숨을 몰아쉬나 싶던 그의 손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제야 명월은 아차 싶었다.

백호에게 한마디 해 주었어야 했는데. 괜찮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도 백호는 안심하지 않을 터였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못 미덥고 걱정이 되겠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심정으로 조마조마하게 자신을 대하는 거다.

그러나 의외로 사물을 간파하는 눈은 백호보다 자신이 더 정확하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명월은 백호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안 좋았더라면 바로 그 손을 뿌리치면서 싫다는 표현을 했겠지만,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오른손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는 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손을 만져 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그러다가 자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넘겨 준다. 그러곤 재차 손을 마주 잡는다.

포갠 두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도 따뜻하게 해 준다. 그 따스함이 마음에 들어서 가능한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을 담아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명월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아버지.”

‘그’는 명월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진짜 가족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했던 존재. 비록 중간에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존재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헤어지게 되었지만,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늘 마음 한편에선 아버지라는 단어로 정의 내려져 있었다.

나중에 백호에게 그가 자신을 낳아 준 쪽이라는 걸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설령 자신을 낳았다 하더라도 소중한 존재라는 건, 자신의 가족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헤어지고 나서 단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면서도 죽기 전에 볼 순 있겠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보게 되는 모양이다.

명월은 자신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손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로 눈을 감고 이마를 갖다 댔다.

크고 단단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예전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이상한 게 아닐까.

묘한 이질감. 낯선 감각.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던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떠오른 거다. ‘그’는 죽었다는 백호의 말이―.

“…….”

명월은 바로 눈을 떴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댄 채로 숨죽이고 얌전히 있었다.

짧은 순간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 수습하는 게 가능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손을 잡고 있는 존재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호하고 함께 있었는데 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다. 독각귀라고 불리는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고 가자고 말했다.

자신은 그 손을 잡았기에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일 거다.

‘이곳’이라 해도 여기가 어딘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다. 그제야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온다. 어쩌자고 이자의 손을 잡았단 말인가. 백호가 불같이 화를 낼 텐데.

이런 때에도 백호 생각을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때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갔고, 명월은 바로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던 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하얗고 무척이나 준수하게 생긴 사내였다. 이렇게 봐도 아직은 낯설다. 지금은 그저 독각귀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명월은 일단은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평평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보이는 건 온통 풀, 나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있는 꽃이었다.

숲은 전체적으로 안개가 깔려 있어서 먼 곳까지 시야가 확보 되지 않는다. 기이한 곳이다. 명월은 직감적으로 여기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천천히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풀 위로 가볍게 내려선 그가 혼자서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자신을 이곳에 두고 혼자 가 버릴 셈이던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 표정 아래쪽에 깔린 건 따라와라, 라는 의사였다.

“……날 어디로 데리고 갈 셈입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말을 하고 나서야 목 안쪽이 간질간질하면서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러는가 싶어서 목에 손을 대는 동안에도 그는 명월을 주시했다.

분명 어디로 간다는 말 같은 걸 할 생각이 없는 거다. 그렇다고 저렇게 쳐다만 보면 어쩌자는 건지.

보기만 하면 자신이 바로 일어나서 냉큼 뒤를 따를 줄 아는 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 볼까도 싶었으나, 곧 무의미한 일이라 여겨졌다.

애초에 여기서 버틸 셈이라면 저 자를 따르지 말아야만 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백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듯싶었던 명월은 손을 들었다.

귀 안쪽이 간지러워서 좀 만져 볼까 했는데 머리가 허전하다. 그러고 보니 전립을 벗어 두고 그냥 온 모양이었다.

제대로 다 차려입었는데 전립을 두고 오다니. 무언가 한 꺼풀 벗겨진 듯한 느낌인지라 부끄러웠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독각귀의 시선도 부담스럽게 여겨진다.

차라리 쳐다보지 말았으면 싶었던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결국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명월은 독각귀를 내려다봤다.

당신은 날 죽일 셈인가. 반혼을 통해 ‘그’를 살리고 싶은 건가.

지금 당장 묻고 싶은 건 두 가지였지만, 진짜로 묻지는 않았다.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명월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풀 위에 두 다리가 닿았을 때 명월은 움찔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푹신한 바닥에 넘어질 뻔 했던 거다.

하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는 것에 성공한 명월은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했다. 그는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 높은 곳도 아니었는데 뛰어내려다가 넘어질 뻔하다니. 우스운 꼴을 보였다면서 아랫입술을 깨문 명월은 자세를 바로 해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역시나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다. 궁금하면 뒤를 따르는 수밖엔 없었다.

안개가 짙어서 몇 걸음 옮기지 않았는데도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한다.

알 수 없는 곳에서 길을 잃고 싶진 않았던 명월은 바로 그의 뒤를 쫓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보이는 건 없다. 그럼에도 버릇처럼 명월의 눈은 주변을 살피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백호. 화가 단단히 났을 게 분명한 그를 떠올리며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 * *

명월이 사용하는 천막의 한쪽이 찢겨지면서 그곳에서 백호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고개를 세게 터나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을 가늘게 뜨곤 정면을 노려보는 동안 그의 거칠어진 호흡은 점점 안정을 찾아 갔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안심시켜 주진 않았다.

호흡이 편안해지면서 살 것 같은 상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아봤다. 그리고 시간이 정지한 곳에서 멈춘 상태로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 중에서 백호가 찾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인지라 세심하게 살피면서, 공간의 틈을 발견하려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포기를 하게 된 그는 양손을 움켜쥐고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금니를 악문 그에게선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실제로 누군가 건드리면 당장 그자의 목을 비틀고 팔을 뽑아 버렸을 터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독각귀 그놈이 이 정도로 실력이 좋았던 건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애초에 이 문제가 많은 땅은 그놈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보통 독각귀는 아니었다. 몇 번 알짱거릴 때마다 생각보다 손쉽게 쫓아낼 수 있어서 방심하고 있었건만, 그게 실수였다.

뼈가 아릴 정도의 치욕을 느끼면서 백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득, 하고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는 눈을 뜨곤 허공을 노려봤다.

타닥, 하고 무언가가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낮은 언덕이 자리 잡은 방향이었다.

그 너머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에 백호는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곤 그리로 몸을 돌렸다.

* * *

날카로운 검을 세우자 보이는 건 붉은 선혈뿐이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닦아 내도 끝이 없었다.

날을 손으로 잡았다가 놓자, 그곳에 선명한 피가 묻어난다. 그걸 내려다보던 아름다운 여인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미소 한 번으로 나리를 무너뜨릴 만큼의 미모를 지닌 그녀였으나, 그걸 바라보는 백호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안 그래도 자연스럽게 표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지금 보이는 몰골은 백호 그의 눈에도 역겹기 그지없었다.

굳이 둘러볼 필요도 없이 어디를 봐도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개중엔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으나, 제정신인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반은 실성해선 이상한 표정으로 기묘한 웃음을 흘리는 자들을 바라보던 백호는 혀를 찼다.

