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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석주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간단하게나마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꽃님이 됐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쥐었을 때. 나가지 않고 우뚝 멈춰 섰다.
“강 비서.”
꽃님이 뒤를 돈 채 석주를 불렀다.
“예, 이모님.”
석주가 나직이 대답했다.
“고마워요. 우리 아진이 지켜 줘서.”
석주가 헛숨을 들이켰다. 잔잔한 목소리에 몸이 우뚝 굳었다.
고맙다니. 꽃님에게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십 년 넘게 아진의 곁에 있으면서 수많은 헌신을 해 왔지만, 이를테면 그 대신 다치고, 그 대신 일을 하고, 그 대신 밤을 새웠지만, 선화에게 꼬박 들어 온 고맙다는 말을 꽃님에게선 듣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전생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저와 은근히 거리를 두었었다.
근데 이렇게 듣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아진이한테 두 사람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몰라. 두 사람 일에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꽃님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고요한 눈으로 석주를 바라봤다.
“강 비서가 이만큼 고생했으면 그 죄가 다 닦이지 않았을까 싶어.”
“…….”
“충분히 속죄했단 말이야.”
석주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 옅은 탄식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꽃님이 그런 석주를 지그시 응시했다.
“앞으로도 아진이 곁에 있어 줘요. 걔가 가끔 되바라지게 굴고, 틱틱거려도 강 비서 많이 의지하고, 좋아해.”
“…….”
“그러니 지금처럼 있어 줘.”
“…….”
“부탁할게요.”
말을 마친 꽃님이 다시 뒤를 돌았다.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 또 봅시다.”
덤덤하게 인사말을 건넨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적막이 드리웠다.
“…….”
석주는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목구멍이 뜨끈해졌다. 마른침을 삼켰으나 목은 점점 더 답답해졌다. 콧잔등도 시큰거렸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정이 북받쳤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요상한 표정이 됐다.
석주는 어쩔 줄 모르고 주먹만 쥐었다 폈다. 그러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괴상하게 구겨진 낯을 허공에게 보여 주기 부끄러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석주는 오랫동안, 손바닥이 만든 좁은 어둠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 *
핸드폰을 귀에 댄 아진이 절뚝절뚝 병실에 들어섰다. 집에서 씻자마자 머리도 말리지 않고 곧장 병원으로 돌아온 터라 머리끝이 아직 축축했다.
“엄마, 나 이제 병실 도착했어.”
아진이 머리를 크게 쓸어 넘겼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물기가 기분 나빠 옷에 벅벅 닦았다. 그리고 든 것 없는 크로스백을 소파에 대충 던져놓았다. 하얀 반팔 티셔츠 위로 걸친 후드 재킷도 벗어 두었다.
-그래. 꽃님이 이모는?
“주차장에서 만났어.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제주도 간대. 카페 오래 비워서 더 못 있겠다네.”
-응, 그렇겠지. 석주는?
선화의 질문에 아진이 석주를 바라봤다. 그는 한 시간 전과 다름없는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굳게 감긴 눈은 닷새 내내 봐 온 것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똑같지, 뭐.”
아진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아휴……. 그래. 아직 눈뜨긴 이르지.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진이 넌 또 병원에서 자게?
“응.”
-엄마도 갈까?
“아니, 엄마 피곤하잖아. 내일 아침에 와.”
아진이 운동화를 툭툭 벗고 양말 차림으로 섰다. 그리고 석주를 향해 다가갔다. 가는 길에 형광등을 끄고 간접 등을 켜기도 했다.
-소파에서 자는 거 안 불편해? 엄마가 침대 하나 더 들이라고 할까?
“내가 환자도 아니고……. 됐어. 그리고 병원 침대 쓰기 싫어. 불편해.”
아진은 병원 침대가 싫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매우 능청맞게 석주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VIP실의 침대는 일반 병실 침대보다 넓어서 둘이서 누워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집 침대만큼 부드럽지도, 폭신하지도 않지만 석주와 붙어 자면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엄마 내일 아침 일찍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응. 나 이제 잘 거야.”
-그래. 잘 자, 아들.
그렇게 통화가 끝을 보일 때였다. 아진이 핸드폰을 고쳐 쥐며 선화를 불렀다.
“엄마.”
-응?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내가 더 바쁘게 해서 미안해…….”
아진의 고개가 벼처럼 아래로 늘어졌다. 제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로 선화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회사 일도 처리해야 하고, 경찰서도 들락날락해야 하고. 저는 정말 못난 아들이다.
-…….
선화는 대답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아진이 연거푸 한숨을 내쉴 무렵. 선화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아진아. 너 내 아들이야.
“…….”
-엄마는 널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만큼 널 사랑해. 바쁜 건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는 이렇게 너랑 통화하고 있다는 것도 감사해.
“……응.”
아진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화에게서 듣는 사랑한다는 말이 참으로 좋았다.
-괜한 생각 말고 얼른 자. 그리고 엄마가 분명 말했다. 철들지 말라고.
