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5
신난 아진이 동그란 판을 가득 채운 만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거 한 판 다-”
“그건 안 돼.”
석주가 흥분한 강아지의 목줄을 당기듯,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특유의 저음으로 만두를 주문했다.
“맛별로 두 개씩만 주십시오.”
그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두 개씩 담았다. 영 모자라 보이는 양에 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떼쓰듯 석주의 소매를 흔들었다.
“저걸 누구 코에 붙여요.”
“다른 곳에도 먹을 거 많을 거야. 참아. 다 돌고 나서도 모자라면 그때 또 사러 오면 되잖아. 응?”
석주가 어른스레 아진을 달랬다. 그사이 할머니는 만두 용기에 노란 고무줄을 채우고, 비닐 포장된 단무지와 나무젓가락 두 개까지 담았다. 석주가 가볍게 묵례하며 그것을 받는데. 아진이 불쑥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요.”
한도 없는 블랙 카드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그에 할머니가 주름진 입매를 떨떠름하게 뒤틀었다.
“잉? 우린 카드 안 받어.”
“왜요?”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를 등 뒤로 숨긴 석주가 애매하게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만 원짜리 지폐 하나와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잔돈은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내내 무표정이던 할머니가 하얗게 센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럼 하나 더 먹어.”
그녀가 작은 종이봉투에다가 고기만두 하나를 턱 얹어 내밀었다. 석주는 그것을 받아 아진에게 쥐여 주었다. 그 후 짧게 인사하고는 아진을 질질 끌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일단 먹어.”
석주가 아진이 든 만두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진은 당연하다는 듯 만두를 석주에게 내밀었다. 석주가 만두를 살짝 베어 물었다. 피가 얇고 육즙이 쭉 배어 나오는 게 맛있는 만두였다.
석주가 몇 번 씹는 걸 보던 아진이 남은 만두를 자기 입에 넣었다. 제법 큰 만두라 그의 뺨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꼭 햄스터 같았다.
아진은 오물오물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제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왜 카드를 안 받아요? 내 카드 되게 좋은 건데.”
“이런 곳은 안 될 때도 있어.”
요즘에는 소득 축소 신고, 탈세 등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붙어서 말이 많긴 하지만, 굽은 등으로 앞치마 가득 밀가루를 묻힌 채 장사하는 노인에게 그런 문제를 들먹이며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현금만 되는 거예요? 지폐?”
“그런 곳이 많을 거야.”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진이 호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더니 주위를 휙휙 둘러보곤 또 호오, 감탄했다.
“여기는 꼭 그때 같네요. 1950년대. 카드도 안 되고, 만두도 팔고.”
그 말에 석주가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번잡하면서도 묘하게 규칙적인 노점들, 한 손으로는 가래떡 꼬치를, 한 손으로는 엄마의 손을 잡고 콧잔등이 빨갛게 언 채로 배시시 웃으며 다니는 꼬맹이들, 밥집에서 뿜어지는 푸근한 김과 고소한 기름 냄새, 바람에 펄럭거리는 두툼한 천막, 흙과 눈이 뒤섞여 얼룩진 바닥, 시끄럽고 번잡한 소음들. 그리고.
[기원 바둑]
[양장-양복⋅와이샤쓰 일체]
[성미 사진관]
[대중식당]
[미장원]
오래되어 녹이 슨 철제 간판까지.
“……그렇네.”
석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과거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그때로.
석주가 초점 없는 눈으로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풍경을 응시하는데. 아진이 슬그머니 석주의 손을 잡아 왔다.
“데이트하는 것 같다.”
“응?”
“그때 말이에요. 우리 바깥에서 데이트 한 번도 안 해 봤잖아요.”
그 말에 석주의 눈썹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제가 그때 아진을 억압하고 감금하지만 않았어도-까지 생각하는데. 아진이 툭툭 석주의 가슴팍을 쳤다.
“아이, 또 그런 거 생각한다. 그러지 말고. 그때 못 해 봤으니까 오늘 해 보자고요. 응?”
그가 해맑게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며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며, 그렇게 화창할 수가 없었다. 그를 빤히 보던 석주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와 아진은 부지런히 시장을 돌아다녔다. 이것저것 구경하고, 오래된 물건들, 그러니까 1950년대에도 있던 것을 발견하면 신기해했다.
뜨개실을 파는 곳에 줄줄이 나열된 색색의 골무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다 검은색을 골랐고, 청설모에게 줄 도토리와 호두도 샀다. 중간중간 설탕이 솔솔 뿌려진 꽈배기와 팥이 듬뿍 든 도넛츠도 사 먹었다.
아진은 즐거워했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이따금 십 대처럼 활기차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특히나 약과와 한과를 파는 가게를 유달리 좋아했다. 공장 약과가 아니라 수제 약과를 파는 가게였는데,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예쁘게 생긴 것을 골라 담았다. 그 밖에 곶감도 사고,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도 사고, 꽃님과 명희에게 주겠다며 털이 부숭부숭하게 덧대어진 보라색 꽃무늬 겨울 일바지도 샀다.
