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
고개를 든 아진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석주가 유달리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웃음. 아픔도 걱정도 없는 이만 지을 수 있는 웃음. 세상이 다 화사해지는 것 같은 웃음.
석주가 아진의 눈가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아진이 그런 석주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형, 나 지금 행복해요.”
“……그래.”
“무지 행복해요.”
“……그래.”
석주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문장으로 또렷이 전해지는 그의 감정이 참으로 감사했다. 아진이 이렇게 자신의 행복을 말해 줄 때면, 주책맞게 콧잔등이 뜨끈해졌다. 시체처럼 차게 식어 있던 몸뚱이가 영혼을 되찾은 듯 명치 언저리부터 온화한 열기가 퍼져 나가기도 했다.
석주가 고르게 숨을 내쉬며 아진의 행복을 만끽하는데. 아진이 물었다.
“형도 행복하죠?”
석주는 고민일랑 없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행복한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리가.”
그건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었다. 단호한 석주의 대답에 아진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무엇 때문인지 천천히 웃음을 사그라트렸다. 석주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 변화를 코앞에서 목도한 석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머리를 숙이며 아진과 눈을 맞추려는데. 아진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석주를 불렀다.
“형.”
“응?”
“우리는 다음 생에도 함께할까요?”
“당연하지.”
생각일랑 하지 않고 나온 대답에,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대답에 아진이 피식 실소했다.
“뭐야……. 어떻게 확신해요.”
“이번 생에도 이렇게 만났는데 다음 생에 못 만날 이유가 없잖아.”
“…….”
“내가 찾아갈게. 네가 어디에 있어도 갈게.”
석주가 아진의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조곤조곤 멋진 목소리로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너보다 동생으로 태어나서, 네가 형 하기로 했잖아.”
그 말에 아진이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기로 했었지. 잠깐 잊고 있었다. 아진이 자신의 손안에 오롯이 맺힌 석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좋아요. 그럼 다음 생에는요.”
“응.”
“흉터 같은 거 만들지 마요.”
그 말에 석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순간, 여러 가지 가정들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 갔으나 그런 불결한 것들을 감히 아진의 앞에 꺼내 놓을 순 없었다.
목구멍에 걸린 묵직한 무언가를 꿀꺽 삼킨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
“나도 노력할게요. 형이 날 보호하다가 피를 흘릴 필요 없도록. 그리고 이렇게 쓸데없이 다치지 않도록.”
아진이 검지를 들어 보였다. 하얀 검지 옆구리에 실처럼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어제, 아진이 책을 읽다가 벤 거였다. 이제 밴드를 붙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상처가 연하게 남아 있었다.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 손가락에다 키스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
네가 다치는 건 끔찍이도 싫으니까.
“…….”
아진이 석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석주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에게 안겼다. 석주가 늘씬한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는데 욕조에 담긴 물이 출렁거리며 요동쳤다. 그리고 그 물결이 잔잔해질 때쯤. 아진이 석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 생에는요.”
“응.”
“둘 다 적당히 평범해서 다치지도 않고, 큰 불행도 없으면 좋겠어요.”
“…….”
“많이 울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자. 내가 노력할게.”
석주는 가슴이 아팠다. 아진에겐 이번 생도 괴로웠구나 싶어서. 하긴 많이 울었다. 크고 작은 불행에 앓기도 많이 앓았다. 석주가 아진 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아진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또, 형한테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화들짝 놀란 석주가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진아, 나는 너만 있어도 충분해. 그런 거 필요 없어.”
어떻게 보면 자비로운 말이나, 석주는 그게 썩 반갑게 들리지 않았다. 혹 아진이 저와 거리를 두려는 건가 싶었다. 신경 쏟을 다른 부분을 만들어 떨어트리려는 게 아닌가, 제가 지나치게 곁을 서성거려서 질리기라도 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근데 아진이 비싯 웃으며 석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형이 전생을 잊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생에 다 갚고 다음 생에는 홀가분하게 살아요.”