“―작작 좀 해라.”

중얼거린 백호는 호접화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고,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 앉은 이병현 대감이 있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사람을 베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

옷고름은 죄다 풀어지고 상투도 풀려서 머리가 한쪽으로 흘러내린 채였다.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늘어난 두 팔이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져 있었다.

저래서야 제정신이 돌아와도 온전치 못한 삶을 살 거다.

물론, 호접화는 그런 삶도 허락하지 않겠지만.

“할 만큼 한 거냐?”

“그래 보이십니까?”

“그만 좀 해라. 냄새 나서 죽겠으니까.”

내뱉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호접화는 백호를 올려다봤고, 그 시선에 바로 그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혔다.

“독각귀가 나타나서 명월을 데리고 갔다.”

그제야 호접화는 백호의 기분이 바닥을 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 일은 온전히 자신에게 맡긴 것이었는데도 지금 그가 나타난 건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터였다. 그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면서 호접화는 혀를 찼다.

“당신답지 않은 실수를 하셨군요.”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내 방심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당신이 방심을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고, 그 독각귀도 오늘을 노린 거지요.”

호접화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 가운데에 환한 달이 가득 차 올라 있었다.

만월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몸짓이 컸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보이는 달을 확인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땅에 피가 흩뿌려지는 시기. 흐름이 어긋난 걸 이용해서 나타난 거겠지요. 이 시기엔 당신의 힘이 약해지니 그걸 노렸겠군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하나만 내놔라.”

“독각귀의 뒤를 쫓아가실 겁니까? 당신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힘이 약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약해진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간신히 차분함을 가장해서 침착하게 말하고 있지만, 백호의 눈빛이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라고 하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마음을 빼앗긴 존재가 위험한 이의 아가리 속에 들어간 상태였으니.

지금 백호가 느낄 초조함과 불안이 얼마나 클지를 알기에 호접화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피에 젖은 검을 살피다가 그걸 아래로 내려 이병현 대감의 목에 댔다. 가볍게 힘을 주자 날카로운 검이 대감의 목을 살짝 벤다. 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걸 느끼며 호접화는 중얼거렸다.

“짐승만도 못한 네놈에게서도 피가 흐르긴 하는구나.”

빈정거리듯 말한 호접화는 검을 떼어내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자를 데리고 가십시오.”

호접화의 말에 백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을 내게 넘기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제 손으로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랍니다. 불안한 시간의 틈 사이에 끼어서 헤매다가 끔찍한 괴물에게 산 채로 먹히는 고통을 느끼게 해 줘야겠습니다. 그래야지 환생도 못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나름 고통스러운 결말이 되겠지만, 그래도 원한이 깊은 만큼 직접 손을 쓰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다.

어정쩡하게 원한을 풀었다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호접화는 꽤나 몸짓이 거대해져서 백호가 바로 처리하기에도 성가긴 존재가 되었던 거다. 인상을 쓰던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명월을 되찾아야만 했다.

백호는 이병현 대감의 옆으로 가선 그의 흐트러진 상투를 잡아서 위로 주욱 당겼다.

“일어나라 이놈아.”

거친 백호의 행동에 초점이 맞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있던 이병현 대감의 몸이 움찔거린다.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덜덜 떨긴 하지만, 백호가 허벅지를 걷어차자 바로 일어섰다.

뼈가 없는 듯 축 늘어뜨려진 두 팔을 확인한 백호는 혀를 차면서 옆을 확인했다.

호접화는 여전히 피 묻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본인은 말끔한 모습으로 끔찍한 흉기를 들고 서 있으니 더 무섭다.

역시나, 여자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다.

“뒤처리는 네가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부 처리합니다. 고작 이런 일로 어여쁘신 사또를 곤란하게 할 순 없지요.”

정말로 곤란해지게 하고 싶지 않거든 이곳에 있는 시신을 전부 수습해야만 했다.

이만한 사람이 죽으면 분명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터였다. 그것을 포함한 모든 걸 호접화가 손을 써야만 했다.

원래 사고를 치는 것보다, 그걸 수습하는 게 훨씬 복잡하고 힘든 법이었다. 결국 그건 호접화 그녀의 일이니 자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백호는 비틀거리면서 똑바로 서지 못하는 이병현 대감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곤 앞으로 세웠다. 그러곤 그의 목에 손톱을 대곤 세게 그어 버렸다.

그러자 헛숨을 삼킨 대감의 목을 타고 더욱 더 많은 피가 흘러내린다.

이건 보통 피가 아니었다.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의 피였고, 이런 것에 꼬이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그놈들이 나타나는 시기를 잘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 틈을 벌려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독각귀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백호는 진지했다. 경직된 눈동자에 서린 불안과 초조함을 읽은 호접화가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독각귀라고 해도 결국엔 부모가 아닙니까. 제 자식을 해하려는 부모는 생각처럼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백호가 인상 쓴 채로 호접화를 노려봤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다. 그놈은 눈빛이 이상했어. 미쳐 있었다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태연한 반박에 백호는 주춤거렸다. 그가 입을 다문 틈을 타 호접화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각귀와 인간의 혼혈에게 푹 빠져서 이리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분이 사또가 아니었다면, 전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이상향이 있듯이, 당신은 제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

“제가 도달할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당신이 점점 한심하게 변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상대가 사또신걸요.”

눈을 내리뜬 호접화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런 저마저 좋아하게 된 분인걸요.”

나직한 속삭임이 바람결에 흩어진다. 그 속에 섞인 진심을 읽어 낸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다른 의미로 경직된 얼굴이 된 그를 두고 호접화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떠오른 구질구질한 감정의 잔해를 몽땅 지워 버린 그녀는 한결 차분해졌다.

“만나게 되면 다리 위에서 제 물건을 주워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 주십시오.”

“싫다. 그건 네가 직접 전해라.”

딱 자르는 거절에 호접화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옆을 확인하면서 틈이 언제 벌어지는지를 확인했다.

“갑자기 훅 사라지지 마라. 그 녀석은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꽁해 있을 테니까. 마무리는, 네가 확실하게 해라. 괜한 일에 날 성가시게 만들지 마.”

뚱한 목소리 안쪽에 서린 본심을 왜 모르겠는가.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호접화의 붉은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서쪽의 백귀. 당신, 정말로 많이 변하셨군요.”

그 순간 재차 백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무슨 알아먹지 못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접화는 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 순간 백호는 다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몰려든다.

그곳으로 검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 걸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이병현 대감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비틀거린 대감의 몸을 검은 기운이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달려가 벌려진 곳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진입이 당황스러웠던지 잠시 저항이 있었지만, 그들은 금방 사라졌다.

백호가 무사히 넘어간 걸 확인한 호접화는 고개를 돌렸다.

백호가 저쪽으로 갔으니 명월은 걱정할 게 못 되었다.

남은 건 이쪽 일을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하는 호접화의 눈으로 공터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이들이라면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똑바로 보지도 못했을 광경을, 그녀는 담담히 마주했다.

