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49화 (249/261)

외전 02

“시룬뎅.”

익살맞게 대꾸한 아진이 석주를 도와 수저를 놓았다.

석주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아진은 예전 성격이 많이 돌아왔다. 아, 예전이라고 하면 안 되나. 최근 성격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현성 그룹의 철없는 막내아들 모습이 자주 드러났다.

이렇든 저렇든 어쨌든 아진인지라 딱히 좋고 싫음을 판가름할 필요는 없지만, 난감한 상황이 늘어난 건 분명했다.

석주의 굳은 표정을 흘끔거린 아진이 아랫입술을 쑥 내밀며 반론했다.

“답답하단 말이야. 형만 있는데 뭐 어때요.”

“내가 있는 게 제일 큰 문제라는 생각은 왜 못 하지.”

그 말에 아진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가 든 수저 대가리가 휘청거렸다. 군청색 눈동자도 파르르 경련했다.

“…….”

아진이 수저를 곱게 내려놓았다. 그때, 석주가 아진의 티셔츠를 가져와 의자에 걸쳐 두었다. 아진은 군말 없이 그것을 집어 주섬주섬 머리에 끼웠다.

그 모습이 참 하찮으면서도 귀여워서, 석주는 웃고야 말았다.

“먼저 먹어.”

“네.”

석주의 말에 아진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수저를 들기만 할 뿐, 먹지 않고 가만히 석주를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이 먹기 전에는 먼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그여서.

그 버릇을 잘 아는 석주가 얼른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밥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그제야 아진이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더니, 숟가락이 밥을 듬뿍듬뿍 떴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 바른 젓가락질로 반찬을 하나하나 골고루 집어 갔다. 뭘 먹고 유달리 맛있게 느껴지는 게 있으면 석주에게 먹어 보라 추천하거나, 직접 집어다 석주의 밥 위로 얹어 주기까지 했다.

석주는 팔푼이처럼 치미는 웃음을 꾹꾹 억누르며 그것들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 아진이,

“아이구, 잘 먹네.”

라며 꽃님과 똑같은 투로 한 말에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해야 했다.

식사 후 석주와 아진은 산책을 나섰다. 별장으로 휴가를 온 지 나흘째인데 꼬박꼬박 이 시간에 산책하러 나갔다. 그나마 정오 언저리가 가장 볕이 좋고 따뜻하기 때문이었다.

현관에 선 아진이 유난을 떨며 석주의 옷차림을 여몄다.

“밖에 추워요.”

키가 한참 작은 탓에 발뒤꿈치를 한껏 쳐들고는 손수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꼼꼼히 채워 주기도 했다. 석주는 아진의 애정 어린 손길이 좋아서 나잇값도 못 한 채 웃고만 있었다.

“장갑은요? 장갑도 해요.”

아진이 석주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잡히는 게 없었다. “내가 갖고 올게요.”라며 기껏 신은 신발을 벗으려기에, 석주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손을 스르륵 미끄러트려 아진의 손과 손가락을 얽었다. 보드랍고 따끈한 온도가 손바닥에 착 아물렸다.

“장갑은 싫어. 네 손 잡는 게 좋아.”

“…….”

아진이 마주 잡은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신발을 다시 눌러 신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머리 위로 무언가를 푹 눌러 씌웠다. 머리는 물론 뺨까지 덮는 하얀색 털모자였다.

아무래도 아진은 추위를 안 타지만, 얇은 니트에 코트 하나만 덜렁 걸치고 나가려 하기에 챙겨 온 거였다. 찬 바람에 오래 있으면 뺨이 차가워지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이었다.

석주가 강아지 귀처럼 기다란 모자를 내려 아진의 뺨을 덮었다. 그리고 턱 아래로 매듭을 묶어 고정했다. 아진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싫은데. 답답해요.”

“근데 예뻐.”

“…….”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답답하다는 말과는 영 문맥이 맞지 않는 답이었다. 석주는 가끔 말 몇 개를 건너뛰고 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사이 석주가 매듭을 마무리했다. 하얀 털모자가 아진과 정말 잘 어울렸다. 집에서 어화둥둥 귀하게 키우는 강아지 같았다.

사실 추울까 봐 걱정되어서, 뭐 그런 이유는 둘째고 보기 좋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석주가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은 예쁘다. 귀엽고, 귀하고, 사랑스럽다. 항시 그렇지만 유달리 두드러지는 때가 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으나, 전생에서는 특히나 겨울에 그러했다.

춥다며 이래저래 껴입고 마당을 뒤뚱뒤뚱 걷는 게 참으로 귀여웠는데. 뺨과 콧잔등이 빨개져서는 훌쩍훌쩍 콧물을 마시는 것마저 예뻤는데. 제가 퇴근하면 추웠다며 옆구리에 들러붙는 것까지 더할 나위 없었는데. 최근엔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은근히 아쉬웠다.