그 말에 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전보다 가벼워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아진아. 우리 예쁜 막내아들.
“…….”
-오늘 밤도 부디 행복하게 보내.
“응. 엄마도. 잘 자.”
통화를 마친 아진이 핸드폰을 침대 탁자에 올려 두었다. 며칠 전 선화가 새로이 사 준 핸드폰이 지나치게 반짝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일그러진 총알 두 개도 핸드폰 옆에 내려놓았다.
아진은 본격적으로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리모컨으로 커튼도 치고, 조명도 조금 낮추고, 도톰한 이불은 죄 석주에게 밀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얼마나 움직였다고 금세 몸이 후끈해졌다.
“덥다, 더워…….”
아진이 미간을 구겼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자신의 다리를 곱게 정돈했다. 의사는 붕대를 금세 풀어 주겠다더니, 약을 잔뜩 발라 놓고 또 붕대를 감아 주었다. 아니꼽긴 했지만 전보다 가벼운 붕대라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아진이 석주의 옆에 몸을 바르게 뉘었다. 노르스름한 빛을 삼킨 천장을 끔뻑끔뻑 바라보다, 석주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아예 석주 쪽으로 돌아누웠다.
얼굴에 밴드가 잔뜩 붙어 있음에도 잘생긴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턱에 묻어 있던 멍이 그새 조금 옅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진이 검지로 석주의 턱을 살살 따라 그렸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톡 두드렸다.
“형. 나 어제 형이 나 학교 데려다주던 꿈 꿨어요. 내가 전날에 술을,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라고. 형이 막 잔소리하고 걱정하고 그런 꿈이었는데. 아, 그저께는 교복 입고 형이랑 농구하는 꿈도 꿨어.”
“…….”
“하나하나 기억을 찾고 있어요. 그럴수록 형이 더 좋아져. 형이 날 어떻게 보듬어 왔는지 알 수 있어서.”
“…….”
“오늘 밤엔 또 무슨 기억을 찾을까요? 이렇게 하나하나 찾다 보면 이전의 나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똑같으려나?”
“…….”
“어쨌든 그것도 나고 지금도 나니까 상관은 없을 거예요.”
“…….”
“……자야겠다. 잘 자요, 형.”
그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석주를 안고 그의 가슴을 안고 도닥거렸다. 꼭 어린아이가 큼지막한 곰 인형을 껴안고 자는 듯한 모양새였다.
석주가 입원한 후, 사흘 동안은 간이 의자에 앉아, 석주의 손바닥에 뺨을 묻고 선잠을 잤었다. 소파에서 잘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먼 거리로 느껴져서 석주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러다 어제부터는 아예 그의 침대로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석주가 불편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럼 뭐 얼른 눈떠서 싫다고 말을 하든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하는 못돼 먹은 생각도 했다.
눈을 감은 아진이 석주의 팔뚝에 이마를 묻었다.
“내일은…… 눈떴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또 무리하진 말고요. 아무튼 잘 자요.”
웅얼거리듯 말한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병원은 참 신기한 공간이다. 딱히 하는 일 없이 잠든 이를 그리워하고, 염려할 뿐인데 몹시도 피곤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진이 석주에게 조금 더 바짝 붙었다. 넓은 공간 특유의 소음이 들려왔다. 공기가 너울너울 공간을 맴도는 소리. 두꺼운 창밖으로 차가 도로를 쌩하게 밟고 지나가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별 의미 없어서 편안한 백색 소음들이었다.
물론 가장 집중해서 듣는 건 석주의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아진은 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금세 선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서늘한 손이 허리를 감싸 왔다. 아진은 잠결에도 그것이 석주의 손임을 깨달았다. 근데 현실인지, 몽중인지는 분간하지 못했다. 그의 차가운 체온이 마냥 좋기만 했다.
근데, 허리를 감싼 손이 몸을 훅 당겨 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진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맞붙은 허벅지 사이로 뜨끈하고 두툼한 살덩이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질적이긴 하지만 낯선 감각은 아니었다. 전생에 석주와 매일 이런 자세로 잤었다. 이따금 반갑지 않은 상황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끝내 적응했다. 한겨울에는 뜨끈한 살덩이가 난로 같아 좋기도 했다.
……전생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나. 이번 생에서는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혼수상태 주제에 별짓을 다 하네. 아니, 혼수상태라서 하는 짓인가.
잠에 취한 상태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목덜미에 뭉툭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들리던 석주의 숨소리가 확 가까워졌다.
“좋은 냄새 난다.”
지척에서 듣는 낮은 목소리가 참 감미로웠다. 무심코 입꼬리를 올리던 아진이 흡, 숨을 멈췄다. 그리고 번쩍 눈을 떴다.
“……형?”
군청색 눈동자가 대번에 또렷해졌다. 맑은 눈동자 위로 석주의 모습이 비쳤다. 제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있는 석주가. 깊고 짙은 검은색 눈동자를 온전히 드러낸 석주가.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석주가.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