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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39화 (23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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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는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다. 총 한 방으로는 죽지 않을 사람임을 안다. 근데 두 번이나 총을 맞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다면…….

    아진이 버석하니 굳어 있는데. 석주가 아진의 어깨에 툭 얼굴을 묻었다.

    “너 정말 따뜻하다, 아진아.”

    그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석주의 등을 만져 보느라 붙였던 몸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석주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안고 있을게. 피 묻혀서 미안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겨, 경찰이 안 와요. 왜 안 오지. 혹시 우릴 까먹은 걸까요?”

    “푸흐……, 그럴 리가. 곧 올 거야.”

    “빨리, 빨리 와야 하는데.”

    구급차도 왔겠죠? 의사는요? 의사도 같이 왔을까요? 아진이 더듬더듬 석주의 등을 매만졌다. 그러다 움푹 들어간 상처를 발견하고는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작약한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반대 손으로는 석주의 옆구리도 압박했다.

    그러고 있으니 사무치게 두려워졌다. 옆구리만 누르고 있을 땐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 이 두 손으로 석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석주의 피가 너무 무서워 까무러칠 것 같았다.

    아진이 눈물을 줄줄 쏟아 냈다. 갑자기 석주의 죽음이 머리 위로 훅 쏟아졌다.

    “형……. 흐으, 형……. 죽지 마요……. 죽으면 안 돼요…….”

    “아진아.”

    “나를, 나를…… 흐윽, 혼자 두지 마요…….”

    아진이 떨구는 눈물이 석주의 귓가로, 어깨 너머로, 가슴 언저리로 떨어졌다. 그에게 기대어 있던 석주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적당히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죽지 않을게.”

    “흐으…….”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형…….”

    “더는 네게 거짓말하지 않아.”

    석주가 울음에 떨리는 아진의 뒤통수를 크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턱 끝에 아롱아롱 예쁘게 매달린 눈물을 검지로 조심히 닦아 냈다.

    “그러니 울지 마.”

    “…….”

    “나 때문에 울지 마.”

    “으욱…….”

    “나 같은 거 때문에 울지 마.”

    석주가 간곡히 부탁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아진의 울음은 더욱 거세졌다. 눈가까지 어그러트리고, 울음에 달아오른 습한 숨을 내뿜으며 서럽게 울었다. 그 와중에도 석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그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석주의 눈썹이 덩달아 일그러졌다.

    “아진아, 제발…….”

    석주가 눅눅하게 젖은 아진의 뺨을 따라 입을 맞췄다. 허나 아진의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양손으로는 석주의 상처를 틀어막고, 눈으로는 석주를 살피면서도 주르륵주르륵 눈물을 떨어트리는 모습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석주가 이를 아득 물었다. 아진의 눈물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이다. 제가 죽지 않는 것. 그리고 기절하지 않는 것. 여기서 까무러치기라도 했다간 저보다 아진이 먼저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 사무실 문에 달린 자그마한 창으로 쨍한 손전등 빛이 장검처럼 공간을 크게 베고 지나갔다. 왔구나. 석주가 아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진을 바짝 안았다. 그 후 열이 올라 뜨끈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다독임에 거칠던 아진의 호흡이 한층 고요해졌다. 석주가 옅게 웃으며 시선을 맞췄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릴 때였다.

    툭.

    석주가 아진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아진의 만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증발했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그가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로 입을 벌리는 그 순간.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태양처럼 환한 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석주를 껴안은 아진이 눈물로 점철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시간의 궤도

    -서울 종로 경찰서는 그제 밤 새벽 2시 20분쯤, 모처의 한 폐공장에서 마약을 제조하고 판매하던 조직을 검거했습니다. 이 조직은 중호파라고 불리며, 대범하게도 국내에서 마약을 제조하고, 불법 유흥업소를 운영하며 마약을 판매해 왔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정명희 기자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명희 기자.

    -예, 정명희 기자입니다. 이곳은 그제 검거된 중호파의 약 공장 중 한 곳입니다. 중호파는 JH 무역이라는 회사를 통해 필로폰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국내로 들여왔으며, 이곳 공장에서 제조 후, 서울 내 7개의 클럽과 3개의 호텔에서 판매했습니다.

    -종로 경찰서는 수개월 전부터 이 조직을 조사해 왔으며, 그제 밤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은 중호파의 우두머리인 박 모 씨와, 박 씨의 아들, 그리고 수많은 조직원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곳입니다. 당시의 위험한 상황을 알려 주듯 창문이 깨져 있고, 핏자국이 즐비합니다.

