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산속 깊숙한 곳에 터전을 잡은 반양은 초반에는 풍족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임금에게 진상할 쌀의 양을 제대로 채울 수 없게 되었다. 가뭄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임금은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서 진상품을 절반으로 줄여 주었으나, 가뭄은 해결될 기미가 없었고, 이대로 가다간 진상품은커녕 집집마다 먹을 것조차 없게 생겼다.
먹고 살기 위해선 터전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흘러나오던 즈음에, 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내가 그곳에 신이 있다고 떠들어 댔다. 신이 말하길 젊은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 가뭄이 사라지고, 산삼도 많이 내려 줄 것이라 했다며 본인이 얻어 온 것들을 보여 주었다. 사내가 펼친 주머니에는 귀한 산삼과 약재, 그리고 버섯이 한 가득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욕심이 났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믿는 건 아니었지만, 사내가 들고 온 것들이 탐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본인들이 직접 신을 만나 봐야겠다면서 하나, 둘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내려온 그들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손에 주머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 안에 있던 건 산삼과 버섯, 약재 등등이었다. 그대로 임금에게 진상해도 될 정도로 최상품의 것이었다.
극심한 가뭄에 지친 상태였던 이들은 당장 손에 쥐게 된 귀한 물건에 눈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 신이 말하길,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친다면 가뭄이 사라지고,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라 했다.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망설이는 동안에도 숲에 들어갔다 나온 이들은 손에는 주머니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제물에 대한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이런 식으로 숲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얻는 걸로도 충분히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난 후 고을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숲의 신에게서 얻은 귀한 것들이 순식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숲을 꾸준하게 다니면서 얻은 걸 토대로 바깥으로 나가려 했던 이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 걸리거나 다쳐서 다시 고을로 돌아와야 했다. 그게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런 데다, 아픈 이들 중에서는 사망하는 자들도 생기게 되었다.
한 사람이 죽게 되자 그들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 중 용기가 있는 몇몇 이들이 숲으로 들어가 신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개간된 논과 밭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숲에 들어간 이들 중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실종되는 이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고, 급기야 신이 원하는 제물을 물색하게 되었다.
언제 갑자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다른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죄책감은 옅어져 버렸던 거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인해, 그들 눈에 고을 외곽에서 늙은 노모를 부양하고 살던 소녀가 들어왔다.
평소 행실이 번듯하고 마음도 고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던 소녀였다. 모두가 소녀를 좋아했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소녀의 늙은 어머니는 위중한 상태였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둘 외에 다른 식구가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뭐라 할 이들도 없었다. 소녀가 갑자기 사라진다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누군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지만, 어느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가 심하게 퍼붓던 어느 날, 소녀의 집으로 몇몇 사내들이 방문했다. 숲으로 들어가면 병든 노모를 낫게 할 만한 귀한 약재가 있으니 그걸 구하러 같이 들어가 보자고 말했다. 소녀는 늙은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효심이 깊었던 그녀는 바로 마을 사내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퍼붓던 비가 개고, 사라졌던 것들이 다시금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도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로 인해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그건 더 이상 귀한 물건이 될 수 없었다. 그건 제물로 바쳐진 소녀의 목숨 값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끔찍해서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딸이 사라진 이후로 그녀를 찾던 노모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두 달이 못 되어 사망했다. 그들에게 한 짓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노모의 시신을 잘 묻어 주었고, 그렇게 다음 해가 되었다.
그 해는 가뭄이 지지 않고 모든 게 풍년이었다. 1년 전에 있었던 기억을 잊게 된 마을 사람들은 본인들의 손으로 일궈낸 성과에 크게 기뻐하며 큰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숲에 들어갔던 소녀가 나타났다. 들어갔을 때 모습 그대로 나타난 소녀를 본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귀신을 본 것마냥 기겁을 하는 이들 사이로 소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차분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잠자코 있었고, 소녀가 재차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소녀에게 돌을 던졌다.
소녀는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는 죽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두렵고, 소름끼쳤던 이들은 소녀에게 달려갔다. 누군가는 돌을 던지고 또 다른 이는 몽둥이를 휘두르고. 미친 것처럼 손찌검을 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그 자리에 소녀는 없었다. 남은 건 그녀가 입고 있던 옷가지뿐이었고, 피가 묻은 댕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소녀는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소녀는 밤마다 나타나 마을을 돌면서 그녀의 어미를 찾았다. 결국 어미를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마을에 있던 또래의 소녀를 데리고 갔다. 딸을 잃은 집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이후로 소녀가 나타나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해 다시금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다른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숲으로 들어갔고,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고을의 풍족함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서 성립될 수 있었던 거다.
처음에는 모두가 알고 있었던 그 일도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1년에 한 번씩 아무 이유도 없이 소녀가 죽게 되면, 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게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었다. 장의사 이종원은 바로 그런 일을 해 왔다. 소녀가 죽은 이유를 몰래 숨겨 두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외부에서 유입되는 사람들도 차차 늘어나다 보니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숨기던 것이 늘어나고, 어느 순간부터 잡귀가 달라붙게 된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 좋은 일을 하는 동안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었던 거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미쳐 갔던 것인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소녀를 희생시키려 댕기를 찾으려 했던 이방과, 시체를 빼돌리거나 죽음을 위장함으로 해서 결국엔 잡귀에게 먹힌 채 있던 장의사 이종원. 둘 중에 누가 더 문제가 큰 것일까.
어쩌면 둘의 죄로 따질 수 없고, 그저 단순히 둘 다 희생양이었던 게 아닐까.
……이 고을은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지는 것 같다면서 명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하십니까.”
나긋한 목소리에 명월은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호접화가 앉아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바라보는 그녀를 두고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반양 최고의 미녀와 함께 있는 것인데 어찌 지루할 수 있겠소.”
“하지만 지금 사또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계시는 것 같습니다.”
“…….”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딱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방이 한 짓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지금 당장 드러낼 수 있는 건 그가 곳간에서 피가 묻은 댕기를 훔치려 했다는 것이었고, 그걸로 처벌을 내릴 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댕기 하나 때문에 이방을 처벌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고, 뭔가를 아는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문제가 더 커지게 된다.
결국 이번 일도 명월 선에서 묻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방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그에겐 당분간의 근신을 명했다. 곳간에 몰래 들어간 것만으로도 곤장 백 대 감이라며 흥분해선 길길이 날뛰는 복운을 두고 명월은 오랜만에 기방을 찾았다.
대낮부터 이런 곳에 다닌다면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가 아플 땐 미인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이 보약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쉽사리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재차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게 말해도 괜찮은 거라면 해 보십시오. 전 듣기만 할 뿐, 그걸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그대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리고 싶군.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
“제가 입을 가볍게 나불댈 것 같으신가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가 우는 소리를 낼 것 같아서 그게 염려가 되는 것뿐이오.”
“사내라고 해서 늘 강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끔씩은 여인의 치마폭에 감싸여 모든 근심 걱정을 털어낸다 한들, 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끌려, 위안을 얻고자 하는 건 무척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랍니다.”
바로 눈앞에서 호접화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 그 입술만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내밀어 입을 맞추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말 그리할 순 없는 노릇이었고, 지금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호접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놈이 떠올랐다. 망할 장인 놈이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훔친 일도 말이다.
그놈은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의사 이종원을 그리 두들겨 패고 자신에게 달라붙어 입술을 훔칠 리가 없었다. 아니면 애초에 남색가였던 건가. 인간인지, 귀신인지 뭔지 정체도 알 수 없는 주제에 남색이라. 아주 가지가지하는 놈이라면서 명월은 인상을 썼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호접화가 소리 내 웃었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에 명월은 아차 싶었고, 호접화가 재차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절 보고 이리도 무서운 얼굴을 하시는 분은 사또뿐일 겁니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 때문에 인상을 쓴 게 아니었어.”
“저를 옆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신 분도 사또가 처음이시죠.”
호접화는 술병을 내려놓고는 세운 무릎에 한쪽 팔을 올렸다.
“어차피 기생이니 사내 옆에서 웃음만 팔면 그만, 다른 걸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마음을 비워두고 있어서 그 어떤 일에도 태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로군요. 왜일까요. 사또께서 제게 관심이 없으신 듯하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
장담컨대, 지금까지 호접화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을 거다. 엄청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말을 들은 건 자신이 최초라는 걸 알면서도 명월은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냥 말만이라도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해도 내 마음 한쪽엔 언제나 그대가 있다.”라고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명월은 입을 꾹 다문 채로만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명월을 두고 호접화는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곤 안주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봅니다. 술이나 드십시오.”
“……자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네. 그저 오늘은 내가 재미가 없을 따름이지.”
다른 때라면 이런저런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주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해도 별 반응이 없는 재미없는 사내 그 자체였다.
원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여길 찾은 건데, 결국엔 일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며 명월은 술을 마시고, 호접화가 건네는 안주를 받아먹었다. 그때 그녀가 지나치듯 물었다.
“이종원이라는 자하고는 잘 만나 보셨습니까?”
그 순간 명월은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가까스로 막았지만 목구멍 안쪽으로 튀는 기침까진 막을 수 없었다. 쿨럭거리면서 손으로 입을 막자, 호접화가 바로 찻잔을 건넸다. 그걸 받아 든 명월은 급히 차와 함께 입 안에 있던 걸 넘겼다.
“그 사람과의 일 때문에 언짢으신 게 있으셨습니까?”
“아니, 언짢은 일은 하나도 없었소.”
그놈이 잡귀에게 씌어서 자신을 덮치려 했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이 뒤에 있었다. 망할 장인 놈하고 입술 박치기를 했던 걸 떠올리니 속이 뜨끈하다. 엄청난 분노로 치를 떨면서 명월은 마지막 남은 차를 다 넘겼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호접화가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명월의 젖은 입술을 닦아내 주었다. 조심스레 살짝살짝 닿는 손수건에 명월은 눈을 내리떴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건드리는 게 입술이고, 쳐다보는 쪽도 입술이었다.
괜히 몸이 오그라드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손수건을 들고 갔다.
“고맙소.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닦겠네.”
그리 말을 한 명월은 손수건으로 입술 주변을 닦아 내면서 다른 쪽을 바라봤다.
“사또께선 절 볼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는 모양이십니다.”
호접화의 말에 움찔하고 몸을 떤 명월은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니오. 그대와 같은 사람을 보고 어찌 다른 이를 떠올리겠나.”
“하지만 지금도 두 눈동자엔 껄끄러움이 묻어나는 걸요. 전에 제게 피를 나눈 혈육이 있냐고 물으셨던 건, 달리 신경 쓰이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 누가 저하고 그리도 닮았는지 알려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대하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소.”
그래. 그 망할 장인 놈하고 꽃 같은 호접화는 닮은 구석이 조금에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눈구멍이 이상한 것뿐이었다.