숨이 끊어진 자들도 보이고, 아직은 살아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보고도 호접화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곳을 눈에 담던 호접화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난 정말로 귀신이 되었구나.”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벌이지 못한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였다.

저들에겐 이 모든 일들이 갑작스러운 불벼락 정도로 여겨지겠지만, 그걸 두고 억울하다 해선 안 되는 법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문제를 일으킨 뿌리가 있기 마련이고, 저들이 이렇게 된 건 그 뿌리 때문이었다.

저들의 안위를 위해서 계략을 꾸며서 멀쩡한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그도 모자라서 그들을 죽였다.

소녀는 부모를 잃고, 사랑하던 이도 잃었다.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잃은 그녀를 처참하게 살해한 것 또한 이들이었다.

물론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때문에 이리 당한 게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일은 업보로 이어져 있었다.

그 업보가 지나치게 크면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이들도 처리 되어야만 했다.

자신의 복수를 이루었으니, 어여쁜 사또를 위해서 이 땅을 더럽히는 쓰레기들도 챙겨서 들고 가야지.

물론 이들과 자신의 도착점이 같다고 할 순 없었다. 이런 이들이라도 갈 곳이 정해져 있는데 반해 자신은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간다 해도 저지른 일이 있으니 어느 곳에도 쉽사리 정착할 수 없을지도―.

암담한 일이었지만, 호접화는 웃고 있었다.

우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느릿하게 쓰러져 있는 시신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 * *

앞으로 고꾸라진 이병현 대감은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쪼그리고 앉은 채로 몸을 덜덜 떨면서 축 늘어진 제 팔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한다.

호접화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넘어오자 그게 끊어진 모양이었다.

슬슬 제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지만,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백호는 이병현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그 순간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이병현이 뒤를 돌아봤다. 핏발 선 눈동자 안쪽으로 짙은 절망이 감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인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백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모든 게 인과응보다. 네놈이 한 짓이니, 그에 대한 벌을 받은 거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은 억울해해선 안 되는 거였다.

눈을 가늘게 뜨는 백호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차가운 그 얼굴과 마주한 이병현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면서 이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백호는 재차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네놈은 먹이나 되어 버려―.”

육체가 갈가리 찢겨지듯이 영혼도 조각조각이 날 거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놈들은 그 혼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하나까지 제 입 안으로 탐욕스럽게 밀어 넣을 터였다.

죽이긴 죽이되 자신이 있는 곳에선 뼈도 묻게 할 수 없다는 호접화의 깊은 분노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나 여자는 두려운 존재라면서 백호는 이병현을 지나쳐 갔다.

그걸 본 이병현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힘겹게 백호를 불러 세우려 하지만, 그가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앞까지 걸어간 백호는 주변을 살폈다. 이미 그의 귀에는 이병현이 내는 신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그는 진지했다.

이곳 어딘가에 명월이 있을 거다. 독각귀 그놈이 암만 재주가 좋다 하더라도 당장 그의 땅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하려는 짓이 있는 만큼 다른 독각귀들 하고 마주쳐서도 안 되었다. 그러니 이런 중간 땅에 잠깐 들어왔을 거다.

어쩌면 여기서 그놈이 원하는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월을 사용해서 반혼을 하려는 거다.

독각귀의 눈빛이나 하는 행동이 이상하다는 쪽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백호였다.

그놈이 명월을 살려 두진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는 만큼, 어떻게든 그놈을 잡아야만 했다.

명월 이 녀석. 내 그리 누누이 말했는데도 독각귀를 따라가?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에는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짓은 못 하게 해 버릴 거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움직일 수 없도록 딱 묶어 두고 말 거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가 단단히 난 얼굴이었지만,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특수한 땅이기 때문에 바로 명월의 냄새를 확인할 수 없었다.

넓기도 더럽게 넓은 곳이니 이리저리 제멋대로 다니다간 점점 더 명월과 만나기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꼭 명월을 되찾고 말 거라며 백호는 감이 이끄는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곧 보이지 않는 속도로 숲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 * *

백호가 덥다면서 상의에서 팔을 빼내고 그걸 허리에 대충 감을 때마다, 그 이상한 모습에 인상을 쓰면서 ‘뭘 하는 거냐.’라면서 타박하던 명월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걷기만 하는 동안 몸은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잘 갖춰 입은 구군복은 보기에 좋았으나 행동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축축 늘어지는 게 왜인지 점점 더 활동하기 힘든 것 같았던 명월도 결국에는 가장 위에 입는 군복에서 팔을 빼 버렸다.

마음 같아선 한 꺼풀 벗고 싶었으나, 알 수 없는 곳에 자신을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상한 게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곤 묘한 짓을 할 수도 있음이었다.

벗어서 뒤로 대충 넘긴 군복이 축 처져 있는 게 느껴졌다.

분명 이상한 모습일 거다. 다시 제대로 갖춰 입을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다.

명월은 앞장서 걷기만 하는 자를 바라봤다. 단 한 번도 멈추거나 뒤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잘 따라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처음에는 전립이 없어서 제대로 다 갖춘 모습이 아닌지라 꼴사납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립까지 쓰고 있었다면 정말로 몸이 무거웠을 터였다.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부지런히 걸어가는 명월은 정강이 안쪽이 당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보통 사람들보단 체력이 강한 편이었는데 슬슬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힘들다 여길 정도라면 보통 이들은 저자의 뒤를 쫓지도 못할 거다.

지금 허풍을 떨어대는 건 아니고, 정말로 반나절은 걸은 것 같았다.

원래 뚜렷한 목적지가 있어 그리로 향하는 거라면 이만큼 힘들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상대가 앞장을 서니 그 뒤를 따르는 실정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해를 가할 셈이라면 이렇게나 고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일부러 몸을 움직이게 해서 힘을 빼둘 셈이던가.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는 강해 보이는데.

명월은 다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덥고, 힘들고, 목이 탄다.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건 참 대단한 거라면서 명월은 재차 이마를 닦아 냈다.

잠시 쉬었다가 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은, 해선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갑자기 발목을 붙잡았다. 콱, 하고 강한 힘으로 붙잡는 손길에 놀란 명월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풀 사이에 튀어나온 푸르스름하고 가느다란 팔을 보곤 안색을 굳혔다.

이건 또 뭐야. 여기에도 귀물이 있었던 건가.

그런 땅으로 온 것 같으니 귀물이 나타나는 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안색을 굳힌 명월은 혀를 차면서 잡힌 다리를 앞으로 세게 당겼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목이 끊어져 나갈 만큼 강한 힘으로 옥죄어 오는 것에 당황한 명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크윽―.”

짤막한 신음을 흘림과 동시에 옆구리에 채워 둔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로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베어 버릴 셈이었다.

그때 풀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그곳에 웅크려 모습을 감추고 있던 놈이 나타났다.

비쩍 마른 몸에 얼굴이 두 개가 달린 흉물스러운 모습을 한 귀물이었다.

