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35화 (235/261)

235

아진이 눈을 치켜떴다.

안 돼. 이렇게 석주를 잃을 순 없다. 또 저보다 먼저 죽게 할 순 없다. 행복하게 살 수 없는 팔자라면, 함께 죽기라도 할 것이다. 이번에는 혼자 남지 않을 것이다.

입을 크게 벌린 그가 기헌의 손을 꽈아악 깨물었다. 치아가 살을 파고들어 손가락뼈가 느껴질 정도로 세게.

“아악! 이 병신이!”

기헌이 아진을 놓쳤다. 튕기듯 일어난 아진이 석주를 향해 달려갔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석주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입을 앙다문 아진이 속도를 더 높이는데.

근처에 서 있던 진걸이 축구공을 차듯, 달리는 아진의 정강이를 퍽 차 버렸다. 아진이 철퍼덕 엎어졌다. 단단한 바닥에 처박은 턱에 골이 띵 울렸다. 충돌한 무릎도 으스러진 듯 아팠다.

그러나 아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그 짧은 사이, 석주는 차에 실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진이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덜거덕거리는 다리를 추슬러 다시 달리려는데. 머리채가 잡혔다. 진걸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너도 같이 갈 거야.”

진걸이 수 초 전 석주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러더니 석주에게 주사했던 것과 같은 주사기를 아진의 목에도 꽂았다. 바늘이 피부를 꿰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곧 차가운 액체가 싸하게 퍼져 나갔다. 약물이 전신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체온은 차게 식었고, 눈앞은 모서리부터 검게 물들어 갔다.

“아…….”

아진이 맥없이 신음했다. 진걸이 아진의 머리채를 놓았다. 아진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눈꺼풀이 푸르르 떨렸다. 분명 가만히 누워 있는데 바닥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석주를 구해야 하는데. 진걸이 새끼의 코를 물어뜯어 줘야 하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손끝이라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숨 쉬는 것도 힘겨웠다. 모든 오감이 아득해졌다. 귀가 먹먹하고, 피가 느리게 나돌았다.

이내, 그러잖아도 어둡던 세상이 완전한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십수 년 전에 전생을 기억해 냈는데. 처음엔 다 꿈인 줄 알았어. 말이 안 되잖아. 전생이라니. 근데 어느 날 뉴스를 보는데 한아진이, 저 절름발이 병신이 나오는 거야. 내가 알던 그 얼굴 그대로. 그래서 조사 좀 해 봤지. 겸사겸사 너까지.”

아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건 기헌의 독백이었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후우, 하고 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려왔다.

쿰쿰하고 쓴 냄새가 났다. 아주 먼 옛날 맡아 본 적 있는 냄새였다. 석주의 집 뒤에 있던, ‘뒷집’이라 불리던 약 공장 근처에 가면 나던 그 냄새였다.

아진이 꾸물꾸물 몸을 뒤틀었다. 딱딱한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몸이 찌뿌듯했다. 입 안이 마르고, 속이 울렁거리고,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두통도 일었다.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아진은 아득바득 눈을 떴다.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헌의 독백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다 알고 나니까 이야…… 배가 아프더라고?”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조금 남루하다 싶을 수준의 사무실이었는데, 가죽 냄새가 짙게 나는 검은 소파가 있었고, 낡은 책상도 몇 개 있었다. 사무실 양쪽으로 큰 창이 있었는데, 바깥으로 보이는 건물 외벽으로 말미암아 3층 내지 4층쯤 되는 것 같았다.

사무실은 사용되는 공간이 아닌 듯했다. 여기저기 정체 모를 상자와 비닐이 쌓여 있었고, 구석에 놓인 화분에는 금전수가 갈색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덮개가 사라진 알전구 아래로 먼지가 떠다니는 게 눈에 보였고, 소파 테이블 위에도 뿌연 먼지가 소복했다.

기헌은 공간 한가운데, 철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진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고, 주위로 깡패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석주는 기헌과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이 뒤로 묶인 채였는데, 그 끈이 문고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입에는 질긴 테이프가 둘둘 감겨 있었다. 얼굴 반절이 피로 덮여 있었고, 제가 못 본 사이 두들겨 맞기라도 했는지 뺨과 콧잔등에 푸르스름한 멍이 든 채였다. 재킷은 어디 갔는지 와이셔츠만 덜렁 입고 있었는데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웠다.

‘형.’

아진이 석주를 불렀다. 그러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도 석주처럼 입이 막혀 있음을 깨달았다. 손목 역시 뒤로 묶여 있었다. 질감을 보아 케이블 타이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진이 몸을 뒤척거리는데. 기헌이 후웁, 하고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리고 연기와 함께 주절주절 궁금하지 않은 말을 이어 갔다.

“나도 뭐 약 장사로 돈은 적잖이 있지만, 멋지게 살고 있진 않거든. 마약 파는 게 옛날만큼 쉽지가 않아. 총 구하는 것도 어렵고. 돈세탁도 해야 하고. 직원들 관리도 해야 하고. 경찰들도 호락호락하지가 않고. 아우, 조심해야 할 게 어찌나 많은지.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야. 근데 너희들은…….”

