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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 깡패 짓 할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알잖아.”
“왜 그때랑 비교해요. 우리가 그때랑 다른데.”
“……다른가, 그때랑.”
“형이 다르게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잖아.”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석주의 옆구리에 붙은 붕대를 손가락으로 조심히 쓰다듬었다. 붕대는 적당히 부드럽고 건조했는데, 어쩐지 여전히 피가 나는 것 같은, 꿀럭꿀럭 솟아오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있는 것 같은 환촉이 들었다.
한참 동안 석주의 상처를 매만지던 아진이 슬쩍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맞췄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응.”
석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진이 생각을 했다는 게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전생에는 예쁘장한 천치 같았고, 현생에는 귀여운 철부지 같았던 아이라 이따금 이렇게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게 마냥 기특하기만 했다.
“용왕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나 봐요.”
“기회?”
“네. 전생을 기억하게 해서, 그때랑 다른 삶을 살 기회를 준 거예요.”
“음…….”
석주가 목으로 신음했다. 다시 태어나서도 전생을 기억한 게 기쁘긴 했다. 아진을 떠올렸으니까. 운명이라고도 생각했고 기회나 기적이라고도 생각했다. 근데 그게 다른 삶을 살 기회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여전히 전생의 기억에 얽매여 살고 있으니까. 진정 다른 삶을 살려면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석주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진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그저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운명이고 팔자고 달라지려고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
“우리만 봐도 그래요.”
“…….”
“박기헌도, 최진걸도, 곽창두도. 달라질 마음이 없으니 전생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형이랑 나는 달라지고 싶어서 전생과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
아진이 석주의 손을 당겨 뺨을 묻었다. 서늘한 체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가볍게 눈을 감은 그가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도 전생과 다를 거예요.”
“…….”
“우리는 달라지기로 마음먹었고, 이미 다르니까.”
“……똑똑하네. 어른이 다 됐어.”
석주가 아진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이미 다르니까.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그래, 우리는 이미 다르다. 전생과 같은 게 하나도 없다. 그때와 다르게 살기 위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석주의 상처에서 손을 뗀 아진이 자신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그래서 지나간 사람들은 잊으려고요. 전생처럼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기엔…… 기적처럼 얻은 이 기회가 너무 소중해요.”
아진이 석주와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형도 그 소중한 기회를 마음껏 썼으면 좋겠어요.”
“나는 너로도 충분해. 이렇게 다시 만난 거로도 차고 넘쳐.”
“아니요.”
아진은 단호했다.
“형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요.”
“…….”
“날 가졌다고 다른 걸 버릴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황 비서님이랑도 친해지고, 담배도 피우고, 음…… 까, 깡패도 하고 싶으면 해요.”
난데없는 깡패 타령에 석주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러다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깡패?”
되물은 그가 다시 웃었다. 한참 웃던 그는 구멍 난 아랫배가 지끈거리며 아파 올 무렵에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허나 아진은 진지했다. 실로 석주가 전처럼 깡패 짓이 하고 싶다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막지 않을 생각이었다.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선화에게 알랑방귀를 뀌면 전보다 더 대단한 조직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마약을 판매하는 건 조금 문제가 될 것 같긴 한데. 다른 걸 팔 순 없나. 사과처럼 무해하고 맛있는 거로…….
곰곰이 생각하던 아진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무튼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우리는 이미 변했으니까, 전처럼 불행한 일이 또 닥치진 않을 거예요.”
“…….”
“설사 닥친다 해도 괜찮아요. 나한텐 형이 있고, 엄마가 있고, 꽃님이 이모가 있으니까.”
“…….”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기대만 할 거예요. 형이랑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있어요.”
아진이 석주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턱을 댄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간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보고 있기 눈부실 정도였다.
“딱 하나만 변하지 않으면 돼요.”
잠시간 석주를 보던 그가 통통한 입술로 속삭이듯 말했다.
“형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
“…….”
“그리고 내가 형을 사랑한다는 거.”
말을 마친 아진이 치미는 애정을 못 견디겠다는 듯 석주를 안아 왔다. 그 품이 작고 좁았는데, 동시에 광활할 정도로 넓었다.
“…….”
석주가 버석하니 굳었다. 사랑. 그 단어가 아진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의 목소리를 머금은 귓가부터 바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오감이 사라지고, 자아가 증발하는 느낌인데 우습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온전히 아진에게 매몰되는 기분. 그 괴상한 상실로부터 말미암은 기쁨. 행복. 그리고 사랑.
멍청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던 석주가 떨리는 손으로 아진을 마주 안았다. 품 안 가득 그를 안고 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의 따뜻한 체온에 눈알이 다 따끔했다.