길게 찢어진 입을 크게 벌리고, 앞으로 튀어나온 눈알을 굴리면서 명월을 올려다본 놈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명월은 허리를 굽혔다.

비위가 상하는 놈들의 외관과는 상관없이, 서둘러 놈들을 떨어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인 거였다. 하지만 명월의 단검이 놈들에게 닿기 직전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독각귀는 엎드려 있는 놈의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으나 다음 순간 독각귀를 노려보면서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징그러운 모습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독각귀는 오른손을 들었고, 거기서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그걸로 놈의 팔을 베어버렸다.

가볍게 손을 움직인 것뿐인데도 팔이 잘려 나간 놈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마치 거미처럼, 바닥에 딱 붙어선 재빠르게 뒤로 빠지면서도 끝까지 이상한 얼굴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모습이 끔찍했다.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인상을 쓴 명월은 아직도 제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떨구어 냈다.

잠시 잡힌 것뿐인데도 발목이 얼얼하니 아팠다. 혹시 놈들의 손에 독 같은 게 묻어 있었던 걸까.

안색을 굳힌 채로 제 발을 내려다보던 명월은 다시 움직이는 독각귀를 보곤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저기―.”

그 순간 내내 뒤도 안 돌아보던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보자, 명월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부른 건가 싶었지만, 이때 제대로 말을 꺼내지 않으면 다시금 쉬지도 않고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용감해졌다. 더 이상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던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픕니다. 음식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잠깐 쉬었다 갈 수 없는 겁니까.”

그쪽은 독각귀니 하루 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겠지만, 이쪽은 그게 아니었다.

이만큼 움직이면 중간에 쉬기도 해야 한다면서 입을 다문 채로 진지하게 그를 바라봤다.

만약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간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정강이 안쪽이 욱신거렸다.

……역시 조금은 쉬어야 하는 걸지도.

그리 생각하는 명월의 표정은 점점 무겁게 변했다.

* * *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자란 나무가 하늘을 전부 다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나뭇가지와 그곳을 채우는 나뭇잎.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늘은 명월이 아는 푸른빛이 아니었다.

칙칙한 보라색 느낌이 나는 것 같다면서 멍하니 그쪽을 보다가 앞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걸 감지하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동그란 무언가를 들고 서 있는 독각귀가 보였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건 주먹만 한 나무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무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명월은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서 있었다.

말은 없어도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걸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설이던 명월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그걸 받아 들자 독각귀가 바로 몸을 돌린다. 그러곤 약간 떨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는다.

“…….”

그런 독각귀를 확인 후 명월은 제 손에 들린 걸 확인했다.

무언가 싶었더니 동그란 나무의 속을 파낸 것으로, 그 안쪽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물일까. 알 수 없는 걸 마셔도 괜찮은 걸까.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갈증은 계속해서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명월은 결국 액체에 입술을 댔다.

처음에는 경계를 한답시고 아주 약간만 입술을 댔지만, 달콤하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한 번에 주욱 들이마셨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로 갈증이 풀린다. 입 안으로 은은히 감도는 달콤한 맛에 명월은 입맛을 다셨다.

신기한 맛이다. 이건 대체 무언가 싶었던 명월은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들었다.

독각귀는 여전히 다른 쪽을 보고 있었고, 이걸 한 번 더 마시고 싶다면 자신이 그 옆으로 다가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아직은 말을 거는 게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명월은 이렇게 해 봤자 시간을 낭비하는 것밖에 되지 않겠다 싶어서 그냥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 멈추어 섰다.

“이건 어디서 떠 오신 겁니까?”

만약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셈이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독각귀가 조용히 팔을 들어선 앞쪽을 가리켰다.

의외다. 알려 주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독각귀의 손가락이 향하는 쪽을 확인했다.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이었다.

전에 풀 사이에서 이상한 게 튀어나와 발목을 붙잡은 기억이 생생했기에 선뜻 저리로 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다시 그에게 떠 와 달라 할 수도 없었다.

명월은 손에 들린 나무로 만들어진 잔을 꼬옥 쥔 채로 그리로 걸어갔다.

거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풀을 치워 내고 안쪽으로 갔을 때, 얇게 고인 물웅덩이 하나를 발견했다.

투명한 수면 위로 비치는 제 얼굴을 확인한 명월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나무를 기울여서 액체를 뜬 후에 그걸 맛 봤다. 조금 전에 마신 것과 똑같다.

눈을 깜박인 명월은 다시 액체를 담아서 그걸 마셨다. 그렇게 다섯 번 정도를 반복하자 어느 정도 배가 차면서 살 것 같았다.

쪼그리고 앉은 채로 긴 한숨을 내쉰 명월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천천히 돌렸다.

피곤하다. 절로 드는 생각에 다시 눈을 떠선 허공을 응시했다.

조금 전에 본 것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다. 그걸 눈에 담는 동안 명월의 눈동자는 한결 맑아졌다.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명월은 액체를 한 번 더 떠선 그걸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독각귀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 멈추어 선 명월은 들고 온 걸 내밀었다.

“시원하고 답니다.”

마시라고 하지 않아도 이리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명월이 내미는 걸 확인하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앉아 있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가 일어서자 움찔하게 된다.

똑바로 선 그는 명월을 응시해 왔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에 반해 명월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짧은 순간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독각귀를 상대로 무슨 걱정을 한 거냐면서 안색을 굳히는 명월을 두고 그가 바로 몸을 돌린다. 그러곤 앞장 서 가 버리는 것에 명월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뭐야? 다시 가는 건가? 하지만 난 아직 다 쉰 게 아닌데? 그저 이 달콤한 걸 마시기만 했을 뿐이야.

조금 더 앉았다가 가야 할 거 아니냐고 생각을 해도 그게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버버거리는 동안 그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명월은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나 정말 미치겠군.”

다시 걷게 된 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장소로 말이다.

인상 쓴 채로 서 있던 명월은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 모르진 않았다.

힘들어도 참고 계속 뒤를 따라올 땐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이 없지만, 따르지 않으면 저렇게 멀찍이 서서 이쪽을 주시해 온다. 왜 안 따라오느냐는 의미였다.

자신이 저 독각귀의 피를 이어받긴 했어도 일단은 절반은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작작 좀 하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만이 고개를 든다.

표정이 굳어진 명월은 양손을 움켜쥔 채로 빠르게 독각귀에게 걸어갔다.

명월이 움직이자 그가 따라온다고 생각한 것인지 독각귀가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혼자서 가 버리려 하는 것에 명월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한달음에 독각귀 옆에 선 명월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지금 어디를 갈 셈입니까?”

그때 그가 멈추어 서선 눈을 내리뜨곤 제 팔을 붙잡는 명월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싸늘하니 차가운 게 느껴졌지만, 여기서 손을 뗄 순 없었다.

지금 대체 어디로 갈 것인지, 자신을 어떻게 할 셈인지 알고 싶었다.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몸이 힘들면 기분도 안 좋아지기 마련이다.