기헌이 못마땅하다는 듯 석주와 아진을 훑어보았다. 쥐어패서 손까지 묶어 두었는데. 그래도 어째 꼴이 자신보다 나아 보였다. 그게 영 마뜩잖았다.

“재벌에, 비서에, 돈도 많고, 번듯하고……. 쯧. 하나는 절름발이 병신에, 하나는 안하무인 깡패이던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 몰수하고 잘 사는 꼴이 너-무 보기가 싫더라고.”

“…….”

“그래도 뭐 어쩌겠어. 오래된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

“참 인연이라는 게 요상해. 진걸이가 내 아들로 태어났지 뭐야. 그래서 최진걸이 아니라 박진걸이잖아.”

“…….”

“신기하지. 진걸이는 나보다 금 사장이랑 연이 더 깊었는데 말이야. 어쩌다 내 아들로 태어났을까,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얘는 그리움보다 복수심이 더 컸나 봐.”

기헌이 진걸의 팔꿈치를 툭툭 두드리듯 쓰다듬었다. 전생에는 같은 목표를 가진 잠깐의 동업자 그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들이라고 정이 가고 사랑이 갔다.

“나는 얘가 어떻게 죽었는지 뻔히 알잖아. 강 사장도 알지? 왜 얘 목 잘라서 나한테 선물로 줬었잖아.”

“…….”

“그때는 크게 괘념치 않았는데. 진걸이가 내 아들이 되고 나니까 그 장면이 그렇게 사무치고 분할 수가 없는 거야.”

“…….”

“그래서 언제더라. 진걸이가 고등학생 때였나. 넌지시 전생에 대해 입을 뗐는데. 진걸이가, 어……. 진걸아. 너 몇 살에 전생이 기억났다고 했지?”

기헌이 진걸을 보며 물었다. 진걸이 나직이 대답했다.

“열네 살이요.”

“그래! 무려 열네 살에 그때를 떠올렸다는 거야!”

기헌이 짝 손뼉을 쳤다. 그러다 새치가 드문드문 올라온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어린 나이에 그 지독한 걸 기억해 내.”

“…….”

“그간 나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끙끙 앓으며 살아왔을 거 생각하니까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아비 된 도리로서 복수 한번 근사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

“근데 그렇다고 막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건 아니야. 그냥 뭐, 언제 기회가 된다면. 강 사장이랑 우리의 인연이 또 닿는다면. 그렇게 어렴풋이 미래를 기약했어. 주혁이 놈한테 약이나 간간이 뿌리면서.”

“…….”

“당장 너희 둘 잡아 족쳐 봐야 뭐가 남겠어. 어차피 너희는 우리를 기억도 못 할 텐데.”

기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다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담배가 끼워진 손이 그의 무릎 위에 놓였다. 가느다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근데 말이지. 어느 날 진걸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호텔에서 우연히 아진이 쟤를 만났다는 거야. 근데 낌새가 요상하더래.”

“…….”

“뭐가 요상하더냐- 물었더니. 이 새끼, 이게 자기를 알아본 것 같다는 거야.”

“…….”

“얼굴이 파랗게 질린 꼴이 전생에서 빌빌 기던 딱 그 얼굴이래. 확실하대.”

“…….”

“그거 듣고 이야! 이거 참 대단한 인연이구나! 싶더라고!”

기헌이 다시 생각해도 신통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납작한 광대가 도드라졌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그가 석주와 시선을 맞추며 눈을 번뜩였다.

“그쯤 되니까 막 설레고, 흥분도 되고. 응? 이번에야말로 내가 강 사장을 잡아다 팔도 썰고, 손가락도 썰고 그럴 수 있겠구나, 했어. 그리고 목을 똑 따다가 진걸이한테 선물로 줘야지, 하면서 공들여 계획도 짰어.”

“…….”

“그 결과가 이래.”

그가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다 석주와 아진을 따로따로 가리켰다.

“강 사장은 내 앞에 무릎 꿇고 있고, 아진이는 음…… 곧 다시 다리 병신이 될 거야. 진걸이가 아진이 무릎을 꼭 부숴 주고 싶대.”

그 말에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옆으로 쓰러진 채였는데,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옹송그리게 됐다. 그런다고 다리가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리 병신’. 그 말이 귓가를 웅웅 울렸다.

아진은 다리를 절며 살던 때를 매우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절뚝이던 걸음걸이, 지끈거리던 무릎, 뛰지도 못하고 바르게 서는 것도 힘겨워하던 등신 같은 다리.

심장이 불안하게 발광했다. 진걸은 매우 손쉽게 제 다리를 부러트릴 것이다. 발길질 몇 번으로, 혹은 총으로, 그도 아니면 칼로 제 삶을 다시 진창으로 처넣을 터였다.

또. 또 그렇게 살라고. 또.

아진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데. 기헌이 석주를 보며 물었다.

“기분이 어때.”

“…….”

“아까처럼 회칼이라도 들고 싶어? 우리를 막 도륙 내고 싶어서 미치겠지? 응?”

적나라한 비아냥에도 석주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기헌이 아, 하고 과장스레 탄식했다.

“입이 막혀 있구나. 미안하네.”

그가 석주 곁에 서 있던 깡패에게 눈짓했다. 깡패가 석주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테이프를 조심스럽지 않게 떼어 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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