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
산책도 운동이라고 땀이 스민 두 사람은 함께 씻었다. 별다른 일 없이 정말 씻기만 했다. 진득하게 입을 맞추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 후엔 늦은 점심을 먹고, 창을 향해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석주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 가로로 다리를 길게 편 채 앉았고, 아진은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석주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식사 후에 환기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창 끄트머리를 살짝 열어 두었다. 공기 청정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아진이 식사 후에는 특히나 더워해서 부러 열어 둔 거였다.
그 틈으로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공기가 담뿍 밀려들었다. 드문드문 눈송이도 흘러들어 왔다. 창틀에 눈이 쌓이는 건 금방이었다.
아진은 짧은 팔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서도 춥지 않은지 그 바람을 온전히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석주를 걱정스레 보거나, 석주가 걸치고 있는 털 담요를 추슬러 주거나, “문 닫을까요?” 하고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석주는 빙긋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안 추워.”
아진과 붙어 있는데 추울 리 없었다. 은은한 불덩이를 껴안고 있는 느낌인지라.
“…….”
석주의 웃는 낯을 보던 아진이 폭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읽고 있는 건 [플랫폼 다양화에 따른 소비자 유형과 미래 전망]이라는 논문이었다.
요즘 아진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사장 직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는 것도 있고, 석주의 일을 하나라도 줄여 주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휴갓길에 오르면서도 부득불 논문 수십 편을 인쇄해 왔다.
석주는 그게 참 기특했다.
먼 옛날, 아진이 제 아들이라는 헛소문이 돈 적 있었는데 어쩌면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생에서는 아진이 정말 제 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공부하는 아진이 이리 기특해 보일 리 없었다.
석주는 아진의 머리 너머로 그가 골몰해 읽는 깨알 같은 활자들을 보다,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가느다랗고 뽀얀 목덜미에다 촙촙 입술을 쪼기도 했다.
그러다 소파 아래로 달랑달랑 흔들리는 아진의 다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겨울에는 아진의 피부가 더 하얘진다. 찬기를 담아 빛이 나는 것 같달까. 박물관에 보관된 백옥처럼 고아한 빛을 내뿜었다.
거기다 미끈한 종아리와 툭 도드라진 복사뼈, 불그스름한 뒤꿈치까지, 그 선이 유려했다. 보고 또 봐도 도통 질리질 않았다. 대가가 그린 명화를 보듯 시선이 계속 갔다.
석주는 그 밖에도 아진의 귓불이나 언뜻언뜻 보이는 목뼈 등을 매만지고 입술을 비벼 댔다. 그러다 아진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비틀고 나서야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 소리 위로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가 겹겹이 쌓였다. 그 틈으로 서로의 숨소리가 스며 왔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한 시간쯤 흘렀을까. 별안간 아진이 불똥이라도 맞은 듯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야…….”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신음. 놀란 석주가 얼른 몸을 바로 했다. 그가 들고 있던 책이 매가리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가 아진의 허리를 번쩍 들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왜 그래.”
아진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있었다. 축 늘어진 속눈썹과 울적해진 눈매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석주의 눈썹이 덩달아 일그러지는데. 아진이 석주의 코앞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베였어요.”
“어? 어디에?”
“종이에.”
아진의 검지 옆구리에 기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별거 아닌 듯싶지만, 돌가루가 들어 단단한 A4 용지에 베여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고통이 절대 하찮지 않다는 걸.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쥐어 상처를 살피는데. 틈이 벌어진다 싶더니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냥 살갗만 스친 게 아닌 듯했다.
심각하게 상처를 보던 석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구급상자를 찾아 서랍을 뒤적거렸다. 휴가 첫날, 직원이 뭐가 어디에 있다 설명해 주었는데 당황해서 그런가. 찾는 게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 찰나에도 아진이 아파하고, 피를 흘린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답답해진 석주가 자신의 앞머리를 마구 쓸어 올리는데. 구석에 놓인 하얀 구급상자가 망막에 박혀 왔다. 그것을 낚아챈 석주가 얼른 아진에게 돌아왔다.
석주는 진지한 낯으로 상처를 살폈다. 피가 상처를 타 넘어 살결 사이사이로 스며 있었다. 제대로, 깊숙이 벤 것 같았다.
“피 싫어…….”
고개를 푹 고꾸라트린 아진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별거 아닌 상처인데. 죽을 만큼 아프지도 않은데. 심장이 펄떡펄떡 난리였다.
