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37화 (23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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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걸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제가 왜 아진을 미워했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반면 감정은, 분노는 더욱 또렷해졌다. 점점 더 짙어지더니 지금은 통렬할 정도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진이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웠는데. 지금은 그것으로 안 됐다. 아진이 아주 불행하길 바랐다. 엉망진창으로, 비루하고 남루하게 살다가 외롭게 죽길 바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생처럼 말이다.

    진걸의 입매가 푸르르 경련했다. 그러다 어금니를 아득 짓씹으며 뻑, 뒤꿈치로 아진의 정강이를 내리찍었다. 몸을 마구 뒤틀던 석주가 눈을 부릅떴다.

    “으후윽!”

    아진이 괴롭게 신음했다. 그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욱신거리는 다리가 소름 돋게 끔찍했다. 고통이 괴로운 게 아니라 다시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괴로웠다.

    근데 진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피하면 어떡해.”

    발을 내리찍는 순간, 아진이 허리를 뒤로 물리며 다리를 빼 버리는 바람에 발길질이 한 끗 차이로 엇나갔다. 발 앞축이 다리를 찍긴 했으나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진걸이 발로 아진의 가슴을 쭉 밀어 벽에 붙였다. 도망갈 수 없게 하려는 거였다.

    그리고 다시 발을 들었다. 아진은 눈을 질끈 감았고, 석주는 악을 내지르며 어깨에서 흐른 피가 손끝에 맺혀 뚝뚝 떨어질 때까지 몸을 뒤틀었다. 그러다 마침내 투툭, 케이블 타이를 끊어 냈을 때였다.

    “……진걸아?”

    돌연 기헌이 허공에 붕 뜬 듯한 음성으로 진걸을 불렀다. 그 부름에 진걸이 고개를 돌리는데. 그의 미간 한가운데에 붉은 점이 묻어 있었다. 누가 볼펜으로 콕 찍어 놓은 듯한 점이었는데, 레이저 빛이었다.

    그 괴상한 점에 기헌이 턱을 앞으로 쭉 내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레이저가 오른쪽 눈의 동공과 정확히 맞닿아 왔다. 쨍한 붉은빛에 진걸이 눈살을 찌푸리려는 찰나. 파삭, 창문이 깨지더니 푹. 뭔가가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진걸의 오른쪽 눈에 붉은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에서 질퍽한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진걸이 허탈하게 탄식했다. 그러더니 딱딱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처럼 일자로 철퍼덕 쓰러졌다. 아직 감정과 혼이 남은 한쪽 눈동자가 아진을 응시했다. 아진이 그 기이한 눈을 넋 놓고 마주했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입이 막힌 아진은 물론 석주와 기헌도 그 밖에 깡패들까지. 꿈이라도 꾸는 듯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건 기헌이었다.

    “진걸아!”

    그가 튕기듯 일어나 달려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진걸을 껴안았다. 그러나 진걸은 이미 죽은 후였다. 눈알 하나가 없이 움푹 파여 있는 모습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지, 진걸아. 진걸아…….”

    기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걸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도 못 감고 죽어 버린 아들. 결국 전생의 그 모습 그대로 죽어 버린 아들. 평생을 복수 하나만 보며 살아왔는데 이번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한 아들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기헌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진을 노려봤다. 분노가 엉뚱한 데로 튀었다. 그가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총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때. 무릎을 꿇고, 손을 뒤로 맞잡은 채 있던 석주가 나직이 입을 뗐다. 아진에게 쏠린 분노를 옮겨 오기 위함이었다.

    “2023년 대한민국에서 마약 제작과 유통은 무기징역감이야.”

    “……뭐?”

    “무기징역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나?”

    “…….”

    “체포하다가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사살해도 문제가 없다는 말이야.”

    고로 너희는 여기서 다 죽어. 석주가 입을 씩 벌리며 웃었다. 피를 한껏 뒤집어썼음에도 잘생긴 얼굴이 빙글빙글 기헌을 비웃었다.

    기헌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무언갈 고심하듯, 석주와, 죽은 진걸과, 그리고 총알이 날아온 깨진 창문과, 자신의 다리 사이로 스멀스멀 퍼져 나가는 진걸의 피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석주를 따라 큭큭거리며 웃더니, 재킷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내 이번엔 강 사장을 죽이지 않을 거야.”

    “…….”

    “아진이 저놈만 죽일 거야.”

    “…….”

    “강 사장은 쭉- 살아. 계속 살아. 살아서 아진이 저놈의 죽음을 곱씹어.”

    그의 총이 아진을 가리켰다. 총구가 탁하게 번뜩이는 순간. 와장창! 창문이 박살 나고, 푸부북!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석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온몸으로 기헌을 들이받았다.

