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7
아진은 술잔 하나를 석주의 손에 들려 주고, 나머지 하나를 쥐었다.
“짠.”
그 말에 석주가 잔을 아진의 잔에 부딪쳤다. 따르는 건 막 따라도 짠은 해야 했다. 아진이 그러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차갑게 적시는 적나라한 알코올 향에 아진이 목을 움츠렸다. 콧잔등에 주름이 자글자글 생겨났다.
“으……. 소주 되게 오랜만이다. 그쵸?”
짧게 입맛을 다신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오랜만이네.”
소주 맛도 참 많이 변했다. 달고 역해졌다. 이렇게 말하니 정말 옛날 사람 같긴 한데, 한창 술을 달고 살던 50년대와 분명 달랐다. 어쩌면 전생보다 편히 살아와 입이 쓸데없이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고.
그래도 작은 잔에 따라 마시는 소주 맛은 그 어떤 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 계속 손이 가긴 했다.
자신의 잔에 재차 술을 따른 석주가 아진을 살폈다.
“맛없어? 위스키 가져올까? 아니면 와인?”
“괜찮아요. 오늘은 소주가 마시고 싶어. 아까 시장에서도 다 소주 마시고 있었잖아요.”
아진이 자신의 잔을 석주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기를 집어 하나는 석주의 입에 또 하나는 본인의 입에 넣었다. 석주는 아진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이 또 짠- 했다.
그들은 별다른 대화 없이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시선은 정면에 있는 통창에 박혀 있었다. 정원 가득 내리는 복슬복슬한 함박눈이 조명과 부딪혀 은은히 빛났다.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여름 이불처럼 쌓여 있던 눈이 어느새 두툼한 솜이불이 됐다.
비나 우박은 소리라도 요란하지. 눈은 어쩜 저리도 고요하게 세상을 집어삼킬 수 있는지. 신비로우면서도 선득했다.
조용히 소주잔을 기울이던 아진이 툭, 석주의 팔뚝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고는 석주의 팔꿈치부터 팔, 손목까지 쭉 쓰다듬으며 내려와 손바닥을 맞붙였다.
“형.”
“응?”
“우리 앞으로 자주 놀러 와요.”
“그래.”
“둘만 있으니까 좋다.”
연달아 마신 술에 광대가 불그스름해진 아진이 샐쭉 웃었다. 사실 서울에서도 으레 둘만 있기 일쑤인데,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환경에서 둘이 있으니 훨씬 더 안온하게 느껴졌다.
석주가 동의한다는 듯 아진의 머리에 뺨을 묻었다. 소반 너머로 길게 펴진 두 쌍의 다리가 참 보기 좋았다.
석주와 아진에게는 평화로운 시간이 귀했다. 서울 생활이 딱히 힘겨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평화로운 건 또 아닌지라. 바쁜 일에, 아진에게 관심이 많은 매스컴에, 아진이 질색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까지. 조용한 나날이 몇 없었다.
전생에는 더 심했고.
석주가 아진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는데, 오밀조밀한 발가락을 접었다가 펴던 아진이 석주를 올려다봤다.
“우리 일 관두고 그냥 여기서 살까요?”
“좋아.”
석주가 냉큼 대답했다. 고민일랑 없이 나온 긍정에 아진은 본인이 질문해 놓고도 놀란 듯 턱을 안으로 당겼다.
“뭐야. 이렇게 쉽게요?”
얼빠진 뺨이 어찌나 귀여운지. 석주가 손끝으로 툭 아진의 뺨을 두드렸다. 그러다 턱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하자는 건 다 좋아. 하물며 나 버리고 간다는 것도 아니고, 이 외진 곳에 단둘이 살자는 건데. 안 좋을 이유가 뭐 있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데?”
“그래도……. 형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학교도 나오고 그랬는데……. 아깝잖아요.”
“다 널 만나기 위해서 한 일이야. 네가 버리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어. 아깝지 않아.”
석주가 아진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아진이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석주가 잘게 잘라 놓은 곶감을 야금야금 씹으며 웅얼거렸다.
“그런 것치곤 일을 엄청 열심히 하던데.”
그 말에 설핏 웃은 석주가 잔을 비웠다. 소주가 스민 그의 아랫입술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그가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 일이니까. 네 회사고, 네 평판이니까. 허투루 하고 싶지 않은 거지.”
“…….”
“뭐, 회장님한테 잘 보여야 하는 것도 조금 있고. 그래야 네 곁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을 명분이 생기잖아?”
석주가 아진의 어깨를 꽉 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맛이 변했다느니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소주가 좋았다. 이렇게 퍼질러 앉아 마실 기회가 잘 없어 이 순간이 즐겁기도 했고.
또 빠르게 술 한 잔을 비운 석주가 고개를 소파로 넘겼다. 그리고 가지런히 박힌 서까래를 올려다봤다. 그 자세가 묘하게 나른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렇다기보다는, 석주의 원래 모습이 나오는 거였다. 먼 옛날, 맨 상박에 두루마기만 걸친 채 밤새 술을 마시던 그때의 모습이. 타고난 게 천한 핏줄이라 예도 법도 모르고 살던 그때의 모습이.
