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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헌이 고개를 옆으로 잔뜩 꺾었다. 석주가 머리를 고꾸라트리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진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는데. 차에 치인 데다가 흠씬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기절이라도 한 건가. 기헌이 깡패에게 석주의 얼굴을 들어 보라고 명령하려는데.
큭큭…….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석주의 웃음소리였다. 공간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두가 석주를 쳐다봤다. 하나같이 심각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석주만 웃고 있었다. 웃음에 따라 그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진걸의 입이 비죽 뒤틀렸다. “저 새끼가…….” 그가 석주를 향해 가려는데. 석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로 진걸을 응시했다.
“박진걸. 1993년 7월 8일생. 성익대 졸업, 현 호텔 매니저. 호텔 고객에게 필로폰을 비롯한 마약 판매. 호텔 내 마약 거래 장소 제공. 차명으로 C클럽 운영 중.”
석주의 시선이 그대로 기헌에게 옮겨 갔다.
“박기헌. 1966년 4월 21일생. 고졸, 중소기업인 JH 무역 사장. 회사를 이용해 필로폰, 코카인 등의 마약 재료 수입 및 판매. 중호파 우두머리. 현재 종로경찰서에서 수배 중.”
줄줄이 읊어지는 정보에 기헌의 뺨이 단단하게 굳었다. 석주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내렸다.
“너희만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야. 나도 너희를 지켜보고 있었어.”
아진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악연들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아진의 손목시계를 훔치려 했던 창두였고. 그리고 어느 날, 아진이 아는 누군가를 만났다 했을 때. 석주는 곧장 그가 진걸임을 알아냈고 그를 파고들어 기헌까지 찾아냈다.
다만, 쉽게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전생에 제가 금 사장을 죽여 버려 모든 게 어그러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진걸과 기헌을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그 부스럼이 아진에게 칼이 되어 돌아올까 봐.
이전처럼 제 죄로 괜한 아진이 다치고, 피를 흘릴까 봐 무서워서. 제 행동으로 진걸과 기헌이 아닌 또 다른 악연이 등장할지도 몰라서. 생을 두 번이나 살았어도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는지라 일단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지 말걸. 그냥 냅다 먼저 치는 거였는데. 우물쭈물한 탓에 결국 이리되고 말았다. 다 제 불찰이다.
석주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얼굴을 뒤덮은 피가 굳어서 하관을 움직이기가 뻑적지근했다. 맞아서 터진 입가를 혀로 슬쩍 핥은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에 매몰되어 있으면, 과거를 잊기가 참 힘들어. 그렇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진걸이 가래가 낀 듯 잠긴 음성으로 되물었다.
“너희가 아직 1950년도에 살고 있단 뜻이야. 내가 그랬듯이.”
진걸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전히 석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낯이었다. 석주가 삐뚜름히 그를 올려다봤다.
“나는 더 이상 깡패가 아닌데, 왜 너희와 치고받고 싸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경찰이 있잖아. 범죄 신고는 112. 몰라?”
“…….”
“오는 길에 너희의 신원, 그리고 소유한 클럽, 약 공장, 회사를 비롯해 모든 장소를 신고했어. 물론 이 비루한 마약 창고까지 포함해서.”
그 말에 진걸을 포함한 깡패들의 얼굴에 낭패가 스몄다.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으며 쑥덕거리거나 창밖을 곁눈질하는 부산을 떨었다. 그에 기헌이 발바닥으로 탁탁 바닥을 두드렸다.
“하, 강 사장. 나 전생까지 하면 50년 가까이 뽕 장사로 먹고산 사람이야. 내가 어떻게 뽕 장사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신고, 그깟 거 해 봐야-”
“경찰한테 푼돈 조금 먹였겠지. 마약반 형사들 몇이랑, 경위나 경감들 몇에게. 주기적으로 사과 상자도 주고, 만나서 술도 마시고, 형제네 가족이네 하면서 낄낄거렸겠지.”
석주가 기헌의 말허리를 뚝 자르고 들어갔다. 기헌의 입매가 버석하니 말랐다. 석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나타내는 반응이었다. 석주가 픽 조소했다.
“그게 너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
“그래, 뭐. 적당히 필로폰 따위나 팔고 다녔으면 푼돈 찔러 주는 거로 별 탈 없었을지도 몰라.”
“…….”
“근데 결국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네.”
석주가 찬찬히 깡패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기헌을 보며 신랄한 욕설을 짓씹었다.
“병신.”
발전이라고는 없는 새끼. 편협하고 치졸한 새끼. 나보다도 아둔하고 멍청한 새끼.
석주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기헌과 진걸은 그 미소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묶여 있는 주제에 승리한 듯 구는 석주의 기백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석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텁텁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마약이 불쾌했다. 전생에는 때때로 약을 했었는데. 이게 이렇게나 낯설어질 줄이야. 저도 참 많이 변했다. 그래서 여전히 1950년도에 머물러 있는 기헌, 진걸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어 낸 그가 기헌을 직시했다.