    탕! 묵직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깡패들이 철퍼덕철퍼덕 쓰러졌다. 도망치려 했지만 석주가 케이블 타이를 끊으며 문고리를 박살 내 놓은 터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덩치 좋은 장정들이 쓰러지니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짧은 찰나, 사무실은 유리와 피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명이 박살 나면서 공간이 새까맣게 죽었다. 총성이 멈추고, 그 검은 공간에 거친 숨소리와 고통 섞인 신음이 넘실거렸다. 입이 막힌 아진은 코로 훅, 후욱 숨만 내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음이 줄어들었다. 신음을 흘리던 깡패들이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아진은 검은 어둠을 눈으로 헤치며 석주의 행방을 쫓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총에 맞은 건 아니겠지. 어스름히 보이는 시체들 사이에 그가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게 어둠을 뒤지는데.

    “내가 뭘 했어.”

    저 멀리서 석주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그쪽으로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깨진 창문 아래, 허리춤까지 오는 벽 언저리에 두 사람의 인영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 위로 가로등 특유의 주홍빛이 은근히 내리쬐었다.

    기헌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석주는 그의 위에 올라타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의 목젖을 짓누르고 있었다. 석주의 눈동자에 시뻘건 분노가 넘실거렸다.

    “내가, 아진이가, 우리가 당신한테 대체 뭘 잘못했어.”

    “큭…….”

    “왜 수십 년 전에 끝난 화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이렇게 피를 봐.”

    석주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치미는 화를 추스르지 못하고 기헌의 목을 쥐어 올렸다가 벽에 쿵쿵쿵 처박았다.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선득했다. 그 소음 끝에 묘하게 물기가 묻어났다. 살이 터지고 피가 묻어나는 소리였다.

    “씨, 씨바알…….”

    얼굴이 시뻘게진 기헌이 두 팔로 석주의 턱을 밀어 내고, 그의 팔뚝을 긁어 댔다. 허나 석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반대 손으로 기헌의 눈썹뼈 아래에 엄지를 박아 넣었다. 안구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기헌이 세상이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냥…… 조용히 살지, 이 개새끼야.”

    “아아아악!”

    “왜 또 아진이를 우리 싸움에 끌고 와서-”

    “이 씨발! 강 사장!”

    기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절규였다. 석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눈알을 누르던 손을 거두었다. 목을 움켜쥐고 있던 아귀힘도 슬쩍 풀어 주었다. 기헌이 커허헉, 하며 돌덩이처럼 단단한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호흡을 갈무리하던 기헌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질퍽한 침이 그의 입가로 질질 새어 나왔다.

    “강 사장은 예나 지금이나 욕심이 참 많네.”

    “뭐?”

    “이것도 가지고 싶고, 저것도 가지고 싶고…….”

    석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데없는 소리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기헌이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꺾어, 죽어 버린 진걸과 구겨져 있는 아진을 바라봤다.

    “왜 자꾸 우리한테만 포기하라고 하나. 자네가 포기하면 되지.”

    “……뭘?”

    “알잖아. 아진이.”

    석주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기헌의 눈동자에 꽁꽁 묶인 사지로도 뭘 해 보겠다며 꿈틀거리는 아진이 비쳤다.

    “자네가 아진이 저놈을 포기했다면, 쟤가 여기 있었을까?”

    “…….”

    “이번에도 결국엔 강 사장 자네 탓이야. 자네가 기어이 또 저 불쌍한 놈을 탐내서, 욕심내서, 꾸역꾸역 곁에 둬서 내가 쟤한테까지 손을 뻗게 하지 않았나. 자네를 무너트릴 가장 쉬운 방법이 아진이 저놈이니까.”

    “…….”

    “자네가 아진이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음 생에 또 이렇게 만날 거고, 또 우리 싸움에 저 불쌍한 놈이 끼게 될 거야.”

    “…….”

    “그러니-”

    “틀렸어.”

    석주가 기헌의 목을 지그시 압박했다. 아진에게 향해 있던 기헌의 시선이 석주에게로 돌아왔다. 석주는 그 쿰쿰하고 역겨운 시선을 쏘아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모든 걸 포기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편협한 시선으로 나불거리는 꼴에 짜증이 났다. 당장에 혀를 뽑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깡패 짓도, 친구도, 식구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내 아버지까지. 다 포기하고 아진이만 남겼어.”

    “큭…….”

    “그렇다고 내가 아진이를 가졌냐? 아니야. 그것도 틀렸어.”

    석주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아진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진이한테 날 줬을 뿐이야.”

    “…….”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어.”

    석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어질어질했다. 며칠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눈두덩이 무겁고, 사지 끝이 차갑다 못해 아렸다. 중력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과다 출혈. 이 역시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석주가 콧잔등을 구기는데. 기헌이 그런 석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허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알던 강 사장과 달라지긴 한 것 같군.”

    정말…… 달라지긴…… 했어. 그가 주절주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조용히 팔을 뻗었다. 시선은 석주에게 박혀 있으면서 손끝은 분주하게 바닥을 더듬었다. 총을 찾는 거였다. 이쯤에 떨어졌던 것 같은데.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러다 툭, 검지 끝에 익숙한 질감이 닿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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