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53화 (253/261)

외전 06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잔뜩 확장된 눈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쑥스러워요? 쑥스럽다고요?”

아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흡사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마젤란의 말을 접한 사람들 같은 표정이었다. 석주가 아진의 국밥을 맛보았다. 그리고 새우젓을 조금 더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쑥스럽지. 네가 자꾸 보는데.”

석주가 재차 간을 봤다. 그러고는 부추무침 반절을 집어 국밥에 넣었다. “이제 먹어.”라고 말하며 뚝배기를 아진의 앞에 쭉 밀어 주는데. 아진이 상체를 내밀며 와다다 말했다.

“형은 사람 허벅지 사이에 막 고추도 끼우고 자고, 엉덩이에 막 뽀뽀도 하고, 야한 말도 막 하는 사람이잖아요.”

쿨럭. 물을 삼키던 석주가 둔탁하게 기침했다. 물이 입가를 온통 적셔서 휴지로 얼른 닦아 냈다. 기함할 소리에 등줄기가 다 서늘해졌다. 그가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가게 안이 시끄러워서 아진의 말을 들은 이는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석주가 마른세수를 하는데.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고작 얼굴 보는 게 쑥스럽단 말이에요?”

“…….”

식사 중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그랬다면 아진의 저 고운 얼굴에 밥풀을 튀길 뻔했다. 입가를 연신 쓸어내리던 석주가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내가 그러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거야?”

그래도 요즘엔 질 낮은 깡패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데. 어엿한 사회인으로서의 품위도 지키는데. 아진의 허벅지 사이에 좆을…… 끼우고 자는 버릇도 없앴고. 물론 섹스할 때마다 짐승처럼 굴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분명 나아졌다.

근데 아진이 이리 말하니,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다.

하지만 엉덩이에 뽀뽀하는 건 참을 수가 없는걸. 그 하얗고 토실토실하고 동그란 엉덩이가 눈앞에서 찰랑거리면 도저히-까지 생각하던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데.

아진이 수저로 호롭, 국밥을 떠먹었다. 석주가 열심히 식혀 준 덕분에 적당히 따뜻한 국물이 마음에 들었다.

“싫기는요. 그럴 시기는 옛날에 지났죠.”

석주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싫긴 했구나. 하긴, 1950년대에. 한창 아진과 밤을 함께했던 시절엔 미친놈아, 개새끼야 등등 온갖 욕을 얻어먹긴 했었다.

진짜 싫었구나.

석주의 눈가에 어둠이 드리우는데. 석주가 건져 놓은 순대를 집은 아진이 후후 바람을 불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나도 이제 형이랑 방탕하게 몸 비비는 거 좋아.”

“……다행이네.”

그건 실로 다행이었다. 싫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겠지만 퍽 괴로울 테니 말이다. 근데 엉덩이에 뽀뽀하는 건 여전히 싫다는 뜻인가. 그에 대해 정확히 짚어 주지 않아서 조금 불안했다.

석주가 자신의 국밥에 새우젓을 퍼 넣으며 아진을 살폈다. 아진은 어느새 식사에 집중해 있었다.

국물을 연달아 몇 번 퍼먹고, 하얀 쌀밥을 수저 가득 떠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깍두기도 하나 먹고, 그러다 건져 놓은 순대를 국에 적셔 먹고, 야들야들한 수육도 집어 먹으며 알차게 국밥을 즐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름이 다 사라졌다. 수저를 옴팡지게 쥔 손가락 사이에 붙은 밴드에 가슴이 쓰라리긴 했지만, 당장은 아진이 웃고 있으니 다 괜찮다 싶었다.

옅은 미소를 띤 석주가 본인의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공깃밥을 반절쯤 비웠을 때였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것 같아요.”

깍두기를 아삭아삭 씹던 아진이 말했다.

“더 먹어. 미리 시킬까? 식혀 두게?”

석주가 금방이라도 사장을 부를 듯한 기세로 되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우당탕!

거대한 그림자가 테이블을 덮쳤다. 거친 소리와 함께 국밥이 붕 떴다가 내려앉았다. 그림자 주인의 손이 버둥거리며 테이블을 휘젓고, 수육이 그의 새까만 손톱에 뒤엉켜 널브러졌다.

썩 위생적이지 못한 광경에 아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테이블을 덮친 괴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살찐 얼굴이 시꺼먼 게 술을 여간 자주 마시는 게 아닌 듯했다. 아마 맨정신일 때보다 취해 있는 시간이 많을 터였다. 술 냄새가 자욱하게 났고, 홀아비 특유의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코를 가리는데. 주저앉았던 사내가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홱 아진을 뒤돌아봤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아이 씨벌…… 왜 여기서 밥을 처먹고 있어…….”

였다. 아니 식당에서 밥을 먹지 그럼 춤이라도 추랴. 아진이 말간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사내가 누런 눈깔로 그 시선을 받아 냈다. 그때, 사장 할머니가 툭툭 사내의 팔뚝을 쳤다.

“이보쇼! 취했으면 곱게 들어가 자. 영업 방해하지 말구!”

