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
향연
석주는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어둑한 침실을 조용히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고요했다.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석주는 집 안 온도를 올리는 대신, 소파에 걸쳐진 두툼한 니트를 집어 입었다. 익숙한 행동이었다.
통창으로 보이는 바깥은 어두웠다. 안마당 모퉁이를 따라 켜진 목등만이 언뜻언뜻 보였다.
이곳은 강원도 별장으로. 오래된 한옥을 현대식으로 재건축한 곳이었다. 아진의 본가와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달랐다. 이곳은 지극히 아진의 할아버지 취향이었다.
지붕과 골격, 마당은 한옥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소파와 테이블 등은 바우하우스 시대의 가구로 채워 놓아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났다. 자잘한 장식품 없이 널찍한 공간에 필요한 가구만 놓인 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한쪽 벽면에는 자개 장인이 만든 화조화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고, 한옥 특유의 고즈넉한 나무 냄새가 사방에서 났다.
석주는 은은한 금빛을 내뿜는 목등을 잠시 바라보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석주의 노트북과 태블릿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석주는 노트북을 켜 메일을 확인했다. 며칠 방치했다고 쌓인 메일이 수두룩했다. 하나같이 첫 문장이 휴가신데 죄송합니다, 로 시작했다.
석주는 메일을 하나하나 읽고 답신을 썼다. 그 후 비서팀 출근 시간에 맞춰 예약 전송을 걸어 두었다.
그러고 나자 금세 두 시간이 흘렀다. 어둠만 가득하던 통창에 마당 전경이 훤히 들어차 있었다. 두툼하게 쌓인 눈, 세찬 추위에도 빛깔을 잃지 않은 상록수, 온 세상을 다 덮고도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지 토끼 꼬리처럼 풍성한 모양새로 펑펑 내리는 눈송이.
“…….”
추위가 만들어 낸 풍경이었으나 아름다웠다. 손이 차게 식어 뼈마디가 저릿저릿한데도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였다.
한동안 창밖을 보던 석주가 노트북을 닫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실은 몇 시간 전 석주가 나왔을 때와 달리 환했다. 한쪽 창이 산 쪽으로 나 있었는데 산을 뒤덮은 눈이 햇살을 받아 조명처럼 빛났다. 그런데도 침대에 누운 이는 미동이 없었다.
석주는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엎어져 자는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두툼한 이불이 답답한지 몸 절반을 이불 밖으로 내놓은 상태였다. 찬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어깨, 팔, 엉덩이, 허벅지 등이 퍽 추워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 더했다.
엉덩이에는 큼지막한 손자국이 붉게 나 있었다. 그것을 본 석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데도 피부가 워낙 하얗고 여려서 이렇게 손자국이 남기 일쑤다. 엉덩이뿐만 아니라 허벅지나 어깻죽지에도 얼룩덜룩한 입술 자국이 가득했다.
석주는 나쁘게도, 미안함과 충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직도 이 사람의 몸을 쥐고, 입을 맞춘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이렇게 제가 남긴 자국을 보고 있을 무렵에야 아, 이게 꿈이 아니구나, 내가 지옥에서 천국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
석주는 한동안 이렇다 할 움직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추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석주는 버릇처럼 그의 발로 손을 뻗었다. 제 손보다 한참 작은 발은 희고 가늘었다. 뒤꿈치는 동그랗고 고운 분홍빛이었는데, 그래서 꼭 무른 복숭아 같은 걸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은 따뜻했다. 먼 옛날엔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지금은 난로처럼 뜨끈거렸다.
석주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따뜻한 발이 어색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자주 이랬다. 석주는 그가 감기 같은 것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도통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먼 과거의 그가 추위에 유별났기 때문이다.
그때가 자꾸 떠올라서, 허나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마음이 욱신거리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불을 끌어왔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덮었다. 엉덩이에도 촉 짧게 입을 맞추고는 이불을 당겼다.
근데 그 순간. 설핏,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석주가 얼른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고운 눈꺼풀이 꾸물꾸물 움직인다 싶더니 이내 아름답기 그지없는 파-아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석주의 입가에 속절없이 웃음이 움텄다.
“일어났어?”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칼이 이불에 묻어났다. 석주가 결 좋은 머리를 크게 쓰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아진의 옆에 누웠다. 덩치가 작은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널찍한 어깨를 구기고, 허리를 말고, 다리를 접어야 했는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더 자도 되는데. 어제 늦게 잤잖아.”
석주가 이불을 아진의 등까지 주우욱 당겨 올리며 말했다.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놨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다녔다. 그러다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배고파요.”