좋게 말하자 싶으면서도 목소리에 날이 서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일 거다.

실제로도 굳은 얼굴인 명월은 그를 노려봤다. 그가 이번에도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리고 저 혼자 가 버린다면 그걸 두고만 볼 셈이었다.

네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니, 나도 굳이 뒤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말이라도 해 볼 셈이었다.

그랬는데―.

『그가 널 기다린다.』

“…….”

독각귀를 바라보는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의혹이 서렸다가 사라진다.

‘그’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독각귀가 ‘그’라고 칭할 만한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호가 말하길 ‘그’는 분명히―.

명월은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동안 독각귀가 다시 움직였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명월의 손이 떨어진다.

독각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명월이 뒤따라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앞장서 걸어갔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명월은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왜인지 모를 조급함에 걸음이 빨라진다. 여전히 정강이나 다리 안쪽이 당기면서 아픔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미적거리는 게 없었다.

독각귀 뒤에 거의 붙어서 그를 따르는 명월의 안색은 약간 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백호는 독각귀 등에 업혀 있는 ‘그’가 죽었다 말했다. 백호가 사람이 죽은 것과 산 것을 구분하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각귀는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말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렇다는 건, 역시 살아 있다는 건가―.

그때 타닥, 하고 불똥이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명월은 바로 고개를 들어선 앞에서 불타고 있는 장작을 확인했다.

안개가 끼어 있는 숲은 늘 그 상태일 것만 같았지만, 갑자기 어둠이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점점 어두워지는 주변에 명월은 당황했지만, 독각귀는 아니었다.

그는 안쪽으로 가나 싶더니 동굴 속으로 들어가선 금세 장작을 모아 왔다. 그러곤 잘 쌓여 있는 장작 위에 손을 올렸고 바로 불이 붙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이 붙는 건 역시나 신기했다. 전에 백호도 그런 식으로 불을 붙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명월은 불씨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자 심하게 혹사당한 다리가 통증을 호소한다. 주물러 줘야 다음 날 괜찮아질 것 같은데 만사가 다 귀찮았다.

이 전에는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그’와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그런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그’는 죽어 있고, 그 앞에 가자마자 독각귀가 바로 반혼이라는 걸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 더 자세한 상황에 대해 물어야겠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도 입을 앙다문 명월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발치에 떨어졌다.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제 오른편에 놓인 붉은 과일을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독각귀가 동굴 입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를 보고 나서 재차 과일을 본 명월은 그리로 손을 뻗었다.

중간에 달콤한 맛이 나던 액체를 잔뜩 마셔서인지 배가 고프진 않았다. 하지만 막상 먹을 걸 보자니 속이 허해지는 것 같다.

먹을 수 있는 거겠지. 먹을 수 있으니까 그가 들고 온 것일 터였다.

명월은 과일을 한 손에 쥔 채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이리 말을 한다 해서 그가 반응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대꾸도 없고, 미동도 없었다. 마치 벽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한숨을 쉰 명월은 붉은 과일을 옷에 대충 닦고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바로 입 안으로 퍼지는 신맛에 입을 다물곤 인상을 썼다.

“…….”

이 맛은 대체 뭐지?

낮에 마신 물이 달콤했기 때문에 이것도 그와 비슷한 맛일 거라 생각했다.

거기다 일반적으로 붉은 과일은 잘 익은 것이니 맛도 좋은 편이 아니던가. 그런데 예상을 뒤집는 이 엄청난 신맛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입을 벌려서 입 안에 있는 걸 다시 뱉어야 할지, 그냥 참고 삼켜야 할지를 모르겠다.

무서울 정도로 경직된 표정을 지은 명월은 독각귀를 봤다. 태연한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오기가 치민다.

이제 와 새삼스레 독이 든 걸 던져 주진 않았을 거다. 이건 분명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영양분이 있는 음식일 터이고, 다 먹어서 몸에 나쁠 일은 없었다.

입 안에 있던 걸 간신히 씹어서 삼킨 명월이지만, 두 번 입을 댈 수 없었다.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고, 처음 접했던 신맛이 너무도 강렬했다.

정말 너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먹고 싶지 않은 과일이었다. 슬그머니 내려 둔 명월은 모닥불을 내려다봤다.

조용한 곳에서 들리는 건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는 소리와 자신의 호흡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에 독각귀 그가 앉아 있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정도가 되니 백호 그가 눈치챌 새도 없이 접근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때 백호는 몸이 움직이지 않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쯤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당장 입에서 불을 토해 내며 “유명월 그 녀석! 내 말을 듣지 않았어!”라며 성을 낼 게 분명했다.

자신도 백호의 말을 들어서 나쁠 일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어야 해를 당하는 일이 없을 거다.

하지만 그때 명월은 독각귀 그의 눈동자를 봤다.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백호는 그걸 보고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찬 기운이 느껴졌다. 동굴 바깥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린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명월은 고개를 들었고, 동시에 독각귀가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갈 셈이던가.

안색을 굳힌 명월이 뒤따라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그 말을 남기고 동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과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온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귀물 같은 게 온 게 아닐까.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발목을 붙잡은 놈도 그렇고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접근한 것일 터였다.

백호도 자신을 두고 냄새가 난다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는 좋은 냄새라고 하긴 했지만, 자신의 몸에서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향이 나는 건 사실일 거다.

손을 들어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아 보던 명월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나 지금 모습이 묘하게 한심하게 여겨졌다.

동굴 속에 얌전히 앉아 지금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싶었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독각귀가 다시 돌아왔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서 있는 명월을 보는 순간 눈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있으라 분명히 말했건만, 어딜 갈 셈이냐고 묻는 눈빛에 명월은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고, 당신이 걱정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명월은 입을 다물곤 재차 모닥불 옆에 앉았다. 명월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독각귀는 재차 입구 쪽에 앉았다. 그걸 본 순간 명월은 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동굴 입구 같은 곳에 앉는 건가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언제 갑자기 이상한 것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그걸 쫓아내기 위해서 입구에 있는 거다. 즉, 지금 자신은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인 거다.

“…….”

정말은 그런 게 아니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움직일 수가 없게 된 명월은 무릎을 세우고 그걸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 같다.

원래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고 조용한 걸 좋아했다. 하지만 이 침묵은 정말로 불편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게 밤이 되어 잠을 청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순히 잠깐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까 가만히 있으라는 걸로 이쪽에 말을 건넨 독각귀였으니, 앞으로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을까. 물으면 대답해 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역시나 쉽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모닥불만 바라보던 명월은, 조심스레 독각귀를 살피게 되었다. 자신이 몰래 훔쳐보고 있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는 반응이 없었다.

움직이거나 인상을 쓴다면 몰래 훔쳐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그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살피게 되었다.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 잘생긴 사내였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 번쯤은 돌아볼 만큼 잘난 이였다. 그런데 저자는 독각귀고, 자신의 아버지였다.