딱히 그녀들이 입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철없는 막내아들이 본인들을 생각해 사 온 것이라며 깔깔 웃어 주긴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파랗던 하늘에 주홍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눈깔사탕을 물고 있던 아진이 우뚝 멈춰 섰다. 한 손에 비닐봉지 대여섯 개를 쥐고 있던 석주가 덩달아 멈췄다.
“왜 그래?”
“밥을 먹어야겠어요.”
“배고파?”
석주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태 먹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만두부터 꽈배기, 도넛츠, 어묵, 약과, 핫도그에 식혜까지. 배가 고플 만큼 적은 양의 음식이 아니었다.
아진이 사탕을 왼쪽 볼로 옮겼다. 그러고는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아닌데 그냥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밥을 안 먹었잖아.”
그 말에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놀랍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진은 전생 때부터 밥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이번 생에도 더위에 시달려 골골거릴 때 말고는 여간해서는 식사를 건너뛰지 않았다.
“그래. 밥 먹자.”
석주는 아진과 식사할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단 쌀밥이 나오는 메뉴여야 할 것 같은데. 그가 진지하게 메뉴를 살피는데.
아진이 석주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며 물었다.
“형 아직도 국밥 좋아해요?”
그가 어느 곳을 가리켰다. 석주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멀찌감치 낡은 간판 하나가 보였다.
[부산 할매 국밥]
국밥집은 작은 공간에 낡은 테이블이 불편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장판 같은 게 못질되어 깔려 있었고, 의자는 왼쪽 엉덩이에 무게를 실으면 그쪽으로, 반대쪽에 실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지며 삐걱거렸다. 메뉴판 역시 오래된 건지 국밥 아래에 적힌 가격이 몇 번이고 덧붙여져 있었다.
공간 가득 돼지 특유의 잡내가 은근히 났으며, 이른 시간인데 테이블마다 소주병이 적게는 하나, 많게는 대여섯 병씩 올라가 있었다.
딱히 유쾌하게 식사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특히나 아진에게는.
석주가 맞은편에 앉은 아진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진은 고개를 쳐든 채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시간 여행 하는 아이처럼 반짝반짝했다.
“형, 뭐 먹을 거예요?”
아진이 물었다.
“돼지국밥.”
석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뽀얀 국물에 숭덩숭덩 잘린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는 국밥이 상상됐다. 그러자 어금니 사이로 군침이 배어 나왔다.
부산이라는 고향을 전생에서도 이생에서도 떠나왔지만, 그렇게 떠나온 지 수십 년이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었다. 더구나 국밥이라는 것은 부산 사람에게는 그저 식사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라 감회가 남달랐다. 먹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도 했다.
석주는 자못 기대하며 동그란 나무통에 와르르 꽂혀 있는 수저를 빼 아진의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럼 나는 순대국밥. 수육도 먹어야지.”
아진이 배시시 웃으며 혼잣말했다. 그러더니 번쩍 손을 쳐들고 소리쳤다.
“사장님. 여기 돼지국밥 큰 거 하나, 순대국밥 큰 거 하나, 그리고 수육도 주세요!”
국밥은 금세 나왔다. 까만 뚝배기가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석주와 아진의 앞에 하나씩 놓였다. 김이 폴폴 나고 촉촉해 보이는 수육도 나왔고, 그 밖에 공깃밥 두 개, 깍두기, 부추무침, 새우젓 등도 나왔다.
석주는 공깃밥 뚜껑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아진의 순대국밥에 든 순대를 건져 식혔다. 아진은 뜨거운 것을 잘 못 먹으니까. 후후 불어 김을 헤친 후 그것을 내려놓고, 새우젓을 조금 떠 아진의 국밥에 탔다.
아진이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으면 했다. 매끼 맛있게, 잘, 많이 먹어 주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이 키우듯 유난스레 시중을 들게 됐다.
석주가 새 숟가락으로 국밥을 휘휘 저으며 식히는데. 아진이 비싯 웃었다. 석주가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진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형 무지 잘생겼다.”
“…….”
갑자기? 국밥 식히고 있는데? 석주가 떨떠름한 낯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슈트를 입고 있거나, 와이셔츠 차림으로 업무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뭐 그런 순간도 아니고. 국밥을 식히다 그런 말을 듣자니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석주가 마냥 기뻐하지도 못하고 국밥만 젓고 또 젓는데. 꽃받침을 한 아진이 석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존재감이 큰 군청색 눈동자가 석주의 잘생긴 이마와 짙은 눈매, 높다란 코, 묘하게 단단해 보이는 뺨,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턱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 시선에 내몰리고 내몰리던 석주가 숟가락을 거두었다.
“왜 자꾸 봐. 쑥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