그 말에 석주는 고민일랑 없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근데 아진이 그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미약한 힘이었으나 석주는 반항 없이 다시 스르륵 그의 옆에 누웠다.
“배고프다며.”
“형 손이 왜 이렇게 차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먼저 웃음을 터트린 건 아진이었다. 이불을 헤친 그가 꾸물꾸물 석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석주의 팔을 벌리고, 가슴에 뺨이 짓눌릴 정도로 맞대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다.
“내가 따뜻하게 해 줘야겠네.”
“…….”
그 웃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석주가 버석하니 굳었다. 그러다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일어난 아진은 따끈하고 말랑했다. 흡사 방금 나온 떡 같았다. 서늘하게 식어 있던 몸에 아진의 체온이 스멀스멀 스며 오기 시작했다. 폐부를 쿡쿡 찌르던 한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굳어 있던 석주가 참지 못하고 아진을 마주 안았다. 아진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고, 이마에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여름의 뙤약볕처럼 따사로운 체온이 기적 같았다.
아진이 키득키득 아이처럼 웃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곧 석주를 마주 안아 왔다.
“봐 봐. 이렇게 추운데. 그러게, 내가 더운 나라로 가자니까…….”
아진이 웅얼웅얼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안 추워. 너 있잖아.”
석주가 아진의 등을 크게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길었던 시즌제 드라마 하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아진과 석주는 매우 오랜만에 휴가를 썼다.
12월. 한국은 추위가 정점에 다다른 시기라 아진은 더운 나라를 외쳤으나 석주가 거절했다. 햇볕이 쨍쨍한 곳에서 아진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눈에 훤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에어컨 밑에 늘어져서는 강아지처럼 헥헥거릴 게 뻔했다.
그러니 석주가 참는 게 맞았다. 어차피 아진이 곁에 있는데. 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고, 온종일 함께하는데 추위 따위가 뭐가 대수겠나.
석주는 아진의 온전한 휴식을 위해 한국 내에서도 유달리 춥기로 유명한 강원도 별장을 주장했고, 끝내 승리했다.
“나도 형 있으니까 더위 같은 거 괜찮은데…….”
아진이 석주의 윗도리 안으로 손을 넣었다. 두툼한 니트를 입고 있는 석주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가 서늘하게 식은 등을 슥슥 쓰다듬는데. 석주가 아진의 뺨을 감싸 눈을 맞추었다.
“나 배려하지 마. 그러지 않아도 돼.”
“…….”
“항상 너를 최우선으로 뒀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일이고, 내가 행복한 일이야.”
“…….”
“용왕님이 굳이 너를 뜨겁게, 나를 차갑게 만든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응?”
석주가 아진의 붉은 입술을 촉 빨았다가 놨다.
‘전생에 네가 더 괴로웠으니 그 고통을 내게 준 거겠지. 아파야 할 사람은 나니까.’
그 말은 하지 않고 삼켰다. 우리의 휴가가 울적해질 것 같아서.
아진은 이상하게 행복해 보이는 석주를 가만히 응시하다, 다시 그의 품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흘러가듯 말했다.
“어쨌거나 뜨겁고 차가운 우리가 함께 있으면 됐죠.”
“……그래. 그거면 됐지.”
그것만큼 중요하고, 그것만큼 충만해질 수 있는 게 없다. 체온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추위에 얼어 사지가 깨지든 말든, 두 눈으로 아진을 담을 수 있다면 됐다. 그러다 완전히 얼어 버리기 전에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상극을 달리는 온도가 뒤섞여 미적지근해지는 게 몹시 안온했다.
* * *
식사는 때마다 직원이 가져다주었다. 한옥이니만큼 건물이 용도에 맞게 나뉘어 있었는데, 개중 두어 채를 직원이 썼다. 석주는 직원이 복도에 밀어 놓고 간 이동식 트레이를 끌고 식탁으로 왔다. 그리고 묵직한 사기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아진의 입맛에 맞춘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국과 밥은 김이 폴폴 올라올 만큼 따뜻했다. 석주는 아진의 국과 밥뚜껑을 먼저 열어 온기를 날렸다. 아무래도 뜨거운 음식을 즐기지 않는 그인지라.
그러고 있으니 아진이 다가왔다. 헌데 어째서인지, 홈웨어 바지만 걸친 차림이었다. 하얀 상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게 영 추워 보였다.
아진의 추위에 두드러기가 있는 석주가 미간을 확 좁혔다.
“옷 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