석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볼품없이 울고 싶진 않아 울음을 꾸역꾸역 억누르는데. 아진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왔다. 홀로 그를 바라봐 왔던 10년의 세월을 위로하는 듯한, 또 칭찬하는 듯한 도닥임에 석주는 끝내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석주는 아진의 어깨에 코를 묻은 채 눈물을 떨구었다.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았으나 흠뻑 젖은 숨소리를 아진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아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석주가 그를 안고 버텼다. 그러자 아진이 설핏 웃으며 석주의 뺨을 매만져 주었다. 미적지근한 눈물이 손바닥에 묻어나는 느낌이 묘했다.
석주의 눈물은 보기 힘든 것이다. 만지기는 더 힘들고. 어쩌면 전생에 그와 가족 같았던 명진도 본 적이 없을지 몰랐다.
근데 아진은 벌써 몇 번이나 봤다. 제 앞에서만 무너지는 석주가 철없이 뿌듯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아진은 석주의 등을 도닥거리고, 눈물도 닦아 주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짧게 키스해 주기도 했다. 그 다정한 보듬음에 석주가 아진과 시선을 맞춰 왔다. 그 찰나, 묵직한 눈물 하나가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아진이 검지로 그것을 훔쳐 냈다. 그리고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여전히 사랑해요, 형.”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에 석주가 온통 차올랐다. 하얀 얼굴 가득 덧씌워진 건 의심할 여지 없이 행복이었다. 석주가 입을 살짝 벌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이내, 아진을 따라 웃었다.
“……여전히 사랑해, 아진아.”
거친 파도에 휩쓸려 수십 년 동안 종착지를 찾지 못하던 마음이, 망망대해를 떠돌며 외로이 표류하던 마음이 비로소 맞닿는 순간이었다.
* * *
책장 앞에 쪼그려 앉은 아진이 낡은 종이 냄새를 폴폴 풍기는 책들을 조심히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춘향전], [콩쥐팥쥐전], [국어 4년], [공 책] 등. 익숙한 책들이 새삼 신기해서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상자를 채워 넣었다.
얼마 전 회복을 마친 석주가 퇴원했다. 그 후 며칠 요양차 쉬다가 오늘, 아진의 옛날 집을 정리하기로 했다. 집이 많이 낡기도 했고, 여기저기 손볼 곳도 많아서 아예 짐을 다 뺀 다음에 본격적으로 손을 볼 생각이었다. 석주는 딱히 원치 않는 듯했지만, 아진이 어느 날 자다가 집이 무너져서 깔려 죽으면 어쩔 거냐고 방방 뛰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이 집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터였다.
그 말에 석주는 지금 주방에서 이가 나간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책 정리를 마친 아진이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와 식탁 등 큰 가구들을 이미 뺀 터라 집이 휑했다. 이곳에서 얼마 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집이라고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래된 집 특유의 나무 냄새가 알싸하게 밀려왔다. 그것을 잠시 머금고 있다, 느리게 뱉어 냈다. 그 후 다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고장 난 탁상시계도 상자에 넣고, 구석에 굴러가 처박혀 있던 연필도 주웠다. 폴폴 날리는 먼지에 팔랑팔랑 손 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묵직하게 차오른 상자를 들려 할 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커다란 전화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거실을 뒤흔들었다. 놀란 아진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요즘은 벨 소리보다 진동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는지라.
“어…….”
아진이 전화기를 바라봤다. 거실 한편에 놓인 전화기는 70년 전 그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땐 고장 났던 것 같은데. 석주가 그새 고쳤나. 근데 이 집에 전화 걸 사람이 없는데.
아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석주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전화를 받아도 되나, 생각하다, 못 받을 건 또 뭔가 싶었다.
전화기로 다가간 아진이 달칵, 수화기를 들었다. 묵직한 수화기의 무게가 묘하게 반갑고 설렜다. 건너편에선 옛날 전화기 특유의 거친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짧게 심호흡한 아진이 입을 뗐다.
“여보세요.”
-…….
상대방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아진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실렸을 때였다.
-아진아. 나야.
낮은 저음이 아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물며 이 오래된 전화기로도 들어 본 적 있는 음성이었다.
“……형?”
아진이 수화기 쪽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어째서 석주의 목소리가 여기서 나오나.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그가 재차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석주가 거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아진의 얼굴이 느슨해졌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도 떠올랐다.
“뭐야. 뭐 하는 거예요?”
석주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아진이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은 얼굴에 석주의 눈에 사랑이 담뿍 스몄다. 멀리서 봐도 저리 고우니 큰일이다.
-아진아.
“네.”
아진이 꼬박꼬박 대답했다. 석주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울렸다. 그게 묘한 느낌을 들게 했다. 아진이 그를 가만히 보는데. 석주가 듣기 좋은 저음으로 말했다.
-주말에.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아니면 이틀 다도 좋고.
“…….”
-저녁 같이 먹을까?
그 말에 아진이 우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