물론, 현생에는 여름마다 불그스름하게 달떠서, 잠을 못 자겠다고 칭얼거리며 품에 안겨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겨울은 겨울 그 나름대로 맛이 있었던지라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석주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아진을 내려다보자, 그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할 수 없다는 듯 모자 정수리를 아래로 꾹 눌렀다. 그 후 석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석주가 빙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별장은 외진 곳에 있었다. 말 그대로 오지 산간이었는데, 별장을 리모델링 하면서 도로까지 새로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고 들었다. 산책로 역시 무성한 산기슭에 오솔길만 내놓은 것이었는데 그래서 사람일랑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이 한가득 내린 겨울이라 더했다.

오솔길은 부지런한 직원들이 이른 아침부터 눈을 치워 놓았으나 그새 또 쌓여서 신발 밑창이 푹푹 들어갔다. 근데 걸음마다 사부작사부작 자박자박 소리가 나는 게 꽤 낭만적이라 불만은 없었다.

석주와 아진은 손을 맞잡은 채 수 미터에 다다르는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숨을 내쉬거나 말을 할 때마다 짙은 입김이 훅훅 쏟아져 나왔다.

두 사람은 일상이나 저녁 메뉴에 대해, 또는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아진은 명희와 잠시 통화도 했다. 특별한 것 없이 안부만 묻는 전화였다. 많이 춥진 않냐, 밥은 먹었냐, 잠은 잘 자냐, 그런 거.

석주는 종알종알 말하는 아진을 구경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아진이 통화를 끝낸 후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마다마다 소복이 쌓인 눈도 구경하고, 풍경이 유달리 좋은 곳에서는 아진을 세워 두고 사진도 찍었다. 온 첫날 함께 만든 눈사람은 밤새 눈을 집어 먹기라도 한 건지 비대해져서 손으로 슥슥 문질러 모양을 새로이 잡아 주었다.

석주가 쓸데없이 진지하게 눈사람을 매만지고 있자,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형, 되게 귀여워요.”

라며 기함할 소리를 했다. 석주가 우뚝 굳었다. 그러자 아진이 샐쭉 웃으며 다가와 차게 언 석주의 손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눈사람 같은 거나 만들고. 애기네, 애기.”

“…….”

“손이 이렇게 차가운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애기야.”

그리 말하는 얼굴이 천진했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구더러 귀엽다고 하는 건지. 누가 누구더러 애기라는 건지. 본인은 다 조그마한 주제에.

석주는 아진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나 애기야?”

“뭐……, 가끔 그렇죠?”

“그래, 그럼. 나 애기야.”

“푸하하…….”

“아진아.”

“응?”

“애기가.”

“응.”

“형 입술 빨고 싶대.”

그러고는 아진이 피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입술을 쭙 빨았다가 놨다. 놀란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자그마한 얼굴을 부여잡고 만면에다 뽀뽀를 퍼부었다. 아진이 간지럽다며 뒤로 상체를 빼내기에 따라가서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남이 보면 유치하다며 몸서리칠 장난을 쳤다. 아진은 뽀얀 눈을 집어 하늘로 흩뿌렸고, 석주는 큰 키를 이용해 나뭇가지를 살살 흔들어 눈 폭포를 만들어 주었다.

얼굴 가득 내려앉는 눈에 아진이 즐겁게 눈살을 찡그렸다. 석주가 아진의 모자 위로 쌓인 눈을 살살 털어 주는데. 순간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아진의 눈앞을 휙 날아갔다. 그것을 본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다람쥐다!”

석주가 고개를 돌렸다. 꼬리를 크게 부풀린 자그마한 동물이 나뭇가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람쥐가 아니었다.

“청설모야.”

“아……. 청설모…….”

아진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근처에 작은 분수대가 있었다. 겨울에 물을 구하기 힘든 작은 동물들을 위해 만들어 둔 분수대였다. 그래서인지 산책할 때마다 새나 다람쥐 같은 것들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아진은 동물을 좋아했다. 전생 때부터 그랬다. 마당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나타나면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도 귀여운 주제에, 저보다 작은 걸 귀여워하는 게 귀여웠다. 어쩜 순간순간 다채롭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수십 년째 겪고 있으면서도 신기했다.

청설모는 빵빵하게 부푼 꼬리를 흔들고, 이마에 쌓인 눈을 짧은 팔로 북북 쓸어내리더니 나무 사이로 호도도 뛰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아진은 그것이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손을 쥐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올 땐 호두나 도토리 같은 거 가져올까?”

“청설모 먹이로요?”

“응.”

“좋아요, 좋아요.”

“내일 근처 시장에 오일장이 열린대. 가서 너 좋아하는 약과도 사 먹고, 호두도 사 오자.”

“오일장이요? 맛있는 거 많겠다.”

아진의 눈썹이 기대로 올라갔다. 청색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졌다. 그 얼굴을 본 석주는 내일 점심은 시장에 가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난 아진이 이것저것 손에 집히는 대로 사서 입에 넣을 게 뻔했으니까.

아무리 먹여도 살이 잘 오르지 않는 게 걱정이지만,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서 먹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푸근해지는지라, 석주는 내일이 퍽 기대됐다.

“이만 돌아가자.”

흘끔 확인한 시간이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석주가 아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석주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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