일단은 이방의 일을 처리하고 난 후, 그 장인 놈도 처리할 거다. 그러고 나서 이 고을에서 호접화와 함께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면서 임기를 끝낼 거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면 아버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
그 순간 명월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생각에 잠겨 있나 싶던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고, 때마침 닫힌 문 너머로 “형님. 접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호접화의 허락에 분합문이 열리고 상자를 든 기녀가 들어왔다. 사뿐히 앞으로 걸어온 기녀는 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부탁하신 걸 준비해 왔습니다.”
기녀는 넓은 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크기가 꽤 컸다. 명월이 그걸 살피자 기녀가 눈동자를 들어 그에게 추파를 던진다. 자신에게 한 번만 시선을 달라는 양 눈을 찡긋거렸지만, 명월이 보고 있는 건 상자뿐이었다. 그것에 기녀는 금세 심통 난 얼굴이 되어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호접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들고 명월 옆으로 갔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곳에 들어가 있던 고운 저고리가 드러났다.
“아마도 이게 사또께서 찾는 것일 겁니다.”
호접화의 말에 명월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그리로 고개를 숙였다.
딱 보기엔 그리 큰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자 호접화가 저고리를 들어선 본인 가슴에 대 보았다. 그제야 명월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확인하고 난 후, 한복을 집어넣은 호접화가 물었다.
“이런 커다란 옷을 어디에 쓰실 건지 여쭤도 될까요?”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부탁을 받은 거라네. 그래. 얼마면 되나?”
“어차피 크기가 커서 아무도 입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돈은 되었으니 다음에 한 번 더 찾아와 주십시오.”
“그 정도로는 너무 약소한 게 아닌가.”
상자를 닫아선 뒤로 슬쩍 밀어낸 호접화는 눈동자를 들어선 명월을 바라봤다.
“덕분에 사또 얼굴을 한 번 더 뵐 수 있게 된 걸요. 결코 약소한 게 아니랍니다.”
“그리 말을 해 준다면, 나로선 고맙지.”
빈말이 아니라 정말 고마웠다. 호접화 그녀가 아니라면 이런 부탁을 그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분명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날 거다.
이미 지금도 툭하면 기방을 찾는 난봉꾼 사또라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그때 저기 밖에서 “사또,”라는 부름이 들렸다. 복운의 목소리였다.
다른 때였다면 저 목소리를 들어도 그냥 모르는 척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상자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자네의 귀한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먹는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네.”
호접화는 일어나 명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입고 있는 도포 자락을 바로 해 준 후에 어깨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섭섭한 말씀 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제 시간을 빼앗아 주십시오.”
그리 말을 함과 동시에 호접화의 손이 옆으로 떨어졌다.
확실히 그녀는 사내 다룰 줄을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을 다른 사내에게 했다면, 당장 그녀에게 푹 빠져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기방을 찾아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되겠다면서 명월은 눈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걸 배웅하기 위해서 호접화가 따르려 했지만, 그 전에 명월이 뒤를 돌아봤다.
“괜찮으니 앉아서 쉬시게.”
그리 말을 한 명월은 분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는 동안, 마침 누군가 이리로 들어왔다. 사또 차림이 아닌, 일반 양반처럼 입고 있다 해도 낮 동안에 기방 안에서 다른 이와 마주치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때 상대가 옆을 지나쳐 갔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짧은 순간 이건 뭔가 싶었던 명월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뻔했지만, 그냥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 서 있던 복운이 바로 달려와 그가 들고 있던 걸 받았다.
“아니, 이건 또 뭡니까?”
지금까지 기방을 나서면서 물건 같은 걸 받아 온 적 없던 명월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상자의 정체는 대체 뭔가 싶었던 복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명월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복운을 지나쳐 먼저 뒷길로 갔다. 뒷짐을 진 채로 빠른 걸음을 옮기는 명월을 보던 복운도 급히 뒤를 쫓았다.
대낮인지라 길가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 사람은 많아도 복운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지금 복운이 등짝이 뚫어지라 바라보는 건 바로 명월이었다.
이토록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그게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 명월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을 하고 있었다. 결국 복운은 참지 못하고 명월의 옆에 따라붙어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알면, 도와주기라도 할 것이냐.”
“제가 왜 도와드립니까. 아무것도 못 하시게 막아도 부족할 판에 말입니다.”
뚱한 복운의 대꾸에 명월은 소리 내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말이다.
명월의 웃음을 듣게 되자 복운은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말을 한 게 아닐까. 아니다. 이게 명월을 위한 최선이라면서 복운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시려는 건 아니지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명월이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부딪치자 복운은 점점 더 조마조마 해졌다.
“언제나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또긴 하시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지만…….”
과연 이 말을 해도 괜찮은 것인지, 참으로 고민이 되었다.
몇 번의 망설임 후에 복운은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야지만 큰 어른의 인정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명월의 입꼬리가 양끝으로 올라갔다.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걸 본 복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역시나 괜한 말을 했구나 싶어서 후회를 드러내는 그와 달리, 명월은 편안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 한 쌍이 들어왔다. 그걸 발견한 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복운아, 저걸 보거라.”라고 말했다.
복운은 고개를 들어선 명월이 보라 한 걸 봤다. 새가 빙글빙글 돌면서 날다가 나뭇가지에 앉아선 고개를 숙인다. 어딜 가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저게 아닌, 다른 걸 보라고 한 건가 싶어 눈을 굴리자 명월이 말했다.
“새라는 건 말이다. 누군가 날라고 해서 나는 게 아니란다. 날개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나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누가 하지 마라, 해라,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애초에 알고 있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싫어도, 거부하려 해도, 결국에는 할 줄 아는 짓을 하게 되어 있단다.”
“……너무 어려운 말씀이신지라 무식한 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리는 소리에 명월이 호탕하게 웃었다. 공기를 울리는 맑은 웃음에 근처를 지나치던 이들이 흘깃 거리면서 그를 본다. 그러자 당황한 복운은 다급히 말했다.
“웃음소리 낮추십시오.”
그 말에도 명월은 한참을 더 웃었다.
뒷짐을 진 채로 어슬렁거리는 명월의 걸음은 가뿐해 보였다.
* * *
앞서 가는 노인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얼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왜 지금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평소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늘 구박을 하던 노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신경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저 그림자는 아니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부르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같이 놀자고 하는 것 같다. 놀자면 못 놀 건 없지만 그림자가 저 노인네 뒤에 달라붙어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가 ‘천한 놈!’ 같은 말이나 듣게 될 것 같았다.
예전에는 욕도 듣고 맞기도 했지. 그 기억을 떠올리면 신경을 끄고도 싶었다.
어느덧 무척 진지한 얼굴로 그림자를 바라보던 명월은 망설이다가 바깥으로 슬그머니 나갔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그런 명월의 머리에 닿았다.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냐.’
중후함이 느껴지는 음성에 놀란 명월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보이는 건 아버지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마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명월은 손을 마주잡았다.
아직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낯설었다. 그도 딱히 자신에게 살가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함께 살게 된 지 1년이 되었어도 딱히 친근감을 느끼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게 기본이었다.
명월은 손을 마주 잡았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다가 팔을 들어 노인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할아버지한테 이상한 그림자가 붙어 있어요.’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묘하게 굳어지는 그 얼굴을 본 명월은 실수했다는 걸 깨닫곤 팔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그러는 동안 어린 명월을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가리키는 방향을 살폈다. 그쪽을 유심히 살피던 아버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눈에는 그림자 같은 게 보이지 않는구나.’
명월은 뻗은 손가락을 움츠리고는 팔을 내렸다.
그러곤 고개를 숙이는 명월의 얼굴색은 칙칙하게 굳어 있었다.
‘너도 다시 확인해 봐라.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하지만, 그건 일종의 강요 같은 거였다. 네가 무엇을 보든지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할아버지를 봤을 때, 그의 등 뒤로 여전히 검은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할아버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히 보이는 게 있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앞에 서 있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해선 함부로 말을 해선 안 되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건 암묵적인 규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손을 마주 잡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명월을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눈동자를 들어선 명월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턱을 잡아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접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명월은 숨죽인 채로 얌전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명월의 얼굴에서 손을 뗀 그가 말했다.
‘앞으로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해라. 그래야지 네가 내 아들이 될 수 있다.’
나직한 목소리에 명월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도록 해라. 잘 할 수 있다면 넌 내 아들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거기서 더 말은 없었지만, 입을 다물고 바라보는 눈빛으로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어디서 살아야 하는 거지. 과연 살 수 있는 장소가 있기나 할까. 가슴을 짓누르는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눈을 내리뜬 채로 얼어붙어 있는 명월을 두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그를 두고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붙잡고 싶었지만,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 얼굴에 닿는 매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급히 그쪽을 바라봤다.
안쪽 대청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아버지의 부인이니, 명월에겐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가 명월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비단, 식어 있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 안쪽에 서린 선명한 미움을 읽어 낼 수 있었던 명월은 천천히 눈을 내리뜬 채로 손을 마주 잡았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비단 그녀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은밀한 곳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장난을 치기라도 하려는 듯 닿았다가 떨어지는 시선이 끔찍했다.
명월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달아났고, 검은 그림자가 붙어 있던 할아버지는 얼마 안 있어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한 쓸데없는 말 때문에 저런 눈빛을 보내오는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데.
그냥 모르는 척해 버리는 건데.
어렸을 땐 몇 번이고 생각하던 것이었지만, 어렸기에 그걸 능숙하게 할 수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오거나 그리로 손을 뻗게 되었던 거다. 그렇게 몇 번의 오차를 거쳐서 어른이 되었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문 채로 몇 년을 살아왔다.
나름대로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명월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쪽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뒤집어 쓴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일부러 그걸 가장하려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장소는 그의 침소가 아니었다. 사람 셋이 나란히 누우면 꽉 찰 만한 좁은 방은 무척 낡았다. 뒤쪽에 놓인 가구도 오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명월은 그곳에 앉은 채로 오랜 시간 미동이 없었다. 그리 있는 동안 문 바깥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명월이 고개를 들었다.
“……사또.”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이방 한소규의 것이었다.
그 음성을 들은 명월의 표정이 굳는다.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 말하지 않았나.”
“역시 제가 함께 있는 것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썩 물러서 있어. 지금 바로 여기서 멀리 떠나 있게.”
단호한 그 말에 문밖에 서 있던 한소규는 안색을 굳히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찬찬히 문 주변을 살피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예전엔 사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나, 딸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난 후 그 아이를 숨겨 두었던 장소였다. 그래도 예전엔 조상을 모셔 두었던 곳이니만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딸의 상태는 점점 악화가 되었다. 그래서 극단적인, 인간으로선 해선 안 되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이었다. 그마저도 사또 명월에게 들켜서 모두 다 끝이로구나 싶었을 때 그가 찾아왔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라면서 지금 당장 식솔과 딸을 데리고 이 저택을 떠나 있으라는 거였다. 그 무슨 말인가 싶었으나 명월은 단호했다. 딸을 살리고 싶다면 그리 하라고 할 따름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취했다면, 한소규는 흥분했을 터였다. 가뜩이나 딸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데 왜 찾아와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면서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월에겐 그리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말에서 내린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몇몇 이들이 ‘계집인가. 사내인가.’라면서 빈정거렸지만, 그는 명월에게서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심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얽히게 되어 버렸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명월은 몇 번이나 눈을 감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자신과 딸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보통 이들이라면 외면을 하고 모르는 척했을 거다. 같은 고을에 살아서 사정을 뻔히 아는 이들도 저들에게 해가 갈까 봐 몸을 사리는데, 명월은 이리도 적극적으로 나서 주는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이젠 족했다.