“하지만-”
“그렇게 해요.”
“……아진아.”
석주는 혼란스러웠다. 아진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말만 떼어 놓고 보면 좋은 얘기지만, 석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제게 채워진 족쇄가 끊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족쇄는 아진과 연결된 것이란 말이다. 석주에게는 족쇄임과 동시에 목숨줄이었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돌았다. 어깨가 볼품없이 떨렸다. 더 있으면 이도 딱딱 부딪힐 것 같았다.
석주가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아래로 아래로 떨어트리는데. 아진이 석주의 뺨을 감싸 올렸다. 그리고 지그시 시선을 맞춘 채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행복해서 형이 행복하댔죠.”
“응.”
석주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턱을 주억였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아진이 저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저를 긍휼히 여겨 옆자리를 허락해 주었으면 했다.
석주가 정말이야, 네가 있어야 해. 나는 네가 필요해, 라고 애원 섞인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아진이 석주의 입술 전체를 촉 빨았다가 놨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나도 그래요.”
“…….”
“나도 형이 행복하면, 행복해요.”
“…….”
“그러니까 형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날 위해서.”
단호한 목소리였다.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증발했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게, 처음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은 신자 같았다. 가만히 있던 석주가 더듬더듬 아진의 말을 따라 했다.
“널…… 위해서.”
“그래요. 날 위해서.”
석주를 껴안은 아진이 그의 넓은 등을 슥슥 문질렀다. 토닥토닥 두드리기도 했다. 놀랐던 석주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라도 하듯이.
석주는 그 따뜻한 체온과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너는 대체.
너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나를 구원하려는 걸까.
매 순간 네 미소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역겨운 껍데기들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는 기분인데. 그런 해방감을 느끼는 게 죄스러워 부러 과거를 되뇌며 사는 나인데. 그걸 잊으라고. 잊고 또 다른 행복을 찾으라고. 널 옆에 둔 채 더 큰 행복을 추구하라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내 목을 조르며 절대 벗어나지 말라고, 항상 네 발밑에서 복종하라고 나를 짓밟아도 나는 사무치게 행복할 텐데.
너는 어떻게, 대체 어떻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석주가 아진의 고운 어깨에 눈을 묻었다. 눈두덩이 뜨끈뜨끈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뭐가 자꾸 치받았다. 석주는 그것을 꾸역꾸역 삼키다, 억눌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럴게.”
행복할게.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 * *
석주와 아진은 이른 아침 별장을 나섰다. 이렇게 일찍 나올 계획은 아니었는데 하는 것 없이 뒹굴거리기만 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저절로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두 사람은 새벽에 물든 세상이 파르스름할 때 가볍게 아침을 챙겨 먹고, 차도 한잔하고, 옷을 꼭꼭 껴입은 채 바깥으로 나왔다. 석주의 손에는 묵직한 종이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걸어서 이제 앞마당처럼 익숙한 숲으로 향했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이 온통 하얬다. 두툼하게 쌓인 눈이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보다 일찍 나온 터라 직원들이 미처 눈을 쓸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석주도 아진도 불평하지 않았다. 폭신한 눈 위로 발이 푹푹 빠지는 게 마냥 즐거웠기 때문이다.
마치 방금 탄생한 세계에 처음으로 방문한 여행객이 된 기분이었다. 뺨을 스치는 찬기는 싱그러웠고,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짐승들의 발소리, 울음소리 같은 것도 신비로웠다.
아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으며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석주는 그의 손을 맞잡은 채 그 말을 하나하나 소중히 들었다. 그러다 잇새로 뿜어지는 입김이 더 짙어졌을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진의 몸뚱이만 한 분수가 맑은 물을 퐁퐁 퍼 올리고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분수였는데, 1층은 바닥에 딱 붙어 토끼 같은 동물들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고, 2층은 높이가 제법 되어 새들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진의 할아버지가 숲 곳곳에 설치한 건데 여태까지도 계절 상관없이 부지런히 돌아갔다.