“과거에 사로잡힌 너희들의 실수는, 이 자리에 아진이가 있게 했다는 거야.”
“…….”
“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근데 아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하면 안 됐지.”
그 말에 기헌이 넋 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하하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뭐야. 그런 이유야? 강 사장도 사람이 참 시답잖아.”
진걸도 그랬다.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느슨히 푼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탈할 만큼 하찮은 이유였다. 고작 절름발이 종놈 하나 두들겨 팼다는 이유로 이 통쾌한 복수극을 폄하하다니.
진걸이 석주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뒤틀며 한껏 비아냥댔다.
“우리가 아진이를 건드려서, 화난 형님이 우리를 다 쓰러트리고 아진이를 구해서 여기를 나간다, 뭐 그런 뜻입니까?”
형님 영화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더니 지금 영화라도 찍는 줄 아는 겁니까?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근데, 석주가 그를 따라 웃었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엔, 내가 아니더라도 아진이를 지켜 줄 사람이 아주 많거든.”
“…….”
진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아진을 휙 쳐다봤다. 비로소 석주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석주가 진걸 쪽으로 은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읊조렸다.
“아진이가 그때의 그 아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야지. 어떤 집의 어떤 자식인지 똑바로 인지했었어야지.”
아진은 그저 그런 가정의 그저 그런 자식이 아니다. 선화의, 그러니까 현성 그룹 회장의 자식이다. 현성 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몸집이 컸으며, 그만큼 파급력 역시 어마어마했다. 기헌이 친근하게 지낸다는 경찰들은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차⋅장관급 사람들을 친구인 척 ‘부리며’ 사는 존재들이란 말이다.
그런 집에서 애지중지 키운 아진을 다치게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진이는 너랑 달라.”
“…….”
“훨씬 귀한 몸이고, 사랑받는 존재야.”
아진의 이름이 경찰서에 언급되는 순간, 곧장 선화의 귀에 들어간다. 창두 때도 그러했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제가 경찰에 신고하며 아진이 위험하다는 말을 똑똑히 전했으니까.
석주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 턱을 살짝 위로 올리고, 기헌을 깔보듯 바라봤다.
“박 사장님. 하나 생각하면 다른 건 생각 못 하는 붕어 대가리는 여전하네.”
전생에도 그랬다. 그저 자신의 힘과 권력에 취해 어떻게든 밟고 짓누르면 이긴다고 생각하는 그 단순함. 기헌은 절대 제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애당초 이순이라는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별 볼 일 없었을 사내이다. 조력자가 너무 뛰어난 탓에 놀아났던 거지, 이순이 없는 현세에. 정확히는 석주가 이순이 사랑하는 금 사장을 죽이지 않아 그녀와 얽히지 않게 된 상황에. 기헌은 별 볼 일 없고 시시한 악역에 불과했다.
“뭐라? 부, 붕어?”
기헌의 얼굴이 온통 구겨졌다. 석주가 그를 비웃듯 입꼬리를 당기는데. 진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석주 위로 짙게 드리웠다.
“그래요, 형님. 경찰이 올 수도 있지. 와서 우리를 싹 다 잡아갈 수도 있지.”
“…….”
“근데 그전에. 내가 아진이 다리 하나는 박살 낼 수 있지 않겠어요?”
진걸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 말에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걸은 그 등신 같은 표정이 즐겁다는 듯, 킬킬 웃더니 아진에게로 다가갔다. 그 발걸음이 춤추듯 경쾌하듯 가벼웠다.
“우흐우…….”
아진이 몸을 뒤척거리며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바닥을 기는 수준으로는 진걸을 피할 수 없었다. 진걸이 구둣발로 아진의 배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 골반을 짓누르고, 허벅지에 구두 밑창을 슥슥 닦더니 석주를 쳐다보며 눈썹을 올렸다.
“……하지 마. 하면 넌 죽어.”
석주가 잠긴 목소리로 으르댔다. 진걸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주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단단하던 음성이 삽시간에 뭉그러졌다.
“하지 마.”
“…….”
“하지 마, 제발.”
“…….”
“내 다리를 부숴. 팔을 잘라도 좋아. 그러니 아진이는 건드리지 마. 제발…….”
진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진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기어코 아진에게 손을 대려는 모양이었다.
석주가 팔뚝에 힘을 줬다. 케이블 타이를 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질긴 고무는 피부를 파헤치기만 할 뿐, 끊길 기미가 없었다. 총 맞은 어깻죽지가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뜨끈한 피가 등을 타고 콸콸 쏟아졌다.
이를 아득 문 석주가 어떻게든 팔을 풀려 했다. 케이블 타이와 연결된 문이 덜컹덜컹 사납게 들썩였다. 그러나 문도, 타이도 꿈쩍하지 않았다.
진걸이 느릿하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겁에 질린 아진과 시선을 맞췄다. 눈물이 넘실거리는 군청색 눈동자에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진걸의 입꼬리가 마귀처럼 찢어졌다.
“너는 병신이 잘 어울려.”
재벌, 사랑, 가족. 그런 건 너와 어울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