석주가 아진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읊조렸다.
“나도 바쁜 거 싫어. 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너만 안고 있고 싶을 때도 많아.”
“…….”
“좀 덜 먹고, 덜 좋은 데서 자도 되니까 너만 껴안고 살고 싶다.”
“…….”
“여기서 머슴처럼 장작 패고, 네 수발들고, 네 밥 차리고, 마당 쓸고, 그러다 네가 부르면 달려가고, 봄엔 꽃 구경하고, 가을엔 단풍 구경하고, 그러고 싶다.”
주절주절 궁상맞게 이어지는 말이 퍽 구체적이었다. 이미 몇 번이고 상상해 본 것이라 그랬다. 번잡한 서울 한복판에 갇히지 않은 듯 갇혀 있을 때면, 아진을 데리고 산 중턱으로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그가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아진의 손등에다 쪽 키스했다. 손가락 끝 하나하나와 손바닥에도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졌다.
“근데 우리 도련님이 귀하게 자라서 그럴 수가 없겠지? 어떤 상황이든 간에 돈은 열심히 벌어야 할 거야.”
“…….”
“이렇게 한우도 먹여야 하고, 침대도 좋은 거 써야 하고, 새로운 자동차가 나오면 그것도 사 줘야 할 테니까.”
석주가 아진의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욕심도 많고, 물욕도 많은 아진이 사랑스러웠다. 전생에서는 뭘 제대로 욕심내 본 적도, 가져 본 적도 없어 빈 콜라병 따위나 모으곤 했었는데 말이다.
이제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까지 쪄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겨울에 기껏 살을 찌워 놓아도 여름만 되면 홀쭉해져서 여간 가슴이 아픈 게 아니었다.
석주가 뜨끈뜨끈한 아진의 손바닥을 만끽하며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아진의 입매가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머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걸 한다고…….”
석주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그러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아진에게는 제가 본인을 데리고 산기슭으로 숨어드는 것보다, 제가 머슴이 되는 게 더 큰 일이었던 모양이다.
석주가 웃고 있으니, 아진이 그의 손목을 당겨 시선을 끌어왔다. 그러고는 자못 진중하게 말했다.
“내가 골드 호텔에서 종업원도 해 보고, 형 집에서 종도 해 보고, 이번 생에는 양반집 아들도 해 보고, 큰 회사 사장님도 해 봤는데. 우리 엄마 아들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는 게 제일 낫고, 다음으로는 사장님이 나아요.”
“…….”
“그러니까 머슴 같은 거 하지 마요. 내 머슴이라도 싫어.”
“싫어?”
“응. 뭐 사실, 지금도 내가 바지사장이라 형이 약간 현대판 머슴 같기는 한데…… 그래도 장작은 안 패잖아. 마당도 안 쓸고. 그게 제일 힘들거든요.”
아진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머슴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피력했다. 석주가 실로 머슴 일이라도 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석주는 볼 안쪽 살을 깨문 채 웃음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아진을 와락 껴안았다. 아진이 우악, 하며 석주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갑갑하다는 듯 팔을 버둥거렸는데, 석주는 오히려 그를 더욱 세게 안았다. 그리고 사랑을 줄줄 쏟아 냈다.
“아진아, 사랑해.”
“…….”
“사랑해, 정말.”
사실 석주는 머슴이든 비서든 상관없었다. 어떤 순간이든, 어떤 환경이든 이렇게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아진과 조금 더 함께하고 싶어서 슬쩍 욕심을 비쳤을 뿐이지.
석주가 아진의 어깨에 턱을 비비는데. 아진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진짜 못 말려요…….”
가볍게 석주를 핀잔한 아진이 그를 마주 안았다. 전신을 감싸는 따끈함에 석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다가 눈을 맞추었다. 아진이 씨익 장난기를 담아 웃었다. 그가 바닥을 짚고 석주의 다리 위로 올라갔다.
석주가 아진의 뺨에 촉촉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러다 입술에도 뽀뽀했다. 아진이 석주의 옆구리를 감싸며 고개를 비틀었다. 석주가 천천히 그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숨결이 마주 닿기 직전이었다.
저 멀리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 벨 소리였고, 음악으로 말미암아 아진의 것이었다.
석주가 흠칫 굳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아진을 들어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내가 가져올게.”
“안 받아도 돼요.”
아진이 가지 말라는 듯 석주의 옷자락을 쥐었다. 석주가 난감하다는 것처럼 눈썹을 구겼다.
“너한테 전화 올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아진에게 전화할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명희를 비롯한 그의 누나와 형. 그리고 꽃님. 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전에 있던 친구들은 마약 관련 이슈로 죄 잠수를 타고 있는지라.
그러니 전화가 왔다면 개중 한 명이란 뜻이었고, 그 전화는 쉽게 무시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