고통, 상처, 피, 그런 게 너무 싫었다. 끔찍이도 싫었다. 오죽하면 숨이 다 턱턱 막혔다. 그저 종이에 베였을 뿐인데 교통사고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석주의 눈가가 함께 어둑해졌다.
“나도 싫어.”
특히나 네 피는 흐르지도 않고 닦이지도 않아. 가슴에 맺혀. 괴로워.
석주가 연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고작 종이에 베인 것으로 온갖 유난을 떤다며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저와 아진에게 피라는 건 몹시도 무거운 것이었다. 너무 많은 고통과, 눈물과, 시간이 뭉쳐 있는 것이라 이렇게 예고 없이 맞닥트리면 몸은 물론 사고마저 딱딱하게 굳곤 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석주가 소독솜으로 피를 살살 닦아 냈다. 따끔한 통각에 아진이 “으…….” 하고 짧게 신음했는데 그땐 그냥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석주는 아득바득 해야 할 일을 해 나갔다. 소독을 마치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손가락 옆면에 가로로 길게 난 상처라 일상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밴드를 잘라 붙여야 했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듯한데. 병원 역시 저와 아진에게는 썩 반가운 곳이 아니라 권유하기가 뭣했다.
간단하게 치료를 마친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에 뺨을 묻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요.”
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
석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나같이 지질한 단어들의 연속이라.
내 전생의 업보가 애먼 너에게 불행을 덮어씌우는 것 같아 숨이 막혀.
큰 불행부터, 이렇게 종이에 베이는 사사로운 불행까지. 모두 제 탓 같았다. 그리고 아마 실로 제 탓이 맞을 것이다.
저는 아진이 아니고서야 불행할 수 없는 몸뚱이라, 신이 자꾸 아진을 들쑤셔 저를 벌주는 게 분명했다.
아진은 죄가 없는데. 무고한데. 또 저 때문에 아픈 것이다. 저 때문에.
석주는 한동안 아진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대로 아진이 제 코와 입을 막아 숨통을 조여도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아진이 그런 석주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느끼지 못한 척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꾸 불행으로, 자괴감으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석주를 말릴 방도가 없었다.
무책임하다 여길 수도 있으나 아진은 알았다.
석주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저를 두고 어딘가로 숨어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석주는 죽을 때에도 제게 허락을 맡을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했고.
또한 이런 자책을 석주가 기껍게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 게 본인의 업이라 생각하는 이인지라. 그가 본인에게 내리는 벌이라 방관이 어렵지 않았다.
수 분간 아진의 손바닥에 뺨을 묻고 있던 석주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테이블에 걸쳐져 있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태블릿으로 읽자. 다운받아 줄게.”
“태블릿 별론데.”
“왜? 무거워?”
“그건 아니고…….”
아진이 말끝을 흐렸다. 석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종이가 좋단 말이에요.”
“……뭐? 옛날 사람?”
“네. 책장도 넘기고, 연필로 필기도 하고. 그래야 공부하는 맛이 있지…….”
“…….”
석주가 뺨이라도 얻어맞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파안대소했다. 본인이 옛날 사람이라니. 아직 서른도 안 된 주제에. 아기 같은 게. 이토록 늙은이 같은 말이라니. 전생이나 이생이나, 여전히 저보다 한참 어린 아진이라 이런 말이 마냥 발칙하고 귀여웠다.
석주가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내일 오일장에서 골무도 사 오자. 아마 팔 거야.”
“골무요?”
“응. 종이 만질 때 쓰는 장갑 같은 거야.”
“뭔진 알아요. 근데 요즘에도 그런 걸 팔아요?”
“그럼.”
아진의 광대에 기대가 차올랐다. 통장에 수십억이 있으면서, 신형 스포츠카를 몇 대나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몇천 원짜리 골무에 설레하는 게 몹시도 깜찍했다. 이렇게 애 같은데 자기가 옛날 사람이라고.
근데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50년대면 객관적으로 옛날이긴 했으니까. 저도 옛날 사람이고. 태어난 거로 따지면 20년대, 30년대 사람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새삼 우리가 아주 먼 시간을 건너왔구나, 싶었다.
그렇게 먼 시간을 건너와서도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도 다를 수 있었는데. 끝내는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
연한 미소를 띤 석주가 아진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