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40화 (24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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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틀 동안 정신없이 치료하고 나니 석주의 몸엔 붕대와 기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진이 푸르스름하게 멍든 석주의 턱을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틀 내도록 씹어서 터진 입술이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으나 계속해서 여린 살을 괴롭혀 댔다.

그러고 있으니 꽃님이 포크로 사과를 쿡 찍어 내밀었다.

“사과 먹으라니까. 아니면 딸기 줄까?”

“아니. 됐어.”

“먹어, 이놈아.”

꽃님이 꾸역꾸역 아진이 손에 포크를 들려 주었다. 아진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꼭 움켜쥔 반대 손은 풀릴 줄 몰랐다. 꽃님이 온통 인상을 썼다.

“그건 왜 자꾸 만지고 있어. 징그럽게.”

아진이 움찔 손을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펼쳤다. 납작한 형태의 총알 두 개가 나타났다. 어젯밤, 석주의 몸에서 빼냈다며 의사에게 건네받고 내도록 손에서 굴리던 것이었다. 아무리 쥐고 있어도 차갑고, 괴상한 형태를 한 데다가, 꽉 쥐면 손바닥이 따끔할 정도로 모난 것인데 이상하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아진이 엄지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을 살살 굴렸다.

“이거 하나는 내가 맞았어야 하는 총알이다? 아니, 어쩌면 두 개 다.”

“…….”

“근데 석주 형이 대신 맞았어. 그래서 그런가. 가슴이 허-해.”

제 몸에 붙어 있던 것을 뽑아내 들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를테면 귀 한쪽이나 손가락 하나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랄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총알이 수십 년 전에 제 가슴에 박혔던 그 총알 같았다. 가슴 깊숙이 박혀서 저를 고통스레 하던 걸 뽑아 쥐고 있는 듯했다. 그래,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딱이었다.

아진이 총알을 다시 말아 쥐었다.

“이모.”

“응?”

“이만하면…… 석주 형 대충 용서 말고, 그냥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꽃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눈썹을 위로 올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어려워서 그래. 누굴 용서해 본 적이 없어서.”

“용서하고 싶어? 석주가 충분히 벌 받은 것 같아?”

아진이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면서 힘없이 펴진 석주의 손가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응. 충분히.”

“…….”

“어쩌면…… 내 상처보다 더 많이 아파한 것 같기도 해.”

다시 태어나서도 부득부득 제 곁에 있는 석주가 마냥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만 채운다고 생각했다. 근데 꽃님이 말한 문장 하나가 가슴께를 푹 꿰뚫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자기를 모르는 네 곁에서 널 지켜보고 있는 거.’

‘아주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석주를 대충 용서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 난장에서 욕심을 운운하는 기헌에게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말이 몹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미 모든 걸 포기했어.’

‘깡패 짓도, 친구도, 식구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내 아버지까지. 다 포기하고 아진이만 남겼어.’

병원에 있으면서 그 말을 유심히 곱씹어 봤는데. 정말 그랬다. 전생에는 석주의 삶에 저를 빼놓고도 아주 많은 게 있었는데. 지금 석주의 삶은 오롯이 제게 속해 있었다. 무엇 하나 저와 연관되지 않은 게 없었고, 그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저는 아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차이가 몹시 새롭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됐지, 뭐.”

꽃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무심하나 단호한 대답에 아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꽃님이 쥐여 준 사과를 아삭 깨물었다. 달큼하고 아삭한 게 참으로 맛이 좋았다. 아진이 남은 사과 반 조각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

“역시 겨울 사과가 맛있어.”

“왜. 요즘에는 여름 사과도 맛 좋아. 잘 키워서. 비싼 게 흠이긴 하지만.”

꽃님이 아진의 빈 포크를 가져가 다시 사과를 찍어 주었다.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여름 사과도 맛이 좋아?”

이곳에는 여름 사과도 맛이 좋구나……. 예전에는 퍼석하고 달지도 않고 헛바람이 들어서 별로였는데.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변한 걸 더할 나위 없이 인지하고 있었는데 사과까지 변했다니 신기했다.

아진이 먼 옛날, 소쿠리에 들어 있던 여름 사과 다섯 알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석주는 아진의 웃음을 꿈꾸었다. 긴지 짧은지 알 수 없는 꿈에 내도록 아진의 웃는 얼굴이 나왔다. 드문 일이었다. 대개 석주는 아진이 우는 얼굴을 꿈꾸는지라.

‘사장님. 콜라 하나 더 마셔도 돼요?’

그 말에 군말 없이 뚜껑을 따 주면 두 손으로 귀하게 받아 들고는 방글방글 웃곤 했다. 청량한 탄산의 따끔함이 입천장을 간질이면 눈썹을 어그러트리며 키득거리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으아, 무슨 약과를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어, 정말요? 꽃님이 아줌마랑 같이 먹어도 돼요?’

약과를 유달리 좋아했다. 퇴근길에 항상 한과 가게를 들러서 모양이 예쁘게 찍힌 약과를 신중히 골라 왔다. 그럼 아진이 다람쥐 같은 앞니로 약과를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가끔 제 눈을 피해 꽃님에게 줄 걸 주머니에 숨기는데, 그걸 본 이후로는 부러 두둑하게 사서 집 안 종들이 모두 함께 나눠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럼 또 ‘감사합니다’ 하고 방실방실 웃었다.