한소규는 양손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사또. 제 딸은 그렇다 쳐도 사또께선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으셨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보여 주신 모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약 위험한 일을 도모하고 계시는 거라면 멈추어 주십시오. 그래도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하는데 눈앞으로 뜨거운 기운이 몰린다.
한소규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냈고, 그때 방 안에서 “전에 말이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명월이 뭔가를 물으려 하자, 한소규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가선 귀를 기울였다.
“전에 닭의 모가지가 비틀린 사건 말이네. 그건 어찌 된 건가.”
“그 일은 저도 잘 모르는 것이옵니다.”
그런 게 궁금했던 건가.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었던지라 가뜩이나 딸의 문제로 예민해져 있었던 이방 한소규도 깜짝 놀랐었다.
“자네 딸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그땐 닭 모가지 비튼 놈을 잡아내야겠군.”
가볍게 말하는 거 같지만, 정말은 아니었다.
지금 명월은 딸을 대신해서 이곳에 와 있는 거였다.
피가 묻은 그 댕기는 처음 제물로 바쳐진 소녀의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걸 다른 소녀가 하고 있으면 착각을 해서 그리로 가지 않을까, 하는 말을 장의사에게 들어서 몰래 관아의 곳간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해선 안 될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으나 당시엔 뭔가에 쓰인 듯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어쩌면 딸을 위해서라면 지금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지금 그 댕기를 하고 방 안에 앉아 있는 건 사또 명월이었다. 그는 사내이고 그 댕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정말 그녀가 찾아올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명월이 딸을 위해서 저리 있어 주는 게 신경이 쓰여서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명월이 재차 말했다.
“자네가 그곳에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그러니 이만 가 보라는 거였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한소규는 이를 악물곤 당장 몸을 돌렸다. 대문을 빠져나와선 그 문을 닫은 후, 몇 개나 되는 문을 빠져나와 결국 바깥까지 나오게 된 그는 단단히 닫힌 문을 확인하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남들 보기엔 으리으리한 대갓집이건만,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예전 조상 중 한 분이 거상이었지만, 사기를 당해서 모든 걸 탕진하는 바람에, 남은 건 겉만 거창한 이 집 한 채뿐이었던 거다. 그래도 이곳은 한소규 그와 가족들이 마음을 붙이면서 살던 장소였다. 딸에게 그런 일만 생기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던 한소규는 등 뒤에 무언가 닿는 걸 느끼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서 있는 사내를 본 이방은 다리에 힘이 풀려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넌 누구냐!”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그저 떡하니 서 있을 따름이다.
처음엔 귀신인가 싶어서 마른침만 삼키다가 상대의 느낌이 어쩐지 익숙한 듯싶어 눈을 가늘게 뜨자 이목구비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복운이라는 걸 확인한 한소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화가 난 얼굴이 되어선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렇게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건가?”
정말은 멱살을 잡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리 할 수도 없었다. 지금 꽤나 참고 있는 거라며 이를 악문 채로 노려보는 이방을 옆에 두고도 복운은 여전히 조용했다.
처음 곳간에 있던 걸 들킨 이후로 얼굴 볼 때마다 빈정거리던 그가 웬일인가 싶었던 이방도 얼굴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차차 누그러진 얼굴이 된 그는 조금 더 유심히 복운의 안색을 살폈고, 복운이 갑자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앞서 명월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나가게 하라 해서, 이 근처로 사람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왜 복운 저놈이 저러고 앉는 건가 싶었던 한소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앞으로 달려가 나직이 말했다.
“왜 여기에 앉는 건가. 저리로 가 버려―.”
“난 사또와 함께 여기에 있을 거요.”
“…….”
고개를 숙인 채 그리 말하는 복운이 지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복운이 사또의 충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쪽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또와 함께 했으니 아는 것도 많을 거다. 조용히 복운을 내려다보나 싶던 이방은 그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왜 이러는 건가 싶었는지 복운은 안색을 굳히며 이방을 흘겨봤다.
“댁은 가시오. 난 여기에 있을 테니까.”
이방이 쳐다보자 복운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날이 밝으면 사또를 모시고 관아로 돌아갈 거란 말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복운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또를 무사히 모시고 나갈 거라는 의지가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복운의 우직한 태도에 이방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긴 한숨을 내쉰 그는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지나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 사또는, 좀 특이한 분이신 것 같네.”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 일 도와준다고 위험을 무릅쓰시는 거 아니요.”
빈정거림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대꾸 없이 가만히 있는 이방을 흘겨보던 복운은 머리가 복잡한 듯, 마구 긁적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처럼 굴다가도 꼭 중요한 순간엔 곰이 되어선, 온갖 손해는 다 보시지. 나보다 미련하다니까.”
그냥 얼굴 값하게 여우처럼 살면 오죽 좋은가. 한창 잘 나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식으로 파투를 내게 된다면서 복운은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툴툴거리긴 해도, 그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사또에 대한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 *
이방 한소규가 자리를 뜨고 난 후에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허리가 아픈 것 같아서 몸을 슬쩍 움직이던 명월은 엉덩이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에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를 확인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댕기만 있으면 되었던 거라면, 굳이 여인의 의복을 입을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이런 옷을 입는 것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복운을 떠올리자 기분이 꿀꿀해진다. 뭐라고 당장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얼굴로 있던 복운은 “사또, 그런 일까지 하시다니.”라면서 뒷말을 흐렸던 거다.
그런 일까지, 라고 하는 게 거슬렸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리 말을 한 건가 싶었던 명월은 매섭게 노려봐 줬고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이 넓은 곳 안에 있는 인간은 자신뿐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껄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동시에 편안함을 느낀다.
조용하다. 아무도 없다. 그건 즉,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다.
명월은 천천히 눈을 감은 채로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오늘 그놈이 나타날 것인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오늘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방이 서두른 거고,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 무엇도 정확한 건 없으나, 묘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이리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이번 일에 나서게 된 걸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은 감은 눈을 떴다.
그때 문밖에서 야옹,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
이런 순간에 고양이 울음소리라. 그게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건만 다시금 고양이 소리가 나고, 이윽고 문 앞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고, 그때 그것이 문에 앞발을 대곤 탁탁 두드려댔다. 그러다가 발톱을 세워선 문을 박박 긁어대는 게 정말 고양이처럼 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무언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창호지 문에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 고양이의 손으로 보이는 게 불쑥 들어왔다. 통통하고 하얀 앞발을 본 명월의 얼굴은 어느새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쪽을 보는 동안 앞발이 빠져나가고 그곳으로 고양이가 얼굴을 들이민다. 작게 뚫린 틈으로 보이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정확히 안쪽을 주시하는 순간 명월은 가슴 한편이 선뜻해지는 걸 느껴졌다.
보통 고양이가 아니다. 그리 판단을 내린 명월은 당장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고양이가 문에서 떨어졌다. 두르고 있던 두루마리가 벗겨졌지만 그쪽은 신경도 쓰지 않은 명월은 당장 고양이의 뒤를 쫓았다. 문을 활짝 열자 마당 가운데에 서 있는 놈이 보였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확인이 된 고양이는 제법 덩치가 크고 털이 무척 길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마치 하얀 털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봐왔던 그런 고양이가 아니다. 저건 대체 뭔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가늘게 떴고, 고양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으로 달려갔다.
“거기 멈춰라―!”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저것이 멈출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가 잠시 멈춰선 뒤를 돌아봤다.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마냥 말이다. 왜 나를 부른 거냐. 그리 말하고픈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명월은 반쯤 입을 벌렸다.
고양이가 원래 요물이라 하긴 했지만…….
마른침을 삼키고 주변을 살핀 명월은 맨발로 내려가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달려오는 명월은 본 고양이가 다시 앞으로 움직인다. 가볍게 뛰더니 벽을 타고 담벼락 위로 올라가는 것에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달려온 명월이 위로 손을 뻗었다. 함부로 손을 뻗었다가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내민 채로 명월은 차분히 말했다.
“잠시 이리로 와 봐라.”
일단 붙잡아서 정체를 알아봐야겠다.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결코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선량한 사람인 척을 했다.
지금 명월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려선 댕기를 매고 있었고, 여자 한복을 입고 있었다. 보통 여성들과는 다른 체격을 지니고 있으니 사내라는 걸 알 순 있었지만, 묘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어여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모습이었던 거다. 하지만 그런 본인의 모습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승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지도 않았던 명월은 밝은 얼굴이었다.
가능한 환하게 웃어야지만 고양이가 알아서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용히 그런 명월을 내려다보던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야옹,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과 동시에 고양이가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 순간 명월은 양팔을 위로 뻗었다. 털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양이가 꽤나 뚱뚱한 것 같아서 한 팔로 안아 드는 건 무리다 싶었던 거다. 그리고 고양이가 명월의 품에 안기려는 순간에 맞춰서 갑자기 모습이 변했다. 눈앞을 가득히 채우는 하얀 털을 본 명월은 놀라 헛숨을 삼켰다.
당했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람의 형태로 변한 그것이 명월을 꼬옥 끌어안았다. 양팔로 얼굴을 세게 끌어안으면서 밀착해 오는 탓에, 명월은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에 얼굴이 완전히 눌렸다.
지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의 정체가 무언지 알 수 없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당장 그 존재를 밀어서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세게 명월을 끌어안았다. 얼굴이 눌린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릴라치면 털 같은 게 들어올 것 같아서, 입술을 앙 다문 채로 명월은 달라붙어 있는 걸 붙잡곤 어떻게든 밀어내려 했다.
손톱을 세워서 긁어도 털이니 아플 리가 없고, 너무 세게 안겨 있어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잡아서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코와 입이 눌려진 상태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대로 자신을 질식시킬 셈이던가.
불현듯 드는 생각에 명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다.
그 순간 그자가 명월의 귓가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군. 이러다가 언제 갑자기 목이 잘린다 해도 누굴 원망할 수가 없겠어.”
빈정거리는 억양이 섞인 이 목소리는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던 것이었다.
눈을 크게 뜬 명월은 푹신한 것을 잡고는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지금까지 달라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던 것이 알아서 물러났다. 이때다 싶던 명월도 멀찍이 떨어져선 손으로 입술과 코에 달라붙은 털을 털어 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구름에 가리어져 있던 달이 하얀 얼굴을 드러내고, 벽 아래에 서 있던 놈의 모습을 비추었다. 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사내는 하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호랑이의 칙칙한 눈동자를 확인한 명월은 숨을 삼켰다.
