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4
석주는 치밀어오르는 열기에 떠밀려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들이마시는 공기가 차가운데 열이 식지 않았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열이었다. 흡사 지옥 불 같은 온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심장과 뇌가 녹아내리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 열기는, 머나먼 과거에서 온 것이었다.
석주는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은 환상이니 과거를 상기했다는 게 맞겠다.
온통 아진으로 범벅된 과거였다. 정확히는 아진의 눈물과, 악과, 고통으로 범벅된 나날. 그의 위에 올라타 마귀처럼 그를 뜯어먹는 저. 손수 제 눈알을 뽑고 귀를 틀어막은 채 아진을 무시하는 저. 시시각각 말라 가던 아진과, 절뚝절뚝 걸으며 눈물을 떨구던 아진과,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다가도 화를 내는 아진이 꿈에 연달아 등장했다.
꿈속의 석주는 우는 아진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를 보듬어 주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를 학대하고, 괴롭히고, 함부로 움켜쥐며 그를 더욱 울게 만들었다.
그러지 마. 하지 마. 이러면 안 돼. 안 된다고. 외쳐 봤으나 꿈속의 석주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러다 아진이 손목을 그었던 그 순간. 마루의 결결이 그의 피가 스미던 그 순간. 맥없이 늘어진 아진이 제 부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던 그 순간. 그때의 절망을 고스란히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석주가 뜨끈한 이마를 쓸어 넘겼다. 덥다. 목구멍에서 불덩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겪는 열감에 멍하니 있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쪽 이불을 돌돌 말아 안은 아진이 색색 잠들어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다행히 평화로웠다.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석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돌연 속에서 묵직한 구역질이 치받아 왔다.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 그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우욱…….”
석주는 변기를 부여잡고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아진과 함께 먹었던 저녁이 소화되지 못하고 있었는지 역겹게 역류했다. 석주는 속에 든 것을 죄 게워 내고도 구역질이 멈추지 않아서 시큼한 위액까지 줄줄이 쏟아 냈다.
그렇게 토하고 또 토하는데, 이상하게 그럴수록 몸이 편해졌다. 근육과 뼈를 지글지글 끓이던 열기가 조금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만큼 게워 냈을 때.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차갑고, 서늘한 몸으로.
변기를 움켜쥔 손끝이 시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욕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끝도 시렸다.
석주는 그제야 처박고 있던 얼굴을 쳐들었다. 그 후 물을 내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낯설었다. 별별 일을 다 겪은 몸이나 구역질은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악몽은 처음이 아니었는데. 시시때때로 겪던 것인데.
미간을 구긴 석주는 이유를 찾아 가다, 문득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평소에는 없던 일, 드물게 오늘만 있던 일.
아진이 손을 베였다.
붉게 스며 나오던 그의 피와 아픔을 토로하던 신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것 때문이구나.
아진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신은 그 꼴이 괘씸했던 모양이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웃으니 노한 거겠지.
“…….”
석주는 악몽을 꿔 놓고도, 구역질을 해 놓고도 멀쩡하기 짝이 없는 거울 속의 본인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다 물을 틀고, 얼굴을 담갔다.
등줄기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추웠다.
뒷정리를 마친 석주가 침실로 돌아왔다. 근데 아진이 깨어 있었다. 침대 위에 앉은 그는 달빛으로 가득한 설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주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왜 일어났어? 더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그러나 아진은 석주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긴장한 석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침대 앞에 서는데. 건조하게 가라앉은 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왜 괴로워하는지 모르겠어요.”
“…….”
“뭘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진아.”
다 들었구나. 석주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제 괴로움에 애먼 아진이 고통받는 것 같아 송구했다. 그가 버릇처럼 사과하려 입을 떼는데. 아진이 석주를 쳐다봤다. 달빛을 머금어 평소보다 푸른 눈동자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석주는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굳고야 말았다.
“근데 내가 괴로운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되게 나쁘죠?”
“아니야. 하나도 안 나빠.”
석주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진이 괜찮다니, 펄떡거리던 심장이 평온해졌다. 실로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안 아픈 건 아니에요. 형이 아프니까. 그래서 나도 아파요.”
“…….”
“화장실 앞에 서서 형이 구역질하는 걸 듣고 있는 게 너무 절망적이었어요. 그래서 여기로 다시 도망쳐 왔어요.”
“……그랬구나.”