독각귀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들은 어떤 식으로 맺어지게 되었고, 왜 자신이 태어난 걸까.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이었지만, 그걸 실제로 묻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묻고 싶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지금 자신은 태어나서 이만큼 자라 있었고, 절반의 피가 독각귀의 것인지라 자라는 내내 피곤한 삶을 살았다.

그런 마당에 저 독각귀 입으로 ‘어쩌다 보니 네가 생겼다.’ 같은 말을 듣게 된다면 좀, 아니. 아주 많이 싫을 것 같았다.

겉모습으로 보면 사내들이었다. 그런 둘이 만나 자신이 태어날 정도라면 그 나름대로 깊은 마음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믿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자신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덜 불쌍할 것 같으니까―.

그때 갑자기 독각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귀물인가 싶었던 명월은 놀라선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가 명월을 바라봤다. 이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게 무언지 알 것 같았다.

……과묵한 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철회다.

역시 말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면서 명월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모닥불 앞에 둔 붉은 과일을 확인했다.

딱 한 입만 베어 물었던 거다. 다시 먹고 싶진 않으니 버려 두고 갈까도 싶었지만, 왜인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걸 집어 들고 품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배 앞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왔지만,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과일을 챙기고 고개를 든 명월은 움찔했다. 왜냐하면 독각귀, 그가 이쪽을 빤히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과일이 들어간 배 부분이었다.

그가 보기엔 이상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준 걸 먹지 않고 남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에 명월은 슬그머니 배를 가렸다.

“신 걸 잘 먹지 못해서―.”

변명이라고 한마디 한 게 영 구차하게 들린다. 이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 입을 다뭄과 동시에 그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않는 건가. 그럴 거면 처음부터 쳐다보지를 말든가.

배를 가린 자신이 이상해지지 않느냐면서 안색을 굳힌 명월은 발끝으로 모닥불을 흩뜨렸다.

대충 나무를 흩어 낸 명월은 곧장 독각귀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곳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반짝거리는 잎을 발견하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리로 오는 동안 눈에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동그랗게 말려진 나뭇잎이 마치 등불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딱 보기엔 좋고 예쁜 것 같지만, 저걸 처음 접하는 명월의 표정은 굳어졌다.

뭐 저런 이상한 게 다 있나 싶어서 안색을 굳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걸어갈 따름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간격이 벌어지자 바로 걸음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는 걸 확인한 명월은 바로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러 늦장 부린 건 아니었다. 이상한 걸 보게 되어서 순간적으로 움찔한 것뿐이었다.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사람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속마음을 꾹꾹 참으면서 그에게로 가던 명월은 갑자기 눈앞이 빙글 도는 걸 느꼈다.

“……어?”

이상하다 싶어 의아한 소리를 낸 후 가볍게 고개를 털었지만, 그 순간 몸이 부웅 뜨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

이상한 그 느낌에 당황한 명월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명월의 몸은 아래로 쓰러졌다.

* * *

풀을 치워 내며 걸어가는 자는 잔뜩 굶어서인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머리는 산발에 입고 있던 옷은 다 해지고, 짚신도 다 떨어져서 간신히 걸려 있는 상태였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정처 없이 길을 헤매던 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기 숲 가운데에 서 있는, 듬직한 체격을 지닌 사내를 발견했다.

그 순간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있던 이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진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흔들리던 동공으로 힘이 들어가고 입술 양 꼬리가 올라간다.

괴이쩍다 할 정도로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위로 양팔을 들었다. 그대로 등을 보인 채로 서 있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풀이 양옆으로 흩어지고 점점 더 사내와 가까워진다. 눈이 점점 더 커진 그는 앞으로 손을 뻗었고, 동시에 노리고 있던 자가 뒤를 돌아봤다.

짜증이 가득 묻어난 얼굴. 백호는 제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귀물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정확하게 들어간 백호의 발바닥에 얼굴을 가격당한 놈은 공중에서 한 바퀴 홱 돈 다음에 낙하했다.

엎어진 채로 꿈틀거리는 자를 살벌하게 노려본 백호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죽고 싶냐?”

하지만 이미 죽은 놈이었다.

덧붙이자면, 백호는 죽은 자도 완전히 없애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다니는데도 명월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해 기분이 점점 구려지던 참이었다.

백호는 쓰러진 놈의 머리통 위에 발을 올리고는 서서히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놈이 버둥거리면서 벗어나려 한다.

어림도 없다며 코웃음을 친 백호가 더 힘을 주자 녀석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죽을 것처럼 웅얼거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쥐어 짜내듯 내뱉는 목소리는 쇠가 긁는 것 같은 느낌인지라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쓴 백호지만, 다리를 치워 주었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자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멋도 모르고 백호에게 달려들 때에는 징그럽다 할 만한 모습이었건만, 지금은 비쩍 곯은 불쌍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은 자는 양손을 비비면서 백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훌륭하신 분을 못 알아보고 함부로 덤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난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건데?”

심드렁한 백호의 대꾸에 사내는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저를 없애 봤자 득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겁도 없이 이 몸에게 덤빈 대가는 치러야 할 거 아니야.”

『제가 눈이 어두워서 못 알아봤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우습다. 이미 죽은 놈이 살려 달라 하기는―.

혀를 찬 백호는 놈의 가슴을 세게 발로 차 버렸다. 억, 하는 신음을 흘린 놈이 옆으로 철푸덕 쓰러진다. 세게 차긴 했지만, 저렇게 끙끙 앓을 정도는 아니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음산한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앉아선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푹 숙이는 놈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곳으로 넘어와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명월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워낙에 넓고, 이상한 것들도 많은지라 수월치가 않았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특정 대상을 찾는다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결국에는 이런 허접한 놈들을 붙잡아서 이런저런 걸 물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의외로 말을 할 줄 아는 놈이 적었던 거다.

그런데 이 건방진 놈이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럭저럭 잘된 일이라면서 백호는 팔짱을 끼었다.

“이곳을 다니면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나?”

『수, 수상한 자라면 누굴 말하는 건지―.』

“딱 봐서 이상한 놈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는 거냐?!”

언성을 높인 백호가 한쪽 다리를 드는 것과 동시에 사내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 중입니다. 이상한 자라면, 그, 그게. 맞습니다. 독각귀가 이상한 걸 등에 업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분명히 독각귀였던 거냐?”

『저도 눈이 있는데 그게 독각귀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까?』

“네놈은 나도 못 알아보고 덤비려 하지 않았냐.”

네 눈은 제대로 된 게 아니다. 장식으로 달아 놓은 게 분명하다면서 매섭게 눈을 치뜨는 백호를 두고 사내는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 눈으로 분명히 봤습니다. 독각귀가 무언가를 업고 가는 걸 보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원래 독각귀하고 얽히면 안 되는 거니까요.』

입을 다물고 비굴하게 웃는 놈을 두고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말을 들어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찾다가 지쳐서 잠시 멈춰 선 중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괜찮은 정보를 입수했다.

드디어 명월을 찾았구나 싶어서 심장이 뜨겁게 뛴다.

