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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70년 전 늦은 밤 석주에게 전화가 왔었다. 처음으로 여전하다는 말을 들었던 그날이었다. 그때 석주가 지금과 같은 말을 했었다.
‘주말에, 그러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아니면 이틀 다도 좋고.’
‘저녁…… 같이 먹을까.’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같이. 우리 둘이서만.’
그건 그저 밥 한 끼 같이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만 놓아주고 새로 시작하자는, 그 새로운 출발을 함께할 기회를 주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진은,
‘……좋아요.’
라고 긍정을 했었다. 그리고 새 옷도 사고, 날도 꼽으며 그와 만날 날을 고대했었다. 날짜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51년 5월 12일.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하루 남겨 두고 짧은 생을 끝내야 했다.
“…….”
당시를 떠올린 아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눈시울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군청색 눈동자 위로 얕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좋아요. 밥 먹어요.”
아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밥 한 끼가 뭐라고. 그걸 그렇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그랬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에도 그와 함께하지 못한 식사를, 공유하지 못한 시간과 감정을 아쉬워했던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만날걸. 조금 더 일찍 틈을 보일걸. 먼저 손을 내밀어 볼걸. 온통 후회였다. 지금 떠올리니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새삼 여기까지 몹시도 긴 시간을 돌아왔구나 싶었다.
아쉬웠다. 아깝기도 했다. 가지지 못한 시간들이 슬펐다.
아진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에게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특유의 저음이 귓가를 잔잔히 두드렸다.
-이번엔 늦지 않게 갈게.
“…….”
-어디 있든 갈게.
“…….”
-여전히 사랑해, 아진아.
석주가 두 걸음을 남겨 두었을 때였다. 수화기를 떨어트린 아진이 석주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석주를 와락 껴안았다. 석주가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떠올려 보면 우리는 항상 노력해 왔다.
서로를 사랑하려고.
또 서로를 미워하려고.
그 상반된 간극 속에서 참 열심히도 넘실거렸다.
한 번의 출렁임에 때로는 애틋했고, 때로는 추악했다.
하나의 계절이 당신에게는 여름이었고, 내게는 겨울이었다.
그래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수많은 변화를 헤엄쳐 우리는 끝내 같은 파도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탄 이 파도는 앞으로도 크게 넘실거릴 것이다. 두 번의 생으로부터 말미암아, 그 풍랑을 헤쳐 나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가 되려 한다.
파도가 어떻게 넘실거리고 휘몰아쳐도 결국 바다 안에 잠겨 있지 않나.
우리는 수많은 파도를 차곡차곡 쌓아 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넘실거림을 마땅히 담아낼 것이다.
그렇게 함께할 것이다.
『쌍피』 완결
+눈이 온-다면
한겨울에도 낮에는 햇볕이 제법 따끔거렸다. 그래서 지붕에 솜이불처럼 두툼하게 쌓여 있던 눈들이 사르르 녹아 물이 되었는데, 처마를 타고 흐르다 순간 방심하면 뾰족한 고드름이 되곤 했다. 아진은 빗자루 끝으로 처마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것들을 톡톡 때리며 유흥거리로 삼았다.
그러다 밤이 되면 눈이 다시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껏 비질해 둔 마당이 온통 하얗게 되는 걸 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치밀곤 했다.
흙이 다 젖겠구나, 바닥이 얼어 걷기 힘들겠구나, 비질해도 표가 안 나겠구나,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근데 다른 사람들은 눈이 마냥 반가운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명진이나, 순철 같은 이들 말이다.
“아니, 등신아! 닌 눈사람이 이래 가로로 길게 생긴 거 봤나! 동글동글해야 예쁘지!”
“하, 참네. 형님이 굴린 것도 졸라 옆으로 퍼졌거든요!”
“야. 나는 밑에 둘 거라 갠-찮아. 근데 얼굴은 똥그래야지.”
“아 그럼 형님이 얼굴 만드십쇼.”
명진과 순철은 저녁을 먹은 후부터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 눈사람을 만든다며 본인들의 몸만큼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입김을 펑펑 쏟아 내면서, 맨손으로 한참이나 눈덩이를 주물러 댔다. 그러나 영 요령이 없어서인지 눈덩이가 자꾸 옆으로만 커졌다. 종국엔 떠밀어도 굴러가지 않았다.
마루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던 아진이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두툼한 솜 저고리를 여미고, 댓돌 위에 올려진 하얀 운동화에 대충 발을 꿰었다. 그러자 곁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석주가 그의 손목을 텁 잡았다.
“어디 가?”
“도와주게요. 저렇게 두면 형님들 밤새워도 눈사람 못 만들어요.”
“그냥 있어. 하다 지치면 말겠지.”
석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아진도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도와줄게요.”