나는 또 몰랐네. 네가 문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토하지 않았을 텐데. 수많은 구역질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욱여넣었을 텐데. 기필코 그리했을 텐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석주의 낯이 죄책감으로 어둡게 침잠했다. 그때. 아진이 손을 뻗어 석주의 손을 쥐어 왔다. 석주가 얼른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진이 그의 손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형, 나는요. 그냥…… 그냥 우리 둘 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이제 그만 아프면 안 돼요? 우리 많이 아팠잖아.”
그렇게 길게, 한 번의 생으로도 모자라서 두 번째 생까지 지독하게 아팠는데. 왜 또.
아진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무책임하다고 욕해도, 화도 안 나냐며 답답해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다 없던 셈 치고 싶었다.
“…….”
석주는 여전히 죄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진의 말은 매혹적이었으나 차마 긍정할 수가 없었다. 제 주제에 어떻게 감히. 그래서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에 아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물렸다. 석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멀어진 그의 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 버림받나, 이렇게 버려지나, 비로소 혼자가 되나. 그 짧은 순간에 온갖 모습의 지옥을 보았다.
나약하게 후들거리던 석주의 무릎이 꺾이기 직전이었다. 그때.
“이리 와요.”
아진이 석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석주가 무언가에 홀린 듯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품에 안겼다. 쓰러지듯 무게를 실어 버려서 아진이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놀란 석주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아진이 그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러고는 석주의 널따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는 괜찮아요.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
입술을 겹쳐 문 석주가 아진의 품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등을 도닥거리는 작은 손이 어찌나 힘이 센지. 혼돈과 공포, 피비린내와 곰팡이 슨 시간들이 한 꺼풀 한 꺼풀 증발했다.
석주는 그렇게 또, 아진에게 구원받았다.
거추장스럽게 겉돌던 석주의 우울이 흩어졌다. 아진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어떠한 순간에도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이 보이는 팔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아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석주의 머리칼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해 줘요.”
“사랑해.”
석주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말인지라 머뭇거림 따위 없었다. 아진이 광대를 봉긋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요, 형.”
“…….”
“형 없으면 못 살아, 나는.”
“…….”
“아프지 마요.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야지.”
“그래. 그래야지.”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결의에 찬 장군 같았다.
옆에 있어 줘야지. 그래야지.
석주는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었다. 아진이 혼자가 되는 걸 상상조차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또 이리되어 버렸지만, 또 그가 내미는 손에 기대어 있지만, 아무튼 굳게 다짐했다.
그날, 석주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아진은 소리 없이 고롱고롱 잠이 들었는데 석주는 행여 또 악몽을 꿀까, 그 악몽에 시달려 유난스럽게 잠이 깰까, 그러다 덩달아 아진도 잠에서 깨 버릴까, 또 그의 걱정을 사게 될까 무서워서 차마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좋은 밤이었다. 밤새도록 콩닥콩닥 뛰는 아진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의 체온과 숨소리를 독점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석주의 행복은 늘 이렇게 불행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 * *
다음 날. 오전 내내 풍성하게 내리던 눈은 정오가 되면서 사그라들었다. 구름 사이에 숨어 있던 해가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아진이 흐뭇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 선 석주가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겨울답지 않게 볕이 좋았다. 그렇다고 아진이 더위를 느낄 만큼 마냥 온화하지도 않았다. 마실 나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두툼한 목폴라에 코트를 걸친 석주와 후드에 짧은 청재킷을 걸친 아진은 어제부터 기대했던 오일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열리는 장에 날씨까지 좋으니 외진 시장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시간이 넘치는 두 사람은 느리게 걸으면서 가게 하나하나, 노점 하나하나, 포장마차 하나하나 공들여 구경했다. 그러다 아진의 발길이 멈춘 건,
“만두!”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다란 손만두 가게 앞에서였다.
[고기만두 3,000
김치만두 3,000]
종이에다 매직으로 휘갈겨 쓴 메뉴판은 단출했다. 그래서 더 먹음직스럽기도 했다.
아진의 눈이 반짝였다. 부러 아침을 가볍게 먹은 터라 허기가 진 상태였다. 잘 익어서 내용물이 반투명하게 보이는 만두를 보자 대번에 군침이 돌았다.
“뭐 줄까?”
무표정한 할머니가 네모난 스티로폼 용기를 펼치며 물었다. 아진이 석주를 쳐다봤다. 먹어도 돼요? 라는 질문 대신이었다.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