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55화 (255/261)
  • 외전 08

    석주의 표정에 아진이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 석주는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진이 외투에 넣어 두고 꺼내지도 않은 핸드폰을 찾아왔다.

    곧 아진의 손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미약한 짜증이 스며 있던 그의 얼굴이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활짝 피어났다.

    [이모ᕕ(✿°᷄д°᷅)ᕗ]

    꽃님이었다. 아진이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귀로 가져갔다. 그리고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이모!”

    석주가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진이 더는 손대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이나 쓰레기 등을 가볍게 정리했다.

    -살아 있냐?

    “응!”

    -밥은?

    “먹고 있어. 이모가 준 한우! 맛있다, 이거.”

    -그래? 신경 써서 보내라고 했는데. 잘 간 모양이네. 근데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밥을 먹어.

    “오일장 다녀와서 낮잠 잤어.”

    -내일 아침까지 쭉 자 버리지 그랬냐. 잠도 잘 못 자는 놈이.

    “겨울이라 괜찮아. 어제도 많이 잤어. 이모는 밥 먹었어? 뭐 먹었어?”

    아진이 소파에 옆얼굴을 묻으며 종알종알 말했다. 그는 이런저런 안무를 묻고, 대답했다. 꽃님의 목소리는 힘이 좋다. 그냥 듣기만 해도 몸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평온해졌다.

    오일장에서 있었던 사사로운 일들을 일러바치던 아진이 벌떡 상체를 바로 했다.

    “이모, 여기 눈 진짜 많이 와. 엄청 예뻐. 볼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통화를 영상 통화로 전환했다. 그러자 심드렁한 꽃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배경을 보아하니 그녀의 집 같았다.

    -제주도도 많이 와. 눈 때문에 며칠째 비행기도 안 뜬다고 난리다.

    “아…… 그렇겠네…….”

    핸드폰을 가지고 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던 아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미끄러졌다. 제주도도 눈 많이 오지. 겨울마다 꽃님이 짜증을 냈었는데. 카페 마당부터 주차장까지 관리하기가 몹시 힘들다고. 그걸 깜빡했다. 그녀에게는 눈이 짐일 터였다.

    아진이 다시 소파로 돌아가려는데. 꽃님이 핀잔했다.

    -제대로 보여 줘 봐. 네 못생긴 얼굴만 들이밀고 있는데 예쁜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말에 아진이 얼른 핸드폰을 뒤집었다.

    “아, 응. 여기, 여기.”

    핸드폰 카메라에 정원이 담겼다. 어두운 밤이라 낮만큼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명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꽤 볼만했다. 아진은 구석구석 카메라를 비추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해 댔다. 그러다 다시 화면에 자신의 얼굴을 담았다.

    “이모도 여기 와 봤지?”

    -가 봤지. 근데 안 간 지 오래되긴 했어.

    “나중에 같이 오자.”

    -그래.

    아진이 아이처럼 웃었다. 화면 너머의 꽃님이 그런 아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툭툭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얼굴 좋아 보인다. 피부에 기름기가 흘러.

    “그래? 세수했는데…….”

    -그 뜻이 아니고, 멍청아. 으이구……. 석주랑 같이 있지?

    “응.”

    -그래. 떨어지지 말고.

    “응.”

    눈이 그치면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꽃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아진이 소파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석주가 새로이 꺼내 놓아 차가운 소주를 잔 두 개에 나란히 따랐다. 그러고 있으니 석주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가지고 왔다.

    아진은 석주에게 술잔을 건네주고,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뚜껑을 열자 묵직하게 담긴 아이스크림이 나타났다. 고급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는데 아진이 즐겨 먹는 맛 중 하나였다.

    “가끔 꽃님이 이모가 우리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말투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너무 똑같아서.”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쳤다. 아진은 술을 들이켠 후 아이스크림을 떠먹었고, 석주는 아무런 안주도 먹지 않았다. 그저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퍼 먹는 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진이 아이스크림을 세 숟갈쯤 퍼 먹었을 때. 석주가 그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엄지로 슥 닦으며 대답했다.

    “아마 아닐 거야.”

    “왜요?”

    “그랬다면 내가 네 곁에 있는 걸 허락하실 리 없으니까.”

    “…….”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날 용서하지 않으셨을걸.”

    석주가 손가락에 묻어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었다. 그러다 먼 허공을 한 번 보고, 언젠가 꽃님이 들쑤셨던 유리가 떠올라 골반 위를 슥슥 문질렀다. 저를 원망하고, 혐오하고, 미워하던 꽃님의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잊으면 안 되기도 했고.

    제가 미워 죽을 것 같은데, 아진이 아프면 혼자서 그를 보듬을 수가 없어서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절 찾아오던 그녀가 아직도 눈에 훤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석주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또 쿰쿰한 생각을 하던 석주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얼른 아진의 낯빛을 살피는데.

    “…….”

    아진은 이미 음울한 감정에 뒤덮여 있었다. 놀란 석주가 다급하게 아진 쪽으로 돌아앉았다.

    “미안해. 자꾸 이런 이야기 해서.”