마루 아래로 늘어진 석주의 비단 두루마기를 위로 올린 그가 종종걸음으로 명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옆으로 길게 퍼진 눈덩이를 손날로 퍽 내리쳤다. 눈덩이가 쩍 갈라졌다.
“아진아! 니 뭐 하냐!”
기겁한 명진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진이 그를 툭툭 옆으로 밀고는 직접 눈두덩을 굴리기 시작했다.
“형님들은 바보예요? 이렇게 한 번 굴렸으면, 요렇게도 한 번 굴려야 동글동글하게 크지. 계속 한쪽으로만 미니까 길어지죠.”
쯧쯧 혀를 찬 아진이 눈덩이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밭 위로 타원형의 길이 생겨난다 싶더니 눈덩이가 금세 예쁜 동그라미가 됐다.
“히야……. 아진이 니는 우째 그걸 그래 잘하노.”
감탄한 순철이 아진을 따라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진이 눈에 젖은 손을 옷에 북북 문지르며 웃었다. 도박장에 갇혀 살았지만, 눈사람은 제법 만들어 봤다. 한창 눈이 오면 도박장 뒷문 앞, 쓰레기를 쌓아 두는 틈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만지곤 했었다. 그러다 감기에 걸려 꽃님에게 등짝을 흠씬 맞곤 했지.
눈덩이 앞에 퍼질러 앉은 명진이 눈덩이를 소중히 도닥거렸다.
“아진아. 부산은 겨울에도 눈 구경하기가 억수로 힘들데이. 이래 펑펑 내리는 건 서울 올라온 지 2년짼데 아직도 신기하다.”
그 말이 어찌나 명진과 안 어울리는지. 아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다가온 덕재가 무언가를 한 아름 내려놓았다. 곱게 생긴 돌멩이와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 따위였다. 어디 갔는지 한참 안 보이더니 이것들을 주워 온 모양이었다.
“개들이 눈 오면 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지 알 것도 같지 말입니다, 형님.”
덕재가 쓸데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명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 순철이 굴리던 눈덩이도 적당한 크기가 됐다. 그가 그것을 툭툭 두드렸다.
“형님, 이제 합치시죠.”
명진이 눈두덩 두 개를 열심히 살폈다. 누가 보면 집이라도 짓는 줄 알 터였다. 이래저래 크기를 재 보던 그가 턱을 주억였다. 순철과 덕재가 얼굴로 쓰일 눈덩이를 힘껏 들어 올렸다. 아진이 그들을 도와 눈덩이를 들려는데. 명진이 그의 팔뚝을 두드렸다.
“어어. 아진아, 인제 우리가 할게. 춥다. 들어가레이.”
“그래. 석주 형님이 니 데리러 맨발로 뛰어나오실 기세다.”
덕재가 넌지시 말을 얹었다. 아진이 휙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댓돌 위로 다리를 내린 석주가 험상궂게 인상을 쓴 채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고 있던 담배는 눈 사이에 파묻힌 상태였다.
입을 꼭 다문 아진이 얼른 마루로 돌아갔다. 그의 걸음걸음을 따라 작은 발자국이 이어졌다.
운동화를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간 아진이 헤헤, 하고 웃었다. 쯧 혀를 찬 석주가 아진의 어깨 위로 자기 두루마기를 둘러 주었다. 그리고 그새 아진의 머리칼에 쌓인 눈을 살살 털어 냈다.
“추위가 무섭지도 않아?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사장님 있잖아요.”
아진이 두루마기를 꼭 싸매며 대답했다. 석주의 체온을 담뿍 묻힌 두루마기가 언 몸을 순식간에 녹였다.
“…….”
석주가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 말하면 대답할 말이 없는데. 보일 말 듯 하게 미소 지은 그가 아진의 뺨을 매만져 주었다. 그러다 붉게 언 귓불을 주물거리기도 하고, 차가워진 손끝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때, 아진이 눈사람을 가리켰다.
“와…… 쌓으니까 진짜 크네요.”
명진과 순철이 공들여 만든 눈사람은 크기가 엄청났다. 사내 중에서도 덩치가 좋은 두 사람과 맞먹을 크기였다.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석주가 피식 웃었다.
명진과 순철, 그리고 덕재는 바쁘게 눈사람을 꾸미기 시작했다. 눈도 만들어 주고, 팔도 꽂아 주고, 귀한 두루마기까지 걸쳐 주고는 저들끼리 태회파 막내라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아, 형님. 근데 코가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서울 아들이 만들어 둔 눈사람들도 코가 다 하나씩 있더라고요. 눈사람한테는 코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음……. 뭐가 좋겠냐.”
“부엌에 뭐가 있을 것 같은데. 당근이나, 사과 같은 거 말입니다.”