호랑이 머리에 눌려서 상대의 코와 입술만 보였지만, 놈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명월은 당장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네, 네놈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군.”
한마디 하려던 순간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칭찬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의 억양을 들어 보면 그게 아니었다. 지금 여인의 옷을 입고 있는 상태를 비웃는 거라는 걸 모르진 않았던 명월은 얼굴을 붉히면서 치마를 잡았다.
이런 차림새로는 화를 내거나 흥분해 봤자 우스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명월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에 서 있는 놈을 확인하곤 몸에 힘을 주었다.
놈은 한 뼘 앞으로 다가와선 눈을 내리떠 명월을 내려다봤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빤히 주시하는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명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생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명월은 바로 머릿속이 맑아졌다.
놈의 정체가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 나타난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어쩌면 이놈이 모든 일의 범인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명월은 급히 치마를 걷어 올리려 했고, 그 순간 놈의 손이 명월의 턱을 붙잡았다.
턱이 잡히는 순간 고개를 돌리고 피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한 손힘을 지닌 놈은 놓치지 않겠다는 양 더 세게 붙잡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명월을 내려다봤다.
놈의 눈빛은 끈적거렸다. 마치 혀가 얼굴을 구석구석 핥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 더러운 느낌을 받은 명월은 놈의 손목을 붙잡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손목이 아니라, 무슨 돌덩이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힘을 줘 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턱을 잡은 손으로 더 힘이 들어간다.
턱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명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흘렸고, 그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무척 곱군. 마음에 들었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놈이 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리를 들어 놈을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놈은 코웃음을 치면서 오히려 명월의 다리를 붙잡았고, 명월은 재빠르게 치마를 걷어 올리곤 허벅지 안쪽에 채워 두었던 단검을 빼내선 빠르게 휘둘렀다.
부웅,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단검을 휘둘렀건만 그걸 또 어찌 알고 용케도 피한다. 멀찍이 물러나는 자를 확인한 명월은 혀를 차면서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그가 한마디 했다.
“굼뜨군.”
“굼―뭐라고?!”
굼뜨다니. 지금은 좀 당황해서 제 실력이 나오지 않은 것뿐이었다. 사람 무시하지 말라면서 명월은 이를 악물곤 다시 덤벼들었다.
치마가 거치적거리긴 해도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명월에 맞춰서 요리조리 피하나 싶던 사내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마치 들으라는 식으로 내는 소리에 명월의 얼굴이 더 붉어진다. 이를 악문 명월은 바닥에 두 발을 디딘 채로 등 뒤로 넘어가는 놈을 향해 상반신을 틀었다. 하지만 놈은 그런 공격 정도는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양, 명월의 팔꿈치를 잡으면서 오히려 더 세게 뒤로 끌어당겼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했지만, 그럴 수 없도록 하는 엄청난 괴력이었다. 결국 놈이 원하는 대로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간 명월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게 되었다. 거기다 팔꿈치를 잡히고, 다른 쪽 손목도 단단히 잡힌 채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잡힌 팔을 살피다가 명월은 고개를 들어 놈을 노려봤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인간 주제에 어떻게 날 알아본 것이냐.”
“보이는 걸 본 것뿐인데, 그에 대한 이유가 필요하냐.”
빈정거리는 말에 상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봐선 안 되는 걸 보고 있으니, 네놈도 결국엔 나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그 순간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독한 모멸감을 느낀 명월은 이를 악물곤 거칠게 내뱉었다.
“말조심해라. 난 인간이다.”
“그리 믿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넌 인간이 아닌 거다.”
그리 말하면서 그는 잡고 있던 명월의 팔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명월은 재차 놈에게 덤벼들거나 하진 않고 뒤로 물러섰다. 멀찍이 선 채로 매서운 시선을 던지는 명월을 두고 사내가 재차 말했다.
“인간도 아니고, 이쪽도 아닌 반푼이는 원래 제명에 살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그냥 죽게 하기엔 그 얼굴이 아깝군.”
들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일그러지는 명월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나의 것이 된다면 적어도 제명에 살 수 있도록 해 주마.”
“헛소리는 똥 누면서 하라고 하지 않았나? 이거나 먹어라. 이놈아.”
명월은 주먹을 쥐고는 위로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그것이 귀여워 보였던 것일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라보는 놈을 두고 명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인간이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썩 물러나라. 그게 아니면, 네놈이 여기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의 주범인 것이냐.”
“그렇다면 어찌할 거냐. 그 짤막한 검으로 날 없애기라도 할 것이냐.”
“그래. 원한다면 그리 해 주마.”
명월의 단호한 말에 놈은 하, 하고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짧았고, 그의 입을 타고 오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이리도 건방을 떠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숨어만 다녔나 보군. 그러니 이런 말을 처음 들어 보지.”
명월의 빈정거림에 사내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지금 이 말은 무척 기분 나쁘게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도 명월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저러다가 덤비면 이쪽도 가만히 있진 않을 셈이었다. 똑같이 달려들어서 묵사발을 내 줄 요량으로 손을 움켜쥐는 것에 맞춰서 놈이 고개를 들었다. 명월도 바람 속에 섞이는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정확히 말하면 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공기를 울리는 미묘한 파동이었다.
그냥 흘러 넘길 수 없는 미묘한 울림을 들은 명월은 등 뒤를 스치는 소름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내는 재차 명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꽤나 자신만만한 놈이니 얼마나 잘 싸우나 구경 좀 해 보지.”
그리 말한 놈이 몸을 돌려선 담 쪽으로 걸어갔다. 가볍게 몸을 날리나 싶더니 담 위에 올라서 털썩, 하고 걸터앉는다. 세운 무릎에 한쪽 팔을 올리는 걸 확인한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이, 하고 한마디 해 주려던 순간 공기 중의 파동이 멈추었다.
내내 느껴지던 게 갑자기 사라진 상황이 좋은 쪽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명월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다른 손으로 땋은 머리를 더듬었다.
땋아 내려진 머리 끝에 댕기가 제대로 매달려 있는 걸 확인한 명월은 끼익, 하고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로 몸을 돌렸다.
그래. 그간 죄 없는 낭자들을 데리고 간 소녀의 얼굴이나 확인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몸을 돌린 명월은, 막상 보이는 걸 확인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 자신이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굳은 채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뭐야.”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것은, 일단 여자의 옷을 입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옷은 커다란 몸에 억지로 둘러져선, 다 해지고 찢어진 데다가 뭔가 이상한 것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두 다리로 걷고는 있으나, 다리가 기묘한 형태로 꺾어져 있고 그건 팔도 마찬가지였다. 양 팔은 무척 길어서 늘어뜨려진 그것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굴은…….
대문이 작은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천천히 들어온 그것이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목이 몸통만치 긴 그것은 커다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흉측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얼굴에는 그저 눈과 코와 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간신히 붙어 있는 형태였고, 피부는 뱀의 껍질처럼 갈라져선 번들거렸다.
보는 순간 몸이 얼어버릴 만큼 끔찍한 형체였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서 보는 건데도 왜 이리도 잘 보이는 건가 싶어서, 자신의 좋은 눈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예전, 마을 사람들 때문에 희생을 당한 소녀의 원한이 깊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건만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암만 원한이 깊다 하더라도, 저런 상태로 변형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매년 억울하게 죽어 간 소녀들은,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한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그것’이 고개를 돌려 명월을 바라봤다.
정확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순간 본능적인 혐오와 거부감으로 인해 몸으로 힘이 들어간다. 표정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진 명월을 두고 놈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거기에 있구나.』
“……읏?!”
거의 동시에 긴 목을 앞으로 숙이면서 달려든다. 정확하게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모양이 보기에 끔찍할 수밖에 없었던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당장 방향을 틀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손에 단검을 쥐고 있지마는 생리적인 혐오 쪽이 너무 강해서 바로 덤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도망치는 명월을 본 장인 놈이 소리 내 웃는다.
귓가에 닿는 유쾌한 웃음에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비웃어라. 그것도 조금 있으면 바로 끝나게 될 거라며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목을 앞으로 길게 뺀 채로 양손을 앞으로 휘두르며 뒤를 쫓는 괴물 놈을 보고는 식겁했다. 너무 징그러워서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실제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자빠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앞으로 다리를 뻗어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뛰어 봤자 도망칠 곳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괜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징그러운 놈을 피해서 도망치는 자신의 이런 모습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봐 봤자 혼자서 뭘 하나 싶을 테니 말이다.
어느새 명월은 사당 근처를 한 바퀴 다 돌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느긋한 모습으로 담 위에 앉아 있는 놈이 보였다. 얼마나 더 뛸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양, 느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본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떤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절대로 저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다리에 힘을 줬다.
저 괴물을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해치워야 했다. 겉모습을 두고 평가를 내리고 싶진 않지만, 하는 행동만 보면 완전한 악이니 없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이 고을 안에서 두 다리 뻗고 마음 편히 자기는 다 글렀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뭔가가 치마를 붙잡았다.
“헉!”
마른 숨을 토해 내는 것과 동시에 치마와 함께 몸이 뒤로 당겨진다.
명월은 몸을 돌리면서 치마를 붙잡고 있는 놈의 손 위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 놈이 급히 손을 떨어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명월은 놈의 얼굴로도 단검을 휘둘렀다. 얼굴을 베는 날카로운 단검에 놈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소리를 질러댔다.
『크아아아아―!』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커다란 소리에 명월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고도 귀 안쪽이 저릿거린다. 아무래도 저놈이 토해 내는 소리에 어떤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싫은 듯 인상을 쓴 채로 노려보는 명월을 두고 놈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명월을 내려다봤다.
얼굴을 베어 버렸으니, 그걸로 분노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놈은 눈을 가늘게 휘며 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평범한 인간이 아니로구나.』
그리 말하는 놈의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 시선에 주시된 명월은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아무것도 못하는 것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보단, 너처럼 반항하는 것의 팔과 다리를 뜯어 내서 먹어치우는 것도 나름 별미겠지.』
거기까지 말한 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길게 찢어지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를 본 명월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동시에 놈이 움직였고, 명월도 피하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목이나 심장에 찔러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여의치가 않았다. 놈은 기다란 팔을 사용해서 명월이 접근할라치면 사전에 그걸 모두 막아냈다. 빠르게 움직이는 놈의 팔과 행동에 명월은 몇 번이나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러는 틈틈이 허점이 보이면 단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놈의 몸과 얼굴에 생기는 상처가 늘어났다.
피부가 베여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건 보통 인간과는 다른 거였다. 피도 아닌 이상한 점액질 액체가 질질 흘러나오는 걸 본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번 공격을 할 때마다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피곤해진다. 호흡이 가빠지는 명월과 다르게 놈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런 걸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건 허물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든지 벗고선 새로운 육체를 얻을 수 있지!』
“입 닥쳐라! 이 더러운 놈!”
