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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38화 (23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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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헌의 눈썹이 알게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석주가 무릎으로 기헌의 손목을 지그시 짓눌렀다. 단단하게 도드라진 무릎이 살을 납작하게 뭉개고, 묵직한 무게가 뼈를 으스러트릴 듯 압박해 왔다.

    “으아아악!”

    기헌이 소리를 질렀다. 손이 절로 위로 쳐들렸다. 가히 손목이 절단되는 듯한 고통이었다. 석주가 무표정하게 일그러진 그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우리가 다음 생에 또 만날 거라고 했지? 그래. 만나지. 그땐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석주가 무릎을 거두었다.

    “크흐…….”

    기헌이 손목을 가슴 쪽으로 모으며 신음했다. 그러다 석주를 노려보려는데. 목에 뭐가 감겼다. 질긴 밧줄이었다. 석주의 손목과 문고리를 연결해 두었던 그 밧줄이었다.

    석주가 그것으로 기헌의 목을 두 바퀴 돌려 옭아맸다. 그 후 반쯤 일어나서, 발로 기헌의 명치를 짓눌렀다. 기헌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속박을 확인한 석주는 줄의 반대쪽 끝을 정면에 있는 커다란 철제 책상다리에다 묶었다.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주어 꽉꽉 묶었다.

    기헌이 초점 없는 눈으로 그 행위를 목도했다. 석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경찰이 올 때까지 묶어 두려는 건가, 싶었다.

    근데. 석주가 기헌의 멱살을 양손으로 움켜쥐더니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장신의 성인 남성을 들면서 힘들어하는 기색일랑 없었다.

    석주는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유리창이 죄 깨져 버린 창틀에다 기헌을 빨래처럼 걸어 놓았다. 팔은 창밖으로 떨어졌고, 다리는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들렸다.

    겨울바람 특유의 휑하고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의 이마를 두들겼다. 그리고, 빨간 레이저가 두 사람에게 와르르 몰렸다.

    낡은 건물 외벽에 들꽃처럼 피어난 레이저에 기헌이 겁을 집어먹었다. 그가 사지를 퍼덕거렸다. 고개도 요란하게 이리저리 돌렸다.

    “가, 강 사장. 뭐, 뭐 하려고 이러나? 응?”

    석주가 갯장어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등을 아래로 짓눌렀다. 그는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레이저 포인트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쏘지 않을 걸 아는 것처럼.

    허리를 접은 석주가 기헌의 귓가에 속삭였다. 겨울바람과 뒤섞인 저음이 기헌의 관자놀이를 날카로이 들쑤셨다.

    “당신이 케케묵은 분노를 버리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돌고 돌 거야. 계속해서. 빙글빙글.”

    “강 사장? 강 사장!”

    “그 반복 속에, 당신은 항상 패배할 거고, 그 패배는 영원히 당신을 좀먹겠지.”

    “강 사장!”

    “그러니까 이번에 죽으면서 잘 생각해 봐. 어떤 게 당신의 다음 삶에 도움이 될지.”

    석주가 기헌의 허벅지를 쥐어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기헌이 창밖으로 훅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야, 이 개새끼- 커허헉!”

    기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그의 목에 묶여 있던 줄이 휘리릭 함께 딸려 가더니, 곧 팽팽하게 늘어졌다. 그러길 잠깐. 줄 반대쪽이 묶여 있던 책상이 끼긱끼긱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뒤틀렸다. 곧 묵직한 그것이 드르르륵 창으로 끌려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쿵, 하고 벽에 부딪혔다.

    석주가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벽에 대롱대롱 달린 기헌이 목을 움켜쥔 채 꺽꺽거리고 있었다. 꼭 세로로 매달린 굴비 같았다. 핏줄이 온통 터진 눈알이 영 보기 불편했다.

    “또 봅시다, 박 사장님.”

    석주가 후우 -하고 긴 숨을 내뿜었다. 담배 연기처럼 희뿌연 입김이 물씬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입김이 네댓 번쯤 뿜어졌다 사라졌을 때. 기헌의 발악이 멈추었다.

    석주의 입술이 비죽 뒤틀렸다.

    “씨발 새끼.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지.”

    사실 아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팔도 다리도 다 잘라서 죽이고 싶었다. 아까 진걸이 뭐라고 했더라. 노잣돈으로 아진이 손가락을 잘라서 제 입에 넣어 주겠다나. 그것도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기헌의 입에 진걸의 손가락이나 눈알을 넣어 줄까 잠시 고민했었는데.

    그 짓을 아진의 앞에서 했다간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기헌을 아예 시야에서 치워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기헌의 죽음을 확인한 석주가 창밖의 어둠 어귀를 응시했다. 그러자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붉은색 레이저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석주가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고 아진을 향해 다가갔다. 헌데 옆구리가 뜨끈뜨끈했다. 석주가 슬쩍 자신의 옆구리를 문질렀다. 시뻘건 피가 묻어났다. 아까, 기헌이 쏜 총알이 박힌 곳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는 거로 보아 내장 어디에 제대로 구멍이 난 모양이었다.

    “…….”

    석주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죽은 깡패의 재킷을 들쳤다. 허리춤에 달린 회칼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석주가 그것을 쑥 빼냈다. 그 후 아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단은 아파 보이는 발목부터 풀어 주었다. 그 후 손목을 끊어 주고 칼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아진을 조심히 일으켜 입술에 붙은 테이프를 살살 떼 주었다.