“사과. 사과 좋다. 예쁘겠어. 뻘-거니.”
숙덕거리던 세 사람은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새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하나 가져왔다. 덕재가 아귀힘으로 사과를 반으로 조각냈다. 그것을 눈사람 위로 요리조리 대 보더니, 다시 반으로 잘랐다. 4분의 1로 조각난 사과를 세워 붙이자 꽤 코 같은 것이 탄생했다.
세 사람이 만족스럽다는 킬킬 웃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눈사람을 자화자찬하는데. 누군가가 그들과 눈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미친놈들. 기껏 처먹은 저녁 다 내려가겠네. 새벽에 배고프다고 깨우면 대굴빡을 깨 버릴 거다.”
꽃님이었다. 두툼한 목도리를 하고 뒷짐을 진 그녀가 쯧쯧 혀를 찼다. 명진이 남은 사과를 와삭 깨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아줌마.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요.”
“암요, 암요. 근데 아지매. 뭐 국 남은 것 좀 있습니까? 우리가 데워 먹는 건 할 수 있는데.”
순철이 눈치 없이 말했다. 꽃님이 팩 그를 노려봤다. 명진이 순철의 뒤통수를 콱 내려쳤다. 그가 얼른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입니다. 배고프면 눈 파 물께예. 쉬소, 아지매.”
꽃님이 전보다 더 크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눈사람을 아래위로 훑었다.
“똘추 같은 깡패 놈들. 다 큰 놈들이 별 지랄을 다…….”
그 말에 명진이 원래 사내새끼들은 커도 철이 안 든다며 끌끌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꽃님이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아줌마!”
마루에 앉은 아진이 그녀를 불렀다. 꽃님이 반쯤 고개를 돌렸다. 아진이 그녀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잘 자.”
“그래. 너도 저 잡것들이랑 그만 놀고 자빠져 자.”
“응.”
아진이 샐쭉 웃었다. 그 웃음을 잠시 보던 꽃님이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돌아 사라졌다.
명진과 덕재, 그리고 순철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눈사람과 왁자지껄하게 놀았다. 그러다 늦은 밤이 되었을 무렵.
“형님, 저희 그만 자러 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쇼, 형님.”
“내일 뵙지요, 형님.”
석주에게 우렁차게 인사하더니 자러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잠시간 눈사람을 보던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들어가자.”
근데, 아진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석주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아진이 되레 석주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조금만 더 있어요.”
“…….”
“조금만요. 눈이 이렇게 예쁘게 내리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가요.”
“…….”
석주는 못마땅했다. 이 추위에 아진이 아플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진의 똘망똘망한 눈에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앉았다. 아진이 히죽 웃으며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석주가 아진의 어깨를 감쌌다.
아진이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봤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어찌나 동그랗고 새하얀지. 검푸른 하늘에서 별 조각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소복소복 차오르는 눈 소리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울이 조금 재미있는 것도 같아요.”
“재미있어? 이리 추운데?”
석주가 영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아진이 그를 올려다보며 키득거렸다.
“전에는 여름이 끝나 갈 무렵만 돼도 금세 겨울이겠구나. 엄청 춥겠구나. 손발이 꽁꽁 얼겠구나. 추위에 떠느라 잠도 못 자겠구나, 하면서 걱정했거든요.”
“…….”
“근데 요즘은 안 그래요. 펑펑 내리는 눈송이도 예쁘고, 지붕에 도톰하게 쌓인 눈 이불도 신기하고, 걸을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것도 즐겁고, 고드름 떨어트리는 것도 재미있고 그래요.”
아진이 석주의 손을 슬쩍 쥐었다. 차게 언 제 손과 달리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참 멋졌다.
“사장님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
“사장님은 항상 따뜻하니까.”
종알거리는 아진의 잇새로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입김이 시야를 잠깐 덮었다가 사라지자 배시시 웃는 얼굴이 드러났다. 석주가 그 고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아진을 따라 웃었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 마음껏 재미있어해라. 네 추위는 내가 다 가져가 줄 테니.”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힘껏 안았다. 그러자 아진이 자못 깜찍한 소리를 해 왔다.
“그럼 사장님 더위는 제가 다 가져가 드릴게요.”
그 말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진이 사랑스러워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덕분에 나도 여름이 즐겁겠네.”
바짝 붙어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성히 내리는 눈송이가 눈사람 위로, 마당 위로, 돌담의 처마 위로 소복이 쌓였다.
그러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석주와 아진의 신발 위로도 눈이 쌓일 때쯤. 두 사람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꼭 잡은 채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추운 밤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집 안의 그 누구도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당신의 여름에는 내가 있고,
나의 겨울에는 당신이 있는 나날 속에서
우리 앞으로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