    티 내지 않으려 하는데, 쉽지 않다. 저는 가해자고, 죄인이라 되뇌며 사는 게 당연하지만 아진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텐데. 잊고 싶은 기억일 텐데. 제가 눈치 없이 자꾸 끄집어내서 환기하게 한다.

    석주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가 고통받고 아파하는 게 보기 힘들다고 아진이 에둘러 말하기까지 했는데. 또. 또 이런다. 저는 어쩜 이다지도 아진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원망스러웠다. 역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었는데. 바람 같은 거로 태어나 아진의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머물렀어야 했는데.

    석주가 아랫입술을 터트릴 듯 세게 깨무는데. 아진이 달짝지근한 아이스크림 숟가락으로 석주의 아랫입술을 톡 쳤다.

    “괜찮아요. 어떻게 이야기를 전혀 안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겪은 일인데.”

    “…….”

    “계속 데다 보면 무뎌지겠죠. 형도 나도.”

    아진이 숟가락 가득 아이스크림을 퍼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의 뺨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그러면서 석주를 보며 빙긋 웃는데, 조금 전까지 그의 얼굴 위를 겉돌던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석주가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진은 성장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에 아파하더라도 그 아픔을 길게 이어 가지 않는다. 잡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니 금방금방 놓아주는 것이다. 석주보다 훨씬 성숙했다.

    석주가 아진의 손등에 꾹 입술을 눌렀다.

    “멋지다. 어른스럽네.”

    “그럼요. 나도 어른인데.”

    아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 뭐냐, 전생부터 치면 벌써 쉰이라고요.”

    기상천외한 덧셈에 석주가 실소했다. 쉰이라니. 아직도 이렇게 애 같은데. 반오십의 생을 두 번 살았다고 본인을 쉰 취급하다니. 우습고, 귀여웠다.

    “그럼 나는…… 일흔쯤 되나?”

    석주가 아진이 따라 준 술잔을 들이켜며 자문했다. 덩달아 술을 마신 아진이 빼꼼 혀를 내밀었다.

    “와. 형 완전 늙었네. 하긴, 전생 때도 아저씨긴 했어요?”

    “그랬지. 다음 생에는 너보다 어리게 태어나도록 노력해 볼게.”

    “좋아요. 근데 또 너무 어리진 말고. 한…… 여섯 살 정도?”

    “그래.”

    “그럼 내가 형이겠네.”

    아진은 벌써 형이라도 된 듯, 석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앉은키도 작아서 어깨동무를 하려면 엉덩이 한쪽을 허공에 띄워야 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팔을 걸치고 있었다. 석주가 피식 웃으며 몸을 낮춰 주었다.

    두 사람은 형-, 아우- 하는 장난을 치며 술병 하나를 뚝딱 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진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렸다. 눈이 반쯤 감겨서 고개를 이리로 기우뚱, 저리로 기우뚱 흔들어 댔다. 그러다 반소매 티셔츠 끝을 팔락팔락 흔들며 불평했다.

    “덥다, 더워……. 나 취했나 봐요…….”

    아진이 아이스크림 통을 확인했다. 허나 진즉 다 먹어 치우고, 남은 건 눅진하게 녹아내린 흔적뿐이었다.

    “하나 더 갖다 줄까?”

    석주가 몸을 일으키는데. 아진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의 두툼한 팔뚝에 뺨을 벅벅 문질렀다.

    “아이스크림보다 형이 더 시원하잖아요.”

    웅얼거리듯 말한 아진이 석주의 옆구리에 철썩 붙었다. 석주의 손을 잡고 조물거리기도 했다. 차갑고, 시원한 체온을 기대하면서. 근데,

    “어, 손 따뜻하네?”

    석주의 손이 따뜻했다. 아주 높은 온도는 아니었지만 손바닥에 은은한 열기가 돌았다. 놀란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석주가 빙긋 웃었다.

    “너랑 붙어 있잖아.”

    “…….”

    아진이 멍하니 눈꺼풀을 끔뻑였다. 그래, 저와 붙어 있지. 일전에 저도 그러했다. 내내 추위에 떨다가도 석주와 함께 있으면 전신에 훈훈한 열기가 돌았다. 그의 체온을 빼앗아 오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체온에 스미는 듯했던 기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석주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아진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지는 걸 본 석주가 다시금 일어나려 했다.

    “더우면 창문이라도 조금 열-”

    “됐어요. 그냥 있어요.”

    아진이 석주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석주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진과 붙어 있으면 몸에 도통 힘이 안 들어갔다.

    석주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남은 술만 마저 마시고 아진을 재워야겠다, 생각하는데. 어째 뺨이 뜨끔뜨끔했다. 석주가 고개를 내리자, 제 옆구리에 달라붙어 혼탁한 눈동자로 저를 응시하는 아진이 보였다.

    석주가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형 무지 잘생겼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오늘 그 말 자주 하네.”

    “자주 하지 말까요? 그 뭐더라, 희…… 희소성이 떨어지나?”

    “아니. 듣기 좋아. 너한테 귀염받는 기분이라서.”

    연인이 제 얼굴이 좋다는데 나쁠 게 무어가 있겠나. 석주가 슥슥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다 대뜸 말했다.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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