    “하아…….”

    아진이 가늘게 탄식했다. 석주가 그의 입가를 쓰다듬으려다, 손에 피가 묻어 있어 말았다. 그가 아진의 다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다리. 다리 좀 보자, 아진아.”

    피 묻은 손이 마른 무릎과 정강이를 조심히 더듬었다.

    “많이 아프지? 그래도 부러지진 않은 것 같다. 다행이야. 하, 정말 다행이야…….”

    손끝으로 느껴지는 다리가 부어오르거나 뒤틀리지 않았다. 부러졌다면 만지자마자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을 텐데. 아진은 담담했다. 재차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주가 아진의 무릎을 소중하게 보듬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최진걸을 들쑤셔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진걸이 총이나 칼로 아진의 다리에 해코지를 했다면 아진은 전생 때처럼, 혹은 그보다 더 힘들게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 무엇보다 아진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했어야 했는데. 등신같이 저도 분노에 휩싸여선 그를 위험하게 했다.

    석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진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눈꺼풀이 대번에 무거워졌다. 그러나 경찰이 올 때까지 아진을 혼자 둘 순 없는지라 꾸역꾸역 눈을 치켜떴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끝난 상황에, 허탈할 정도로 단숨에 죽어 버린 진걸과 기헌에 혼이 다 빠졌다.

    그러다 문득, 축축한 액체가 손끝을 스쳐 왔다. 아진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뜨끈뜨끈하고 질척한 액체. 피였다.

    아진이 다급히 석주를 살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석주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어두운 시야 탓에 상처가 또렷이 보이진 않았으나 번들거리며 무언가가 꾸물꾸물 새어 나오는 건 보였다.

    아진이 튕기듯 석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석주의 배를 꽉 눌렀다.

    “큭…….”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석주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총…… 총 맞은 거죠?”

    아진이 반쯤 쉰 목소리로 추궁했다.

    “괜찮아.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네 걱정이나 해.”

    석주가 아진의 무릎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나도 이딴 거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형 걱정이나 해요.”

    아진이 자못 음산하게 으르댔다.

    “하하…….”

    석주가 나직이 웃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다리를 다쳤으면서 용맹하기도 하지. 너도 강해졌구나. 기특하네. 그런 생각을 했다. 말똥한 아진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차게 식는 몸 위로 내려앉은 그의 뜨끈한 체온도 좋았다.

    석주가 슬쩍 눈을 감았다. 점점 눈 뜨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제가 내쉬는 숨소리가 매우 크고 거칠게 들려왔다. 심장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잤으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아진이 옆구리를 더 세게 눌러 왔다. 윽, 석주가 낮게 신음하며 한쪽 눈만 슬쩍 떴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보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죽지 마.”

    “…….”

    “또 나 혼자 두고 죽어 버리면, 가만 안 둬.”

    아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악착같이 홉뜬 눈동자 위로 눈물이 일렁였다.

    아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석주가 죽던 그 순간을. 항상 뜨겁던 그가 제 품에서 식어 가던 그때를. 맥없이 늘어졌던 커다란 손을. 끊긴 시선과, 목소리와, 숨결을.

    손가락을 적시던 그의 미적지근해진 피를. 그리고 제게 쏟아지던 수많은 감정이 단숨에 사라져 버린 그 찰나를. 부유하는 공기 한 점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제 가슴을 꿰뚫은 총알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만큼 오롯이 석주의 죽음에 매몰됐었다. 아니,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석주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 와중에도 석주의 죽음은 몹시 충격적이었고, 괴로웠다.

    아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좌절감과 상실감을 다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럴 자신도 없었다. 전생에 고작 십수 초 그의 죽음을 떠안고 있는 것도 고달팠다. 헌데 지금 석주가 죽어 버리면 십수 년, 아니 수십 년을 그의 죽음을 안은 채 살아야 했다.

    아진이 석주의 옆구리를 더 세게 누르며 그와 강압적으로 시선을 맞췄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용왕님한테 빌 거야. 다음 생엔 형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아진아.”

    “그러니까 나 계속 보고 싶으면…… 살아. 어떻게든 살아.”

    “……그래.”

    석주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에 아진의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을 그리며 올라갔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미친놈 아니야!”

    그 말에 석주는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고야 말았다. 바락바락 소리치는 아진이 어찌나 예쁘고 감사한지.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아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좋아서 그래, 좋아서. 네가 내 죽음을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먼 옛날에는 아진에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었다. 근데 지금은 이토록 지극한 걱정을 받고 있지 않나. 좋지 않을 이유도, 웃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

    아진이 석주를 힘껏 노려봤다. 다치지 않았다면 정신 차리라며 뺨이라도 내리쳤을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손가락 사이로 석주의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왔다.

    아진이 상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데. 뭐가 좀 이상했다. 석주의 와이셔츠가 피로 온통 젖어 가는데. 어째 옆구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팔뚝까지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팔이 왜……, 까지 생각하다 한참 전, 석주가 어깨에도 총을 맞았음을 인지했다. 아진이 얼른 석주의 등 뒤로 팔을 뻗었다. 이미 손이 그의 피로 점철되어 있는데도 등이 젖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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