석주가 종이 가방에서 호두를 비롯한 견과류를 꺼내 봉지를 뜯었다. 아진은 그것을 한 줌 한 줌 분수 틈틈이 쌓아 두었다. 그러다 물로 굴러떨어지면 에이, 하며 주워 옷에다 북북 닦고 다시 올려 두었다.
그렇게 2층 분수대에 견과류를 한 아름 쌓고는, 1층에도 뿌리기 시작했다. 청설모가 다리를 다쳐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라는 이유를 대면서.
아진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신중하게 견과류를 쌓았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윗입술이 새 부리처럼 삐죽 나오기까지 했다.
석주는 그런 아진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딱히 도와주고 말고 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사실 지나치게 진지한 아진이 너무 귀여워 이 순간을 최대한 길게 늘이고 싶었다.
석주가 비죽비죽 치미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무는데. 별안간 아진이 홱 석주를 쳐다봤다.
“청설모도 먹고, 참새도 먹고 그러겠죠?”
“응, 그럴 거야.”
“토끼도 먹을까요? 당근 같은 것도 챙길 걸 그랬어요.”
“그건 나중에 직원들한테 부탁하자.”
“좋아요.”
아진이 얼마 남지 않은 견과류를 분수와 조금 동떨어진 곳에 와르르 쏟아부었다. ‘물은 안 먹고 싶고, 배만 고플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물에 닿으면 춥잖아.’ 하는 이유였다.
석주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진의 손을 털어 주었다.
그렇게 오늘의 유일한 일과가 끝났다. 뿌듯한 얼굴로 분수대를 보던 아진이 등을 돌렸다.
“가요.”
미련일랑 없어 보이는 행동에 석주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가 큰 보폭으로 얼른 아진을 따라잡았다.
“아쉽진 않아?”
“뭐가 아쉬워요.”
“돌아가기가.”
오늘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가가- 아니 짧았다. 고작 일주일이었으니까. 일주일은 무슨, 7개월은 물론이거니와 7년도 있을 수 있는데. 석주가 역시 아진을 데리고 산기슭으로 숨어들어야-까지 생각하는데.
아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형이랑 같이 돌아가잖아요.”
“…….”
“돌아가서도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근데 뭐가 아쉬워.”
“……그건 그래.”
맞는 말이었다. 돌아가서도 같이 살고,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럴 텐데 아쉬울 게 무어가 있겠나. 환경이 어떻게 바뀌어도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확고했다.
새삼 그 사실이 어찌나 행복한지. 석주가 크게 미소 지었다. 아이처럼 들떠서는 아진의 손을 슥슥 앞뒤로 흔들게 됐다. 오전에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추라도 달린 듯 묵직했는데. 지금은 그와 함께 이루어 갈 하루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아진에게 구원받았다.
석주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아진의 따뜻한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는데. 아진이 꾹꾹 그 손을 당겼다. 석주가 그를 내려다봤다. 아리따운 군청색 눈동자에 제 얼굴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올라가는 길에요.”
“응.”
“휴게소에서 떡볶이 사 먹어요.”
“그래.”
“돈까스도.”
“좋지.”
“아, 형이 좋아하는 따뜻한 잔치국수도 먹어요.”
“응.”
석주가 꼬박꼬박 긍정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아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왜 웃어?”
석주가 물었다.
“그냥, 좋아서요.”
아진이 대답했다.
“나도 좋아.”
석주가 덩달아 웃었다.
자박자박, 두 사람의 발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눈밭 위, 두 사람이 오면서 만든 두 쌍의 발자국 곁으로 또 다른 두 쌍의 발자국이 차곡차곡 찍혀 갔다.
석주가 잠깐 고개를 돌려 가지런히 찍힌 발자국들을 바라봤다. 또렷한 네 개의 발자국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석주가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아진이 꾹꾹 손을 당겨 왔다. 석주가 얼른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진의 손을 고쳐 쥐며, 앞으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우리의 일상으로.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자.
우리가 함께했던 겨울로. 또 여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