『더럽다니! 더러운 건 너희 인간들이 아니더냐!』
명월이 내뱉은 말이 성미를 건드린 듯, 얼굴이 일그러진 놈이 앞으로 달려왔다. 지금까지는 장난을 친 거라는 양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놀란 명월이 바로 그 손에 단검을 박아 넣었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멱살이 잡힌 명월은 방 안쪽으로 던져졌다. 방심한 상태로 있다가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방 안으로 날아가면서 벽에 부딪쳤다가 아래로 떨어진 명월은 헛숨을 삼켰다. 그 후에 바로 터져 나오는 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기절할 것처럼 몸이 아팠지만, 이런 데서 늘어져 있을 순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 저세상 구경을 하게 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괴롭게 고개를 든 명월은 문짝이 날아간 문 안으로 반쯤 들어온 놈을 확인하곤 헛숨을 내뱉었다.
킬킬킬,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온 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인간들 때문에 내 터전이 더럽혀졌단 말이다. 그러니 그 죗값은 치러야지.』
“―죗값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비틀거리면서도 제 할 말을 한 명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똑바로 서선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들고 있던 단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다면서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친 명월은 고개를 들어선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놈을 노려봤다. 입 안으로 넘어오는 피를 삼킨 명월은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곧 죽을 놈이 그런 게 궁금하더냐.』
“곧 죽을 네놈이 불쌍해서 물어봐 주는 거니까, 대답이나 해라.”
당당한 명월의 모습에 놈은 재차 소리 내 웃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킬킬거리고 웃는데, 얼굴은 큰데다가 입술도 길게 찢어져 있어서 더 보기가 싫었다. 혐오스러운 걸 앞에 두고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명월을 본 놈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곳의 주인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은 잡귀일 뿐이야.”
코웃음을 친 명월은 신랄하게 말했다.
“인간에게 들러붙어서 음기를 빨아들이다가 점점 힘이 세진 거겠지. 잡귀가 인간에게 해를 가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긴 네놈은 다른 놈들과 어울릴 수 없었을 테고,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을 거다. 주변 눈치가 보이니 대놓고 인간을 해할 순 없고, 이런 식으로 1년에 한 번씩 내려와 아무 죄 없는 어린 영혼을 섭취했던 거겠지. 그리함으로 인해서 네놈의 정신은 점점 타락한 거겠고―. 내 말이 틀리냐?”
『……아니. 틀리지 않다.』
순순히 대답한 놈의 눈동자 안쪽으로 감탄의 기색이 서린다.
『처음에는 달콤하니 지금까지 하고는 다른 최상품의 먹이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로구나. 네놈은 그런 게 아니야. 조금 더 특별한 놈이로구나.』
그리 말한 놈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명월을 빤히 바라보나 싶던 놈의 눈동자 안쪽으로 감탄의 기색이 서린다. 설마, 싶은 양 눈을 가늘게 뜬 놈은 이윽고 희열을 드러내며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떴다. 그걸 본 명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렇게나 운이 좋을 수가! 네놈을 취해서 더 강해질 테다! 그래서 문밖에 있는 저 백호를 쓰러뜨려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야 말테다!』
달려드는 놈이 내뱉는 말 중에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백호(白虎). 바깥에 있는 저놈의 이름이 그것인가. 너무 정직한 이름이 아니던가. 단순히 하얀 호랑이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인 것 같았다.
명월은 오른손에 끼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면서 그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달려들던 놈은 명월의 손바닥을 보곤 크게 놀라며 멈추었다.
『그, 그건―!』
놀란 놈이 멈추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앞으로 오른손을 더 뻗었다.
그러자 놈은 기절할 것처럼 질색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오지 마라! 그걸 내게 내밀지 마! 저리로 가 버려라!』
고개를 저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러나는 놈을 확인한 명월은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손바닥은 앞으로 향해진 채였다.
이걸로 저놈을 무력하게 만든 후에 공격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빠르게 튀어나와 명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단단히 붙잡는 손아귀 힘에 놀란 명월은 눈을 크게 떴고, 언제 고통스러워했느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 된 놈이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당할 줄 알았더냐? 이 애송이놈!』
가늘게 휘어지는 눈을 본 명월은 순간적으로 실수했다 싶었다.
바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손이 잡힌 채로 그대로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바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에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크헉!”
목을 타고 피가 넘어오자 명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피를 삼키자마자 후회했다. 비릿한 게 다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역겨운 느낌이 든 거다.
고통스러운 양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흘리는 명월을 두고 놈은 당장 그 위로 올라탔다. 놈은 명월의 오른쪽 손바닥을 뚫어져라 보면서 눈을 가늘게 휘었다.
『이거, 이거, 내가 정말로 귀한 걸 발견했구나. 넌 분명히―』
기분 나쁠 정도로 기쁘게 웃어대던 놈이 갑자기 말하길 멈추었다.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있나 싶던 놈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가슴 가운데로 뭔가가 뚫고 나와 있었다. 그것이 단단히 부여잡은 건, 검은색으로 변색되고 썩어 버린 심장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을 쥐고 있는 건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 손바닥이 제 심장을 쥐고 있는 걸 확인한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게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손이 힘을 주어선 심장을 터트려 버렸고, 동시에 다른 손이 놈의 얼굴 가운데를 뚫고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끔찍하다 생각 되었던 얼굴을 관통하고 튀어나오는 손을 본 명월은 헛숨을 삼키며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고막을 두드리는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꽤 오랫동안 절규를 하던 소리가 차차 줄어드는 순간에 맞춰서 명월은 내내 참고 있었던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눈을 뜨고는 위를 올려다봤다.
그놈이 몸 위에 서 있었다. 허리 양 옆에 두 다리를 내린 채로 서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저놈의 가랑이 사이에 누워 있는 상태가 되었다. 아주 많이 불쾌한 기분이 듦을 느끼며 명월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굳어지는 명월의 얼굴을 보고도 놈은 태연했다.
명월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놈을 보다가 손을 확인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피가 묻어 있지 않을까. 언뜻 본, 얼굴을 관통하던 손을 떠올리자 속이 메슥거리면서 불쾌한 기분이 든다.
입을 다물고는 그걸 꾹 참으려 하자, 갑자기 놈이 쪼그리고 앉았다. 앉으니 더 가까워진다. 그것도 그렇지만, 놈이 자신의 배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것 같은 자세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명월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놈이 말했다.
“넌 지금 내 도움을 받은 거다.”
“…….”
네놈의 도움 같은 거 받은 기억이 없다―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대꾸할 수 없는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우습게 본 게 실수였던 거다. 원한이 깊은 낭자였다면 대화를 통해서 풀어 보려고 했는데, 어림도 없던 짓이었던 거다. 그제야 명월은 본인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까닥 잘못했으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왜?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 거냐.”
표정을 굳힌 명월은 고개를 들어 놈을 노려봤다.
매서운 시선을 확인한 놈의 미소가 한결 짙어진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얼굴이로군. 하지만 난 네게 도움을 줬고, 넌 그 보답을 해야만 한다.”
“……보답이라고?”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꼭 넌 내게 도움을 받은 거다, 라든가 은혜를 입은 거다, 등등의 말을 하곤 했다. 당시에는 반발심이 들어서 건성으로 흘려들었는데 어쩌면 그래선 안 되었던 걸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명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놈이 조금 더 고개를 숙여 왔다.
“그래. 내 도움을 받았으니, 그 대가를 어찌 치를 것이냐.”
“……네놈의 뒤를 쫓지 않겠다. 네놈이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딱히 네놈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테니, 그걸로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
명월로선 상당히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원래 계획은 그 괴물 같은 놈을 처리하고 난 후, 이놈의 뒤를 쫓을 셈이었다. 하지만 말대로 도움을 받았으니 당장 뒤쫓는 건 명월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뒤를 쫓지는 않을 테니, 그 전에 어딘가로 가 있거나 도망을 가라는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나름 많이 생각을 해 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놈의 입꼬리가 올라가나 싶더니 바로 쯧, 하고 혀를 찬다.
“이래서 인간이란…….”
기분 나쁜 억양의 말을 중얼거리나 싶던 놈이 바로 명월의 멱살을 붙잡았다.
갑자기 고개가 들린 명월은 당황해선 헛숨을 삼켰고, 당장 입술이 막혔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도 그렇지만, 두 번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크게 떠진다. 경악을 담은 시선을 보내도 놈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명월을 더 빤히 바라보면서 벌려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를 느끼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명월은 당장 이를 세웠다. 그걸 깨물기 전에 놈은 혀를 빼내곤 바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툭하면 깨물기부터 하니, 하는 짓은 영판 계집이로군.”
“잘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헛소리 하지 말라 하려던 순간 고개를 숙인 놈이 갑자기 뺨을 깨물었다.
콱, 하고 뺨을 가득히 물어오는 것에 명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얼했다. 그와 동시에 놈이 명월의 몸을 잡아서 뒤집었다.
조금 전에 그놈하고 겨루는 통에 등 쪽이 이상하게 된 건지 무척 아픈 상태였다. 그런 몸을 제멋대로 붙잡고 돌리니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읏―.”
나직한 신음을 토해 낸 후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신음을 저놈이 듣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옆으로 몸을 돌린 명월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놈은 손에 잡히는 옷을 벗겨 냈다. 갑자기 저고리가 당겨지는 느낌에 놀란 명월은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봤다.
대체 무얼 하는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 순간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뜨거운 눈빛과 부딪치게 되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선명한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놈은 계속해서 명월의 옷을 벗겨 냈다.
순식간에 속바지와 치마까지도 전부 벗겨졌다. 허리 아래쪽에 깔려 있던 치마를 죽죽 당겨서 벗겨 내는 통에 명월은 헛숨을 삼키면서 몸을 움츠렸다.
“뭘, 뭘 하는 거냐!”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치마를 완전히 벗겨 내려던 그는 지금 맨바닥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이건 그대로 둘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명월의 허리에 손을 댔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쓰윽, 쓰다듬는 순간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윽―!”
참아 보려 했지만, 역시나 아팠다. 찔끔 난 눈물을 매단 채로 고개를 돌리는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허리와 등을 더듬었다. 그 손이 닿을 때마다 저릿거리는 통증이 퍼진다. 무시하기엔 거슬리는 게 있었던 명월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힘없이 날아간 주먹은 당장 잡혔다.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손목이 잡혔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손목을 붙잡은 채로 이상한 짓을 하려 했던 놈을 떠올리는 순간,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혐오를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명월을 두고, 놈은 놀리듯 물었다.
“지금 내가 무섭나?”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식으로 참지 않아도 된다. 날 두려워하는 건, 인간으로선 당연한 것이니까.”