“뭐, 이 씨발년아. 이 새끼가 날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욕설에 손님들의 눈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아진의 고아한 눈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테이블을 쥐고 왁왁 흔들어 댔다. 엉망이 된 식기와 음식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 씨발 새끼야! 왜 쳐다봐! 어? 왜 쳐다보냐고!”

그냥 미친놈이었다. 아진이 발뒤꿈치로 의자를 밀며 쏟아지는 음식물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석주를 바라봤다.

석주는 괴한이 등장했을 때부터 아진을 보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는 거였다. 늘 이러했다. 이렇게 악귀들을 마주할 때면, 석주는 꾸역꾸역 내리누르던 폭력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아도 되는지 아진에게 허락을 맡았다.

아진이 대체 뭐에 화가 났는지 분기탱천하는 취객을 흘끔 쳐다봤다. 그러고는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녀와요.”

그 말에 석주가 날렵하게 일어났다. 그는 취객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엄청난 힘으로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살집이 있는 취객이 번쩍 들려서는 질질 끌려 나갔다. 당황한 그의 뒤꿈치가 그악스레 허우적거렸는데, 그런다고 석주의 아귀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취객이 가게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식당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다들 놀란 얼굴이었는데, 아진만 평화로웠다. 그가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마른 입맛을 다셨다. 식사가 엉망이 되어서 짜증이 나는데, 그게 다였다. 몸이 떨리거나 이가 딱딱 부딪히진 않았다.

석주와 함께 있을 땐 저런 잔잔한 악귀들이 두렵지 않다. 누가 됐든 석주를 이겨 먹고 저에게 해코지를 할 순 없을 테니까.

언젠가 명희가 말하지 않았나. 석주가 굶주린 범이라고. 누가 굶주린 호랑이를 이기겠나. 얼굴 따로 사지 따로 갈기갈기 찢겨 먹히기나 하겠지.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석주가 저 악귀를 심하게 때려잡으면 어쩌나 하는 것인데. 그래도 요즘엔 인내와 자제력을 학습했으니 적당히 두들겨 패고 말 터였다.

점원이 아진에게 연신 사과하며 테이블을 치워 주었다. 재빠른 손이 엉망이 된 음식물을 순식간에 치워 냈다. 나동그라진 접시도 차곡차곡 가져갔다.

아진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메뉴판을 보다 빙긋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사장님 여기 국밥 두 개 새로 주세요! 아, 수육도요!”

* * *

석주에게 안겨 자던 아진이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오일장에서 돌아와 씻고 낮잠을 잤다. 씻자마자 잠들어서 머리카락이 중구난방으로 뻗어 있었다. 석주가 귀엽다며 아진의 뺨에 입술을 비벼 댔다. 잠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아진은 멍하니 그의 애정을 받아 내다,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술 마실까요?”

그 말에 늦은 밤, 술자리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정확히는 소파 아래 바닥이었다. 소파를 등받이 삼고 앉아 개다리소반을 펼쳤다.

석주와 아진은 넓고 넓은 거실을 다 놔두고 굳이 딱 붙어 앉았다. 마주 보고 앉는 것도 아니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팔뚝을 붙이고 나란히 앉았다.

아진은 본인이 ‘옛날 사람’이라 좌식 생활이 좋다고 했다. 석주는 웃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해 주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뜨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온돌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안주는 오일장에서 사 온 것들을 펼쳤다. 약과, 두 알 남은 만두, 꽈배기, 곶감 같은 주전부리들이 줄줄이 있었다. 물론 메인 메뉴는 따로 있었다.

한우.

강원도 별장으로 휴가를 간다고 하니, 꽃님이 한우로 유명한 횡성에서 고기를 주문해 보내 주었다. 석주는 직원들에게 작은 화로를 받아 왔다. 그리고 거기다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마블링이 꽉 찬 고기는 금방금방 익었다. 석주는 개중 가장 맛깔스레 구워진 것을 아진의 접시로 가져가다, 그것을 내려놓고 아무거나 집어 아진에게 건넸다. 그러자 아진이 그것을 소금에 콕콕 찍어 석주의 입으로 가져왔다.

하찮은 계획 그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석주가 씩 웃으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따로 빼 둔 고기를 아진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아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맛있다…….”

아진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육즙이 쭉쭉 배어 나온다 싶더니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게 도무지 고기 같지 않았다. 석주가 흐뭇한 눈으로 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은 고기를 좋아했다.

전생에도 불고기, 갈비, 고깃국 등 사족을 못 썼지만 그때는 귀해서,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반찬이라 그런 경향이 있었다. 반면 지금은 정말 입에 맞아서 좋아했다. 특히나 한우는 바싹 굽는 게 아니라 겉만 살짝 구우니 뜨겁지가 않아서 꿀떡꿀떡 잘 먹었다.

석주가 부지런히 고기를 굽는 사이, 아진은 소주 뚜껑을 따다 잔 두 개에 나란히 술을 따랐다.

술을 따라 주고 받고, 또 따라 주고 받고 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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