흥분이 되기 시작했지만, 애써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백호는 물었다.

“그 독각귀를 어디서 봤냐?”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원래 그곳은 기운이 강해서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요.』

다른 놈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명월을 데리고 가 뭔 짓을 할 셈이더냐.

방심하게 해 놓고는 제대로 뒤통수를 친 독각귀를 생각하자마자 이가 갈린다. 살벌한 표정인 백호를 두고 사내는 기가 죽었다.

모처럼 싱싱한 먹이를 발견한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먹이는커녕, 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기서 이런 존재와 마주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게 실수였다.

그래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귀물은 꼼질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제, 제가 아는 건 다 말했습니다.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물으면서 눈치를 살피는 동안에도 백호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긍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귀물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느리게 몸을 돌려 때를 봐 달리려 하는 순간에 맞춰서 커다란 손이 그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가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백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가긴 어딜 가.”

그리 내뱉은 후 바로 잡고 있던 이의 머리를 잡아 반대로 비틀어 버렸다.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꺾어지고 그대로 검은 재가 되어선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재마저도 흙 위에 닿기 전에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백호는 허리를 세우고 손을 털었다.

저런 놈들은 그냥 보내 주면 분명 다른 곳에서 문제를 일으킬 거다. 재수가 없으면 자신의 땅으로 기어들어 올 수도 있음이었다.

원래 저런 것들이 자아가 없는 것보다 훨씬 더 대하기 어려웠다. 쓸데없이 잔머리를 굴려서 별일 아닌 것도 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들이다.

느릿하게 손을 턴 백호는 북쪽을 살폈다. 그쪽을 집중해서 바라보고는 킁킁, 거리지만 바로 나는 냄새는 없었다.

저놈이 한 말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명월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명월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급해진 백호는 바닥을 박차 올랐다.

* * *

명월은 지금 자신이 누군가에게 업혀 있는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업고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 아닌지는, 느릿한 걸음과 흔들림이 없는 몸 같은 걸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신경 써서 자신을 업다니. 누굴까.

바로 생각나는 건 백호였지만, 지금 그와는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딱 하나뿐이었다.

독각귀.

그리 불리는 자신의 아버지.

지금 자신이 정말로 그에게 업혀 있는 걸까. 왜 이런 상태가 된 걸까.

의아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입은 열리지 않았고,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반쯤 눈을 뜬 명월은 자신이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자신의 양손은 상대의 어깨 쪽에 각각 올려져 있었다.

그런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그 손이 한 개가 되었다가 두 개가 되었다가 한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초점이 맞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놈이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붙잡았었다. 그때 발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걸까.

그런데 바로 상태가 나빠지지 않고 좀 지난 후에 이리되었다. 독 같은 것에 당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릿속이 몽롱해지고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진다.

멍하니 있던 명월은 눈을 감았다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떴다. 그래도 졸린 건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을 업어준 상대가 너무 조심스럽게 대해 주니까, 그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끔 한다.

속이 간질거린다. 그건 백호 때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건……아, 그렇지.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가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거나 잘 대해 줄 때에 들던 감각이었다.

가슴 한쪽이 간지러워지다가 이윽고 그게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푹 숙인 채로 숨죽이고 있곤 했다. 그때하고 지금하고 똑같은 기분이 든다면서 명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평소 잠을 자도 꿈은 거의 꾸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이 굉장히 사실감 있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 그랬다.

명월은 자신이 서 있는 넓은 마당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위엄이 느껴질 정도로 큼지막한 그곳은 자신이 살던 집이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살던 집 말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반양으로 오고 나서 이곳과 관련한 꿈을 꾼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누군가 명월의 옆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명월은 그리로 고개를 돌렸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나치는 인물은 명월이 어렸을 적에 보살펴 주던 불친절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기억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평소 뚱한 얼굴로 있다가도 자신이 말을 건네면 인상을 쓰거나 노골적으로 꺼려 하는 표정을 지어서 자신도 그리 썩 좋아하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런 여자가 왜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건가 싶어 의아한 기분이 들었던 명월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단순히 제 발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간 곳에서 명월은 ‘그’를 발견했다.

그를 보는 순간 명월은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저게 정말로 그인가 싶어 멍하니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하얀 겉옷을 입은 그는 머리를 대충 늘어뜨린 채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붉고, 눈은 동그랗고 검다. 표정이 없어서인지 인상이 흐리지만, 한 번 보는 순간 곱다고 누구나 다 생각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어렸을 때에 잠시 함께 살았던 그였다. 하도 어렸을 적의 일인지다 다시 만나게 되면 못 알아볼 수도 있겠거니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보는 순간 바로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그가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이가 어렸을 무렵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어린 외모. 분위기. 분명 그라는 걸 알겠는데,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린 명월은 재차 주변을 살폈다. 뒤뜰이었지만, 자신이 보고 자란 그런 광경은 아니었다. 저기에 있어야 할 게 없거나, 아예 위치가 다른 것도 더러 있었다.

아,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거로구나.

어차피 이건 꿈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시기의 그를 보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왜 이런 게 보이는 걸까. 독각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눈앞에 그가 있지만, 자신이 알던 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질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날이 추우니 방에 들어가라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연거푸 말을 전달하던 여인은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그의 태도에 결국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굳은 얼굴로 몸을 돌린 그녀가 나직하게 ‘기분 나빠서 원.’ 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자신에게 들렸을 정도이니 그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눈이 시려진다.

역시나, 그도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았던 거다. 이 집안 안에서 그저 숨만 쉬고 살고 있었던 거다.

그와 자신이 가진 다름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뭔가 거슬린다 싶으면 배척하고 밀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아무렇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홀대를 당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아주 많이 좋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진 명월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옆에 서선 그가 보는 걸 살폈다.

그가 보는 건 나무 아래쪽에서 피어나는 꽃 한 송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만한 것이었다. 주의력이 부족한 이는 밟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발견했고, 이렇게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거다.

자신도 그랬다. 다른 이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에 흥미가 생겨서 한참을 말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었던 거다.

자신에게 있어선 의미가 있는 행위였지만, 다른 이들 보기엔 아니었을 터였다. ‘저놈이 또 이상한 짓을 한다.’라고 생각들 하겠지.

그런 자신의 이상한 점이 어디서 왔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낳아 준 사람. 자신과 아주 가까운 존재에게 말이다.

남들 보기에 이상한 점도, 그와 닮은 부분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 한쪽으로 기분 좋은 따스함이 퍼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한참을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다.

옆에 선 그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늘 똑같은 곳에 서선 나무 아래쪽을 살피곤 했다.

꽃은 그때마다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피어나 있었다. 그래서 명월은 나무 아래쪽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그 꽃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꽃이지만, 아니었다.

이건 대체 뭐지?

그런 의문을 갖는 순간 갑자기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창 하나 없는 작고 답답한 방이 나타났다. 명월은 그 방의 구석진 곳에 서 있었고, 그는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제 몸에 맞지 않을 정도로 낙낙한 옷을 입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죄인 같았다.