그리 속삭인 놈이 명월의 손가락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벌리고, 명월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하지만 놈의 날카로워 보이는 이가 손가락을 깨무는 걸 보는 순간 생리적인 거부감에 명월은 헛숨을 삼켰다. 그런 명월의 반응을 놓칠 수 없다는 양 뚫어지라 얼굴을 바라보면서 명월의 가운데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명월의 손바닥에 있는 문신과도 같은 문양을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흥미롭군.”
그는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선, 가죽 붕대를 집어 들고는 그걸 명월의 오른손에 끼워 주었다. 손바닥 안쪽으로 끼워져서는 살을 누르는 가죽의 감촉에도 명월은 여전히 굳은 눈빛을 보내올 뿐이었다.
그 눈빛을 주시하면서 놈이 손을 놓았고, 명월은 급히 오른손을 잡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느낌 탓이겠지만, 붙잡혀 있던 손목이 저릿거리면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은혜가 쌓이면 너만 고달파진다. 그러니 이쯤에서 한 번 회수하도록 하마. 고맙게 생각해라.”
뭘 고맙게 생각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채로 움직임이 없어진 명월을 두고 놈이 아래로 손을 뻗어왔다.
턱이 잡힌 채로 놈이 입술을 겹쳐 오려 할 때, 명월은 당장 이를 세웠다. 이번에야말로 아무 때나 입술을 비벼오는 놈의 혀를 잘라 내 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명월의 생각을 빤히 읽어 낼 수 있었던 놈은 소리 죽여 웃으면서 “조심해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다물린 명월의 입술을 깨물곤 아래로 내려갔다.
턱에 입술이 닿고 점점이 내려간 입술이 목젖을 깨물고 어깨에 닿았을 때 명월은 흠칫, 하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 반응에 명월을 보나 싶던 놈은 이윽고 태연하게 그의 팔을 깨물곤 손을 내렸다.
커다란 손이 가슴으로 내려와 피부를 쓰다듬는다. 놀란 명월은 당장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은 애초에 피부에 밀착된 상태였던 듯, 딱 붙은 채로 그 부근을 더듬었다. 그 손가락이 유두를 건드리는 순간 명월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이런 상태가 되어도 머릿속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면서 애써 부정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니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놈은 자신을 품으려 하고 있었다.
여자도 아닌, 사내인 자신을 말이다. 그것이 놈이 은혜를 회수하는 방식이던가.
강한 충격을 받은 명월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일, 저놈이 하려는 일을 믿을 수가 없어 얼어붙은 채로 있다가 옆으로 천천히 눈동자를 옮겼다. 바라보는 순간에 맞춰서 놈이 혀를 내밀어 어깨를 핥는다. 부드러웠던 혀가 까끌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명월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대체 무얼 하려는 거냐.”
“뭘 하려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냐.”
그리 말을 함과 동시에 놈의 손이 다리 사이로 내려왔다. 알몸이나 진배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손은 정확하게 명월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가 양물을 건드렸다. 긴장으로 쪼그라들어 있던 성기가 놈의 손길에 더 작게 움츠러든다. 덩달아 몸에도 힘을 준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외쳤다.
“당장 더러운 손 치워!”
“싫은데?”
가볍게 말한 놈은 명월의 성기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중간 부분을 잡아서 손가락으로 주무르자 명월은 재차 주먹을 휘두르려다가 말고 몸을 엎드렸다. 등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을 흘린 그는 간신히 엎드린 것에 성공해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완력의 차이가 있었기에 맨손으로는 놈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달리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야만 했다. 적당한 게 뭐가 있을까. 빠르게 주변을 살피던 명월의 눈에 저기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단검이 보였다.
저게 왜 저곳에 있는 거지.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걸로 당장 이놈을 갈가리 찢어 놓을 거라며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에 맞춰서 바로 허리가 잡혔고, 허리를 감싼 엄지로 힘이 들어갔다. 허리 가운데를 힘주어 누르자 명월은 몸을 떨면서 크게 입을 벌렸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팠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명월은 몸을 덜덜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아팠지만, 저놈에게 신음을 들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으려니 귓가로 놈의 입술이 닿는다.
“네놈의 허리와 등뼈가 다 나갔다. 이런 상태라면 반신불수가 될 거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고 싶은 거냐?”
“…….”
귓가에 닿는 나직한 속삭임에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네놈의 상태가 어떤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넌 인간도 아니고, 귀물도 아니지. 반푼이다. 숨죽이고 조용히 살고 싶어도, 사방에서 건드리려 드니 그것도 쉽지 않을 테고, 그런 놈들은 대부분 비명횡사를 당하곤 하지. 조금 전의 그 별 볼 일 없는 놈들에게 통째로 먹혀서 놈들의 양분 정도밖에 못 되는 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배설되겠지, 하고 덧붙인 후 놈이 웃었다. 그러곤 바로 명월의 턱을 잡아 왔다. 질색을 하며 고개를 털어서 손을 뿌리치려 하자, 더 세게 움켜쥐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한다.
명월의 귓가에 입술을 댄 채로 놈이 속삭였다.
“내 것이 된다면 조금 더 오래 살 수가 있다.”
명월의 눈동자가 굳는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침묵만을 하는 명월을 두고 놈의 손이 턱에서 떨어졌다.
“싫다면 여기서 손을 떼고 물러나마. 그렇다면 넌 평생 불구로 살게 될 것이다.”
얼굴을 지분거리던 손이 오른쪽 뺨을 건드린다. 미묘한 위치에 있는 점을 꾸욱 누르는 감촉에 명월은 뒤를 돌아봤다. 어깨에 턱을 댄 채로 있는 놈을 확인한 명월의 눈으로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차라리 불구로 살다 죽겠다. 그러니까 당장 내게서 떨어져.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저주를 내뱉듯이 이를 악물고 토해 내는 그 말에 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이내 이런 말을 들을 걸 예상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묵직함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명월은 이때다 싶어서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기다렸다는 듯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이었다. 입을 벌린 채로 꼼짝도 못 하는 동안 등 뒤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또 뭔가 싶었던 명월은 숨을 죽이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떨어지는 호랑이 가죽을 본 명월은 숨을 삼켰다. 저걸 왜 벗는 거지? 그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등 가운데를 눌렀다.
조금만 힘을 주면 허리가 두 동강 날지도 모른다.
불현듯 드는 생각에 명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있는 명월을 두고, 커다란 손이 계속해서 그의 등과 허리를 어루만졌다.
“그런 경험은 없는 모양이지?”
어떤 경험을 묻는 건지를 모르진 않았다. 지독한 모멸감을 느낀 명월이 이를 악물자, 재차 놈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허리가 잡혀선 위로 끌어 올려지고 명월은 소리를 질렀다. 아픔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지만, 엉덩이 사이에 닿는 이상한 걸 느끼곤 사색이 되었다.
“너에게 뼈와 살이 타는 쾌락의 극치를 알려 줄 테니까.”
명월이 앞으로 손을 뻗어선 바닥을 기어가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놈은 더 세게 하반신을 눌렀다. 입고 있는 옷 사이로 발기가 된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걸로 명월의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면서 놈이 긴 숨을 토해 냈다.
위험함이 감지되는 그 한숨에 명월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싫―, 당장 내게서 떨어져! 날 건드리지 마!”
애써 내뱉는 말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놈은 명월의 저항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그저 본인이 만지고 싶으면 건드리는 거다. 그런 식으로, 명월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고 혀를 내밀어 맛을 봤다. 허리와 등이 이상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커다란 손은 명월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 나갔다.
그 짧은 시간이 명월에겐 지옥처럼 여겨졌다.
정말로 그 짓을 당하는 건가 싶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몸속에서 뛰는 심장 박동이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손이 떨어지고,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피부가 정말 부드럽군. 손에 달라붙어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구나. 이러고도 용케 지금까지 때가 타지 않았어.”
난 운이 좋군, 하면서 중얼거린 놈은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짐승이 그르릉―거리면서 포만감을 드러내는 것 같았던지라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 소리가 싫었다.
고집스럽게 엎드려선 얼굴을 묻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청각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모든 잡음이 여과 없이 귓구멍을 통과해 왔다.
허리를 잡고는 목부터 엉덩이까지 쉴 새 없이 혀로 핥아대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선 좌우로 크게 벌렸다. 살이 한계까지 벌어진 틈으로 뜨끈한 입김이 닿는다 싶었을 때, 그곳으로까지 혀가 닿았다.
꺼끌한, 이상한 느낌을 주는 혀가 구멍과 주름의 개수를 확인하듯이 하나하나 핥아댔다. 이윽고 그 안쪽으로도 혀가 들어왔을 때 명월은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 하지 마. 날 건드리지 마.
몇 번이고 같은 소리를 냈지만, 놈은 무시로 일관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명월은 엎드린 채로 엉덩이만 높이 들려 있었다. 그 상태로 놈의 얼굴이 엉덩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그런 곳에 혀를 댈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으려니 혀와 함께 손가락도 밀고 들어왔다. 손가락이 몸을 벌리고 안쪽으로 들어와 주름진 곳을 하나하나 더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불쾌한 이물감을 느끼며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저어댔다.
이건 싫어. 안 돼.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이 빠져나가나 싶었을 때, 손가락하고는 또 다른 딱딱한 무언가가 그곳에 닿았다. 내벽을 벌리고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차디찬 액체를 느끼며 명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알 수가 없으니 두렵다. 명월은 급히 고개를 돌렸고, 뒤를 돌아보는 것에 맞추어서 커다란 몸이 뒤로 덮쳐왔다.
하아, 하고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을 느끼며 명월은 이를 악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가만히 있으려니 그 옆얼굴에 달라붙는 찐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내가 너에게 무얼 할 것 같은가.”
“……떨어져.”
간신히 입술을 열자 나오는 소리가 고작 이런 거였다.
떨어지라니. 이런 말을 듣고 순순히 움직일 놈이라면 애초에 이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가능한 즐기도록 해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이상한 뭔가가 그곳에 닿았다.
뜨겁고 단단한 그것이 자신을 누르는 순간 명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본능적으로 앞으로 자신의 몸에 벌어질 일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명월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고, 그만두라고 말하려던 순간, 밀고 들어왔다.
“……!”
좁은 살을 벌리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파고 들어왔다. 젖어 있던 입구가 좁혀지면서 더한 침입을 막으려 들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가 계속해서 파고들어 왔다. 점점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뜨겁고 단단한 물건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명월은 당장 이게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진다. 하반신이 갈라지고, 그 틈을 파고 들어와 끝까지 밀려오는 걸 알면서도 이게 대체 뭔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배를 감싸고, 다른 손이 어깨를 붙잡는다. 앞으로 밀려가는 명월의 몸을 단단히 잡은 채로, 뒤로 당겨서 계속해서 그 흉물을 넣고자 했다.
배 속을 채우다 못해서 목구멍 바로 앞까지 넘어올 것 같은 불쾌한 이물감에 명월의 입이 열렸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헐떡거림을 들으면서, 명월은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비명 같기도 했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었다.
이게 뭐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크게 떠진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습기가 차오른다.