    -종로 경찰서는 조직 전원을 검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나, 범인들이 총기를 소유하고 있어 이례적으로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중호파는 일반 시민 두 명을 인질로 잡고 있었으며, 다행히 시민들은 모두 안전히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총격전에 중호파의 우두머리 박 씨와 조직 간부에 해당하는 박 씨의 아들 등, 열일곱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중호파가 소유하고 있던 마약은 필로폰⋅코카인 등이었으며, 완성된 제품과 재료를 포함하면 수백 킬로그램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약 8만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며 소매가 600억 상당입니다.

    -이에 이순욱 경찰청장은 “국내에서 마약을 제작해 판매한 조직은 70년 만에 처음”이라며 참담한 심정을 밝혔으며 “철저한 경계와 꼼꼼한 수사로 마약에 청정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정명희 기자였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젊은 청년들 사이에 마약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중호파 사건을 연계로, 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된 2~30세 청년들이-

    TV 화면이 뚝 꺼졌다. 동시에 병실이 적막해졌다. 그런데도 아진은 검은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투박한 손이 테이블 위로 리모컨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보지 마, 보지 마. 속 시끄럽게 그걸 뭐 하러 보고 있어. 생전 뉴스라고는 안 보던 놈이.”

    “이모.”

    “선화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꽃님이 과일이 올라간 쟁반을 들고 아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잘 깎인 사과 접시를 아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나 먹어.”

    아진이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러면서도 정작 포크는 집지 않았다. 꽃님이 코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아진의 무릎을 슥슥 쓰다듬었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붕대가 칭칭 감긴 다리는 보기만 해도 아팠다. 의사 호로 잡놈이 근육도 뼈도 멀쩡하다, 타박상 정도다, 나불거려 놓고는 붕대를 저만치 감아 두었다.

    꽃님의 미간이 걱정으로 한껏 구겨졌다.

    “다리는 안 아파?”

    “응.”

    “춥지는 않고?”

    “춥기는…….”

    아진이 작게 웃었다. 꽃님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의 무릎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아진이 한겨울에도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닐 만큼 체온이 유난스레 높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쓰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더워서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두꺼운 붕대 때문에 긴바지가 불편해서 반바지를 입고 있으니 아주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거기다 고운 뺨에 묻어난 생채기하며…….

    꽃님이 과도를 꽉 움켜쥐고 허공을 찌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휴, 육시럴 새끼들. 눈앞에 있었으면 배때기를 칼로 확 쑤셔 주는 건데.”

    그 말에 아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맞아. 이모는 진짜 배때기를 칼로 쑤셨을 거야.”

    화가 많고 성격이 괄괄하긴 해도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손찌검은 안 하는 꽃님인데. 저와 관련된 일엔 눈을 치켜뜨고 피를 봤다. 전생에도 그랬다. 석주의 배에 냅다 유리를 쑤셨었지.

    아진이 먼 과거를 떠올리며 키득거리는데. 꽃님이 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붕대는 언제 풀어 준다던?”

    “사나흘 정도 있다가.”

    “절뚝거리면서 걷는 거 안 힘들어?”

    “힘들어.”

    아진이 곧장 대답했다. 제가 절름발이로 살아온 시간과 멀쩡한 두 다리로 살아온 시간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 오랜만에 절뚝절뚝 걸으려니 참 힘들고 불편했다. 짝짝이 다리로 고단한 일을 하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던 그때가 신기할 정도였다.

    아진이 다리를 쭉 폈다가 접었다. 붕대를 내려다보는 낯이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며칠 후면 사라질 불편이잖아.”

    기약 있는 불편은 비극적이지 않다. 특히나 아진은 참고 견디는 걸 퍽 잘하는 편이었다. 일이 년 다리를 절어야 한다고 했어도 담담했을 텐데 고작 사나흘 불편한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에 끝이 있기만 하면 됐다.

    “…….”

    꽃님이 무덤덤한 아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과장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어른 흉내 내기는.”

    “나 어른이야.”

    아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얼굴이 어찌나 애 같은지. 꽃님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녀를 따라 미소 짓던 아진이 침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퍽 시끄러운 대화였는데도 석주의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진이 석주의 코 아래로 슬쩍 손을 대 보았다. 은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푹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주는 이틀 새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차에 치여 다친 이마와 총상을 한 번에 수술할 수가 없다나. 그 밖에도 맞아서 생긴 타박상과 금 간 어깨뼈, 케이블 타이에 짓눌려 찢어지다시피 한 손목까지 치료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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