어쩌면 지금 그는 본인이 정말로 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를 바라보는 명월의 얼굴로 안타까움이 서린다.

어떻게든 해 주고 싶다. 명월은 그에게 걸어갔고, 동시에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타났다. 유일선 대감. 자신을 키워 준 분이었다.

명월은 움직이려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은 얼굴을 한 아버지는 그를 노려봤다.

‘당분간은 이곳에 있거라. 밖으로 나오지 말고, 그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누지 말거라. 만약에 여기서도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게 내 귀에 들어오게 된다면―.’

무서운 표정을 한 채로 나직하게 말하던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차갑게 그를 노려보나 싶던 아버지는 양손을 움켜쥐었고, 눈을 감았다. 그런 식으로 제 감정을 추스른 후 눈을 뜬 아버지는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키면 그땐 더 이상 널 보호해 줄 수 없다. 감금된 것과 같은 생활이 되겠지만, 그 모든 게 널 위해서다. 몇 년만 버텨라. 여기서 조용히 몇 년을 보낸다면 그때 다시 집으로 부르겠다. 너도 보통 사람들처럼 조용히 살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쓸데없는 말이 들어가게 될 거야.’

‘제가 얌전히 지낸다 하더라도 절 죽이려는 자들은 그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다른 누군가 말하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만큼 그가 말을 하는 게 의외였다. 내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비단 자신만 생각하던 게 아니었는지, 아버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선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처연했다. 그 눈이 가늘게 휘어지면서 미소를 머금나 싶더니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절 보호하시려 하면 형님도 다치십니다.’

‘……시끄럽다. 너 하나 정도는 내가 보호할 수 있다.’

‘제 형님이기 이전에 가문의 수장이십니다. 저들은 저를 들먹여서 형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 들 겁니다. 제가 하지도 않는 일을 지어서 만들어 낼 것이고, 그건 사실처럼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도성 안에 퍼지게 되겠지요.’

‘…….’

‘그러다보면 거짓이 진실이 될 테고, 형님 또한 그 말을 믿게 되실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저들이 아니라 형님께서 절 죽이려 달려오시겠지요.’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명월도, 유일선 대감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모든 말들이 아플 정도로 마음을 찔러 온다. 특히 명월은 유난히 마음이 아팠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게 무엇인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사람들 귀로 들어가면 뼈대가 생기고 살이 붙는다. 나중에 돌고 돌아 자신의 귀에 들어올 때에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 말도 안 되는 걸 믿고 있었고, 그걸 토대로 끊임없이 자신을 배척하려 들었다. 때로는 아버지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랫입술을 사리문 명월이 양손을 움켜쥐자 그가 재차 말했다.

‘차라리 절 자유롭게 풀어 주십시오. 그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말을 한 후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은 본인이 지금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문제는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미간 사이로 잡힌 주름을 본 명월은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할 수 있었다.

‘집안이 잠잠해지면 바로 부르겠다.’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닫힌다. 그저 닫히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 와서는 자물쇠를 거는 것 같았다. 이 좁은 방 안에 정말로 그를 가둔 것이다. 당황한 명월은 급히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가 입을 벌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당장 문을 열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해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던 거다.

명월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명월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로 그의 몸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지금 이 방 안에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전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안에 있다는 것으로, 그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붙인 명월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허벅지에 올린 손을 움켜쥔 채로 괴로운 표정을 짓던 명월은 눈을 질끈 감고는 조금 더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댄 채로 속삭였다.

‘우린 잘못 같은 걸 한 적이 없어.’

그저 보통 사람과 다를 뿐이었다.

자신들 눈에선 보이고 들리는 걸 못 보고 못 듣는 저들이 더 이상했다. 왜 이리도 생생한 걸 느끼지 못하고 이상하게 쳐다본단 말인가. 왜 더 접근을 할 수도 없도록 미리 선을 긋는 걸까.

자신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해를 끼친 건 다른 존재들이었고, 자신들은 그게 보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 하면 드러나는 저들의 경직된 표정과 눈빛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결국엔 그걸 마다하는 건 바로 저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꼭 자신들 탓을 한다.

인간이란 왜 이리도 이기적인 걸까. 왜 저들 좋은 것만 보고 듣는 걸까.

도대체 왜.

눈을 질끈 감은 명월은 속삭였다.

‘―죽은 거 아니지?’

백호는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정말은 그렇지 않은 거지?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저 독각귀가 나타나서 자신을 데리고 간 거지. 지금 꽤 힘든 상태지만, 그래도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힘내고 있어. 그러니 당신도 무사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어 줘. 난 어떻게 해서든 꼭 당신을 만나고 싶어.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더 당신과 만날 거야.

그리 마음을 담아 명월은 눈을 질끈 감았고, 그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닿는 사락거리고 흩어지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생생했다. 당황한 명월은 급히 고개를 들었고, 이쪽을 주시하는 그와 시선이 부딪쳐서 놀라 숨을 삼켰다.

설마하니 자신이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똑바로 응시해 오는 시선에 당황한 명월은 입을 열었다.

아, 하고 한마디 내뱉는 순간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건 닫힌 문 쪽이었고, 그걸 깨달은 명월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정말 놀랐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닫힌 문을 빤히 바라봤다. 저곳엔 아무도 없었고,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리 쳐다본다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인데―.

무거운 한숨을 내쉰 명월은 손을 들어선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문 너머에 생긴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그쪽을 바라봤기 때문에 난데없이 보이는 그림자에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이 흔들린다. 덜컹, 하고 가볍게 두어 번 흔들리다 한쪽이 천천히 열렸다. 다음 순간 그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명월의 몸이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손이 작고 소담한 꽃을 들고 있는 걸 확인하곤, 움직임을 멈췄다.

저것은…….

명월은 바로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내내 인형처럼 감정 없이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빛에 생기는 변화를 발견했다.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 저 아래쪽에서부터 반짝거리는 게 생겨난다. 그것은 그의 표정 자체를 달라지게 했다.

그걸 확인한 명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를 봤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꽃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천천히 움직였다. 반쯤 열린 문 앞에 서선 내밀어진 꽃으로 손을 뻗었다. 양손으로 조심스레 꽃을 받아드는 것에 맞춰서 바깥에서 들어온 손이 천천히 펼쳐진다.

피가 흐르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시리도록 창백한 손이었다. 그 손이 펼쳐지는 의미를, 그가 모르진 않을 거다.

양손에 꽃을 든 채로 서 있기만 하던 그가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상대의 손에 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그걸 놓칠세라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의 손을 단단히 쥐는 순간 검은 그림자의 윤곽이 보다 선명해졌다.

검은 도포를 입고, 긴 검은 머리를 풀어 내린 남자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놀랄 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듯 남자를 바라보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독각귀를 응시하던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웃는 얼굴.

그가 웃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생소하다.

낯선 걸 보는 듯 굳은 채로 있는 동안 그가 독각귀에게 다가갔고, 둘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명월은 바로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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