가득히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명월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멍하니 있던 명월은 고개를 숙였다. 차디찬 바닥에 이마를 누른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은 죽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다. 그때 뜨거운 입술이 어깨에 닿았다. 그 입술이 턱과 귀에도 닿았다가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 명월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게 느껴진 것일까. 앞으로 넘어온 단단히 팔이 명월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프냐.”
“…….”
“곧 기분이 좋아질 거다.”
귀 안쪽이 시끄러워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명월은 입을 다문 채로 턱에 힘을 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강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그런 명월의 배 안쪽을 슬슬 문질렀다. 날씬한 배가 안쪽으로 뭔가를 품고 있어서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전체적으로 쓰다듬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느낌을 기억해라.”
크게 떠진 명월의 눈가가 파르르, 하고 떨린다.
“너와 하고 있는 상대를 기억해. 너에게 이걸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일 거다.”
개 짓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명월은 어금니를 악물었고, 그가 명월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가득히 박혀 있던 물건이 빠져나오고, 그 느낌에 명월의 허리가 잔 경련을 일으켰다. 강하게 죄이는 맛에 등 뒤에서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반쯤 뽑힌 성기가 재차 파고들어 왔다. 엉덩이가 크게 벌어지면서 주름이 한계까지 늘어난다.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참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꽂아 들어오는 감각에 명월의 입술을 타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그만……읏, 아, 아파.”
약하게 아픔을 호소하는 말에 배를 감싸는 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원래 처음에는 불편한 법이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과 동시에 성기가 빠듯하게 밀고 들어온다. 빠져나갈 때, 아래가 들어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명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이마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를 악문 채로 막힌 신음을 흘리기만 하는 명월의 허벅지가 떨리는 걸 느끼면서 사내가 재차 속삭였다.
“아픈 게 아니다. 그러니까 몸에 힘을 주지 말고 날 받아들이려 해 봐라. 자, 점점 더 안쪽이 뜨거워지지?”
그리 말하면서 커다란 손이 가슴으로 내려와 그 주변을 주물렀다.
쓸데없는 곳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명월의 온 신경은 아래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사내는 제 물건을 끝까지 밀어 넣은 채로 느리게 흔들었다.
“간지러운 부분이 있을 거다. 거길 말해 봐라. 그러면 내가 긁어 주마.”
그리 말하면서 조금 더 허리를 추어올린다.
가뜩이나 가득 들어와 있는데 왜 더 밀고 들어오는 건가 싶었던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성기를 품고 있는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거부감에 명월은 고개를 숙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당하고 있는 일을 인정할 수 없어, 그걸 피하고픈 마음에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하는 명월이었지만, 그는 지금 허리를 제대로 세우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도 등에서의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건, 몸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커다란 성기뿐이었다.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는 명월을 내려다보면서 사내는 재차 허리를 추어올렸다. 내벽이 성기를 죄이고, 배가 꿀렁거린다. 반쯤 빼낸 성기를 밀어 넣자 명월이 헛구역질을 한다. 힘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사내는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내려와서 명월의 움츠러든 성기를 쥐었다. 그러자 명월이 신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읏!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정말 그리할 리가 없었다. 사내는 더 세게 명월의 성기를 잡은 채로 하반신을 흔들었다. 양팔을 교차해서 얼굴 앞에 댄 채로 있었던 명월은 힘겹게 아래로 한쪽 손을 내렸다. 손톱을 세워서 성기를 쥐고 있는 손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더 세게 몸을 흔든다.
아까와 달리 조금 더 많이 빼낸 성기가 한 번에 박혀오자, 명월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아, 아앗!”
막을 새도 없이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몸 안쪽을 두들겨 맞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퍼졌다. 지금 자신의 몸이, 사내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눈 아래쪽이 시큰거린다.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억누른 채로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흐―윽!”
최대한 신음을 참아 보려 하지만, 그때 거대한 성기가 더 세게 마찰을 하며 밀고 들어왔다. 퍽퍽, 하고 둔중한 소리가 울릴 정도로 연속으로 박아대자 명월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성기를 쥐고 있는 사내의 손을 떨어뜨리려 해 봤지만, 결국 실패해서 그걸 피하려 앞으로 기어가려 해도 더욱더 집요하게 쫓아왔다. 연신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뜨거움에 명월은 눈물을 흘리면서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 냈다.
헐떡거리면서 몸에 힘을 준 채로 파들파들 떨기만 하는 모습에 재차 사내가 긴 한숨을 흘렸다. 만족이 섞인 소리를 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뜨겁군.”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파고드는 성기가 너무 뜨거워서, 닿은 모든 부분이 데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뜨거움은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켜서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처음에는 분명 몸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통증뿐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비벼 오자 아픔은 옅어지고, 그 사이로 다른 뭔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움찔거리면서 죄여 오는 내벽을 느끼며 사내는 눈을 감았다.
“하아―.”
긴 한숨과 동시에 그는 명월의 허리를 단단히 쥐었다.
엉덩이만 높이 든 채로 결합을 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난잡한 것이었다.
명월의 주름은 거대한 성기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한계까지 벌어져 있었다. 처음인 행위가 무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사내의 눈에 곧게 뻗어진 명월의 등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게 눈을 찌르자 사내는 혀를 찼다. 그리고 이를 악문 그는 끝까지 빼낸 성기를 깊숙이 넣었다. 안은 여전히 좁았고, 성기가 녹아들 정도로 뜨거웠다. 부드럽고 연약한 살이 힘겹게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에 사내는 눈을 감고는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허리 짓은 점점 주체를 못하고 속도가 붙었다. 그것에 맞춰서 명월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하아, 하앗―! 아, 응!”
찔려서 흔들리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명월의 눈동자는 이미 반쯤 풀린 채였다. 동시에 안을 부욱 긁어 올리자, 거기서 뜨거운 뭔가가 퍼져 갔다. 오금이 저리면서 소변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뭔가 싶었던 명월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허리를 잡은 손으로 더 힘이 들어가고, 허리 짓이 빨라진다.
뜨거운 성기가 기세 좋게 출입하면서, 접합부에서 울리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성대하게 울려 퍼졌다. 추잡하다 할 수 있는 그 음향에 섞여서 명월의 신음이 찐득거리는 것으로 변했다.
바닥에 손톱을 세운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명월을 억누른 그는 성기를 욕심껏 밀어 넣으며 이를 악물었다.
“크윽―!”
성기를 감싸는 내벽이 요동을 친다. 그것에 이끌려 사정할 뻔했던 그는 명월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채로 더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안 그래도 한계까지 벌어진 몸을 가르고 빠르게 출입하는 불기둥에 명월은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아아악! 하윽! 아! 아! 아, 그, 그만―!”
입으로는 그만하라 하지만, 몸은 그게 아니었다.
경련을 일으키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명월을 억누르며 사내는 허리를 한껏 휘둘렀다. 명월의 신음은 비명이 되고, 낯선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이 요동을 쳤다.
몸이 뜨거웠다. 미칠 것처럼 달아오른다. 그것이 뇌까지 치밀어 오르면서 명월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쯤 되자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상해져 버릴지도 몰라―.
그리 생각을 하면서 명월은 크게 눈을 치떴다.
그에 맞춰서 끝까지 제 성기를 밀어 넣은 사내가 기세 좋게 분출했다.
“……!”
몸 안쪽을 세게 두드리는 뜨거운 물줄기를 느끼며 명월의 몸이 파들거리면서 떨렸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피하려 했지만, 아래는 떨어질 수 없다는 양 단단하게 연결된 채였다.
도망칠 수 없었다. 명월은 몸 안쪽에 뿌려지는 정액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계속되는 분출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사정을 해서 전부를 토해 낸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입을 벌리자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건 명월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위로 들고 있던 엉덩이가 놓여서 완전히 바닥에 눕혀졌다. 바닥에 달라붙은 명월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있는 얼굴 앞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온다.
몸이, 몸속이 울린다. 둥둥둥, 거리면서 마치 북이 치는 것 같았다. 심장도 미친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간 터져 버리고 말 거야.
커다란 손이 내려와 명월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잡아 위로 쓸어 올렸다. 그 손이 뺨에 닿는 순간 명월의 몸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직 몸속에 꽂혀 있는 물건이 신경 쓰여서 바로 힘을 뺐다.
차분하게 있자 싶으면서도 자꾸만 그곳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신경 쓰여서 명월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는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수축해 있던 내벽이 성기를 마지막까지 감싸 준다. 아쉬움을 남긴 채로 성기를 빼내자, 벌려진 주름 사이로 하얀 정액이 흘러나온다. 마찰로 불긋해진 엉덩이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보다가 그쪽으로 손을 내렸다. 엉덩이를 잡고 엄지로 주름을 누르자 더 많은 정액이 흘러나왔다.
꽤나 많이 싸대서 배 속에 품지 못하는 게 전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걸 보는 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엄지를 밀어 넣으려 하는 순간, 바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져.”
딴에는 꽤 참고서 내뱉는 말이다.
이쪽은 보고 싶지도 않다는 양 아까부터 내내 얼굴을 방바닥에 묻고 있는 걸 본 사내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그는 엉덩이를 놓고는 명월의 어깨를 붙잡아서 그 몸을 돌렸다. 갑자기 몸이 돌려지는 느낌에 명월은 힘을 주고 버텨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똑바로 누운 상태가 되어선 안색을 굳힌 채로 올라타 있는 놈을 노려봤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이상하게도 놈의 두 눈동자는 똑똑히 확인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은빛 눈동자였다. 흰자위하고 구분이 되지 않으면 그냥 눈이 하얗게만 보여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명월의 눈에는 그 경계가 구분되었다.
정말은 꽤나 예쁜 눈이었다. 그렇다 해서 그 눈을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던 명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서 떨어져―.”
“이걸로 끝일 거라고 생각한 거냐?”
“……뭐?”
이해가 되지 않는 양, 일그러지는 명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려 명월의 유두를 잡아 비틀었다. 찌릿, 하고 아플 정도로 세게 비트는 것에 명월은 헛숨을 삼키면서 급히 양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간 손이 명월의 성기를 잡았다.
“사정했나 보군.”
“읏?!”
콱, 하고 성기를 잡아서 위로 당기는 것에 명월은 당장 다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허리가 빠진 것마냥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실제로 위로 올린 다리는 다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명월은 사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영영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는 말, 말이다.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명월을 본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네 몸 상태는 온전한 게 아니다. 그러니 조금 더 즐겨야지.”
명월의 성기를 놓은 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명월의 다리를 벌리려 하자 바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저항은 우습다는 듯, 너무도 쉽게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은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짐승처럼 예리한 눈동자가 주시해 온다. 그 순간 명월은 숨을 삼키긴 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표정이 없는 명월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듯했다.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경직된 얼굴을 본 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렇게 긴장하고 살면, 피곤하지 않나?”
“…….”