‘사장님 손은 어찌 이렇게 따뜻해요. 제 손도 사장님 반만큼만 따뜻했으면 좋겠다. 매일 만져 주시겠다고요? 좋죠. 근데 엉덩이는 왜 만져요. 엉덩이는 하나도 안 시리거든요. 손만 만져요, 손만. 아, 사장님! 안 시리다고! 미친놈아!’

차게 언 손발을 주물러 주면 배부른 고양이처럼 빙긋 웃다가 손이 엄한 데로 가면 냅다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방자하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잘도 하는데, 그가 내뱉는 욕설이 은근히 듣기 좋아서 부러 허튼짓을 하기도 했다.

‘사장님, 안녕히 주무세요.’

제 품에 안긴 채 싱긋 웃으며 밤 인사를 전해 오는 모습도 보았다.

‘사장님 팔뚝이 제 얼굴만 해요. 구렁이 같은 고추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사장님은 작은 게 없네. 저는 팔이 이렇게 가는데……. 꽃님이 아줌마가 솥 들다 부러질 것 같대요. 내가 마르고 싶어서 마른 것도 아닌데……. 짜증 나, 진짜……. 근데요, 사장님. 저 초콜릿 하나 더 먹어도 돼요?’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먹고 발간 얼굴로 겁도 없이 제 몸을 주무르다가, 초콜릿 하나 까 주면 그걸 쫍쫍 빨아 먹으며 해죽해죽 웃어 댔다.

그렇게 웃는 얼굴을 몇 개 더 보았다. 행복한 꿈이었다. 행복해서 꿈인 걸 알 수밖에 없는 꿈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말간 얼굴이 흐려진다 싶더니 꿈이 끊겼다.

석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병원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손등에 붙은 링거 테이프의 질감이나, 가슴과 어깨를 감싼 붕대나, 이마에 붙은 밴드의 존재감이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지면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전신을 뒤덮은 지끈거리고 욱신거리는 통각도 느껴졌다.

석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찍한 1인 병실에 사람 한 명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살집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반대 손에는 과일 껍질이 들어 있는 비닐을 든 채였다.

눈을 가늘게 뜬 석주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자는 여기저기를 쓸고 닦더니 한참 후에야 석주가 눈뜬 것을 발견했다. 꽃님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뜬 그녀가 다급히 다가왔다.

“어이구? 일어났네. 몸은 괜찮나? 의사 부를까?”

“어…….”

“괜찮다고. 으응, 다행이네.”

“그…….”

“아, 아진이 어디 있냐고? 집에 잠깐 씻으러 갔어.”

꽃님은 신통방통하게 묻지도 않은 질문에 잘도 대답했다.

“선화는 그 육시럴 놈들 관련해서 처리할 게 많아서 바쁘고, 정진이랑 미진이는 어제 왔었네. 아진이는 내내 여기 있었고.”

“아, 예. 아진이-”

“응, 아진이는 많이 안 다쳤어. 다리도 괜찮고, 뭐 까진 광대나 팔꿈치나 다른 곳도 흉터가 남을 정도는 아니라네. 이따 오면 물어봐. 곧 올 거야. 근데 어째 간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그사이 눈을 뜨나.”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진 꽃님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고는 적당히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왔다. 느리게 상체를 일으킨 석주가 까딱 묵례하고는 그것을 받아 마셨다.

꽃님은 그런 석주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석주가 물 한 잔을 다 비웠을 때. 난데없는 소리를 했다.

“다시 자는 척해.”

“……예?”

“자기가 없는 새 눈뜬 거 알면 아진이가 미안해할 거 아니야. 눈떴을 때 꼭 옆에 있어 주고 싶다고 했거든.”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석주가 얼떨결에 긍정했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꽃님이 간이 싱크대로 빈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설거지했다. 석주가 밴드가 붙은 이마를 더듬으며 물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오늘로 닷새짼가.”

꽃님이 천장을 보며 날을 헤아렸다. 닷새보다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석주가 새벽 늦게 실려 와서 날을 세는 게 어려웠다.

근데 어째 석주의 표정이 어두컴컴했다. 총을 두 방이나 맞고도 살아났으면 만세를 불러도 모자라거늘. 어째서 죽상인 건지 이해가 안 됐다.

“표정이 왜 그래. 의사가 말한 것보다 일찍 일어났구먼?”

설거지를 마친 꽃님이 물에 젖은 손을 옷가지에 툭툭 털어 내듯 닦으며 물었다. 석주가 두툼한 목울대를 크게 움직거렸다.

“아진이가…… 외로워했을 것 같아서요. 걱정도 많이 했을 거고.”

그 말에 꽃님이 석주를 뒤돌아봤다.

“닷새가 뭐 그렇게 긴 시간인가. 아진이 말짱해요. 걔가 맥없어 보여도 속이 제법 옹골차거든.”

“…….”

꽃님의 말에도 석주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그에 꽃님이 짝짝 손뼉을 치며 석주에게 다가왔다.

“자자, 다시 누워. 그리고 아진이 오면 낌새 좀 보다가 방금 눈뜬 척해.”

그녀는 석주의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고, 혹시나 해 침대 아래에 슬리퍼도 놓아 주었다. 그 후 소파에 놓인 자신의 백을 집어 들었다.

“강 비서 깼으니 나는 이만 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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