빈정거리는 것 같지만, 정말은 가슴에 와서 박히는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명월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 순간 놈은 명월의 손을 잡아채선 아래로 내렸다.
“뭐, 뭘 하려는 거야!”
놈은 명월의 손을 잡아 제 몸에 댔다. 이미 아래가 뚫려 버린 마당이니, 놈이 뭔 짓을 해도 반응하지 말자 싶으면서도 건드리면 예민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악스러운 일은 그다음에 이어졌다. 놈은 명월의 손을 잡아 제 성기를 만지도록 했다. 처음에는 더럽다고 생각하던 명월이지만, 이윽고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 자신이 대체 뭘 만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놈의 거시기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소변을 보려고 꺼내던 제 성기하고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게 대체 뭔가. 이게 양물인가, 아니면 몽둥이인가
그제야 명월은 이놈이 들어왔을 때, 왜 그리도 엉덩이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는지,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놈이 다리 사이에 팔을 하나 더 달고 있었던 거로구나. 그런 걸로 그리도 무식하게 움직였던 건가. 그보다, 이런 게 들어왔는데도 내 몸은 정말 괜찮은 걸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드는 명월에 맞춰서 놈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지금 그 얼굴 좋군. 바로 섰어.”
그 말과 동시에 놈은 명월의 손을 놓아주었다. 당장 다리를 벌리고 아래로 제 성기를 밀어 넣으려 하는 것에 맞춰서 명월은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했다.
아무것도 모르면 모를까, 알게 된 마당엔 순순히 당할 순 없었다.
저런 걸 받아들이면 다른 의미의 반신불수가 될 거라며 사색이 된 명월은 다시 한 번 달라붙어 오는 놈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명월 쪽으로 고개를 숙인 놈은 암만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주름에 놈의 귀두가 닿고, 그대로 아래가 뚫렸다.
“아윽―!!”
앞서 행위를 했고, 진득하게 정액을 뿌려 두었다고 해서 두 번째 행위가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픔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아까 놈의 성기를 손으로 잡아 봤기 때문에 더더욱 억울했다.
그런 물건이 지금 배 속 끝까지 파고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자 오금이 저린다. 다리를 제대로 오므리지도 못한 채로 있으려니 놈이 고개를 숙여 왔다. 명월의 코앞으로 얼굴을 내민 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에 혀를 깨물거나 하면, 네 몸에다 백 번을 쌀 거다.”
움찔한 명월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시야가 흐릿하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런 명월을 내려다보던 놈은 혀를 내밀어선 오른쪽 뺨 가운데에 있는 점을 핥았다.
앞서 깨물었기 때문에 재차 그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긴장하고 있었던 명월은 혀로만 뺨을 핥는 걸 느끼곤 막힌 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 게 아니었다.
놈이 허리를 추어올리자, 몸속이 징―하고 울린다.묵직한 타격감에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놈은 명월의 턱을 잡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래가 다 헤집어져서 망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즐겨라. 이 세우지 말고. 난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니, 잘 생각해서 행동해야 할 거다.”
흔들리는 동안에도 놈이 하는 말은 똑똑히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당장 반발심이 드는 걸 억누르면서 명월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더 세게 몸이 흔들리고, 입술이 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놈이 바로 입술을 덮쳐 왔다. 크게 입을 벌려선 먹어치울 것처럼 입술을 눌러대는 것에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를 세워서 확 깨물어 혀를 잘라 내려 했지만, 놈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서 더 이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있는 동안 몸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 * *
거적을 몸에 두른 할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났다. 그런 주제에 저잣거리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선 뭐가 있는 것처럼 돌을 굴리면서 점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할멈의 지저분한 행색에 무시하고 지나치다가 몇몇 이들이 점을 보고 난 후, 꽤나 용했던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월도 동무들과 함께 그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때 돌을 바닥에 굴리던 할멈이 갑자기 손을 들어선 명월을 가리켰다.
‘커다란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구먼.’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명월의 귀엔 똑똑히 들어왔다.
그때가 16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자신을 억누르며 생활을 해 왔기에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이들도 생기고, 그 무리 안에서 별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리고 있던 마당이었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들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잘 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는 게 이상했던지, 왜 그러냐고 친구가 묻는 말에 명월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친구들도 있으니 일단은 그 자리를 지나쳐 갔지만, 저녁 즈음 명월은 혼자서 그곳을 찾았다.
할멈은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한 안색을 한 채로 색색거리며 고른 호흡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자니 일부러 건드려선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쳐 갈까. 그리 생각하며 눈을 굴리려니 갑자기 할멈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명월은 움찔했다. 한눈에 보일 정도로 표정이 굳어 있는 명월을 확인한 할멈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웃는 그 얼굴을 확인한 명월은 마른침을 삼키곤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까 낮에 내게 한 말을 기억하시오?’
‘기억하다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기억할 게 아니라, 네놈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할멈의 거침없는 말에 명월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마음에 들지 않아 안색을 굳히는 그였지만, 할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놈의 사주는 아주 복잡하구나.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고, 넌 대체 무어냐.’
명월의 표정이 더 굳어졌지만, 할멈의 말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나 죽었소, 하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차면 여기저기서 건드릴 상이니 그것도 어렵겠고. 개를 피하다간 살(殺)을 당할 테고……. 어렵구나. 어려워.’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자신은 아직 신체 건강하고,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살을 당할 이유도 없었다. 나름 조심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할멈은 사기꾼인 걸지도 모른다. 무시해도 될 말을 괜히 귀담아들은 게 아닌가 싶었던 명월은 기분 나쁨을 감추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몸을 돌리곤 자리를 피하려 하는 명월의 등 뒤로 할멈이 재차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위험한 것들이 꼬이게 생겼다. 그런 게 싫거든, 차라리 개에게 물려서 그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라고 말이다.
천천히 눈을 뜬 명월은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얼굴인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에 이상한 게 뭉쳐서 묻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입술은 죄다 물어뜯기고 오른쪽 뺨에도 물린 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에, 눈 아래가 퀭하니 들어가 있어서 마치 병자 같기도 했다. 실제로도 너무 시달려서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상태였다.
명월은 지금 자신이 몸도 머릿속도 엉망인 상태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뭘 어찌해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를 크게 벌린 채로, 말도 안 되는 흉기가 몸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몸속 내장이 전부 밀려 올라오는 감각에 소리를 지르는 동안 몸이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경직되어선 옴짝달싹 못하는 동안, 그런 몸을 꽉 붙잡힌 채로 뜨거운 흉기가 몸속을 날뛰고, 몇 번이고 데일 것 같은 액을 뿌려댔다. 그 액으로 몸속과 몸 바깥이 전부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몸이 기이하게 확장되어선 정신을 잃을 것처럼 흔들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실제로 몸속엔 아직도 무언가가 박혀 있는 듯한 이물감이 들었다. 그런 불편한 감각을 왜 자신이 느껴야 하는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
몽롱하게 풀려 있던 명월의 눈동자 안쪽으로 힘이 들어간다.
이를 악물려 하자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 망할 놈이 억지로 입을 벌리고 혀를 빨아들이고 여기저기를 핥아대서 이런 거였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 그놈의 혀가 꺼끌해지면서, 몸에 닿은 모든 부분이 따끔거렸다.
아프다고, 싫다고, 밀어내도 놈은 계속 달라붙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토해 내면서 마지막은 헐떡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눈을 감은 채로 열중해서 거세게 몸을 밀어붙이던 걸 떠올리며 명월은 이를 갈았다.
“……망할 놈.”
개 같은 놈.
지금껏 내내 기억나지 않던, 점쟁이 할멈과의 일이 떠올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꾼 거였지만, 그런 꿈을 꾼 건 전적으로 그놈 때문이었다.
그래. 그놈이 바로 개였던 거야. 자신은 커다란 개에게 물린 거야.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개를 붙잡아서 가죽을 홀라당 벗겨 버릴 터였다.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걸,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해 줄 거라며 명월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윽―.”
조금 움직인 것뿐인데도, 몸이 갈라질 것 같은 강한 통증을 느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간신히 앉는 것에 성공한 명월은, 양팔로 배를 끌어안은 채,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곤 인상을 쓴 채로 본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
보는 순간 숨이 막혀 온다. 그 정도로 엉망이었다.
벌려진 다리 사이론 이상한 점액질 액체가 달라붙어 있고, 피 같은 것도 좀 묻어 있었다. 거기다 허벅지 안쪽과 허리, 발목 등에는 손자국 같은 멍도 남아 있었다. 그건 손목과 팔도 마찬가지였고, 가슴은……마치 물어뜯어 버리고 말겠다는 양 잇자국과 멍투성이였다.
앞쪽만 이런데, 전신은 오죽하겠는가. 자세히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 인간이 아닌 놈에게, 당해 버린 거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 명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을 벌리자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와 성교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자하고―.
아니, 이런 자신이기 때문에 그런 놈하고 하게 된 게 아닐까.
애초에 평범하지 않은 자신이니까.
바로 그때 사또,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부름에 놀란 명월은 주변에 있던 치마를 잡아서 몸에 둘렀다. 당황스러우니까 몸이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천을 몸에 둘러서 감추어 버린 명월은 바깥으로 굳은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재차 사또, 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또, 어째서 대답이 없으십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묻는 복운의 목소리에 섞인 걱정을 느낄 수 있었던 명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모습을 복운에게 보일 순 없었다. 하지만 문 바깥에 서 있는 것인지 닫힌 문이 덜컹거리면서 흔들리는 게 보였다. 명월은 치마로 더 열심히 몸을 가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어디 몸을 숨길 장소가 없을까 싶었으나, 당장 보이는 건 없었다. 문짝은 날아가 버렸고, 지금 앉아 있는 방 안은 엉망인 상태였다.
그 빌어먹을 놈. 가기 전에 간다고 말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이를 갈던 명월은 재차 덜컹, 하고 흔들리는 문을 보고는 다급히 외쳤다.
“열지 마라!”
일단 소리를 내긴 했지만, 목소리가 이상했다. 끝이 갈라졌고 그렇게 큰소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내뱉듯 말하고 나니, 목구멍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괜히 소리를 질렀다. 그런 후회를 하고 있는데 복운이 재차 물었다.
“사또, 괜찮으십니까?”
마른침을 삼킨 명월은 바로 대답했다.
“그래. 괜찮다. 괜찮으니―.”
물러나 있으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혼자서 수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복운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던 명월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그러곤 근처에 흩어져 있던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죄 찢어져서 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런 건 다시 입더라도 몸을 가려 주진 못할 거다.
찢어진 옷에 드문드문 묻어 있는 이상한 얼룩을 본 명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불현듯,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하게 여겨져서 한숨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어쩌자고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겼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가슴이 답답해진 명월은 옷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 때에 맞춰서 재차 “사또?”라는 복운의 부름이 들렸다. 유난스러워도 가장 충성스러운 놈이었다. 여기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복운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명월은 눈을 감고는 재차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을 때, 명월은 복운아―하고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