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33화 (233/261)

233

뒤통수가 없는 진수가 떠올랐다. 그를 밟고 지나가던 집채만 한 검은 타이어와, 군중들의 웅성거림도 들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왼쪽 무릎이 으스러진 듯 아파 왔다.

“아…….”

아진이 가늘게 신음하며 무릎을 짚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말리고, 왼쪽 뒤꿈치가 살짝 위로 떴다.

몸은 차고, 무릎은 아프고, 차는 무섭고. 그쯤 되니 제가 지금 전생에 있는지, 현생에 있는지 구분이 안 됐다. 마냥 두렵기만 했다.

석주가 보고 싶었다. 그의 안온한 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진이 몸을 덜덜 떨며 굳어 있는데. 돌연 환한 백색 빛이 옆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또 환영인가. 아진이 무심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커다란 차 하나가 아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앞이 악어처럼 툭 튀어나온 검은색 지프가 크르릉- 하고 거칠게 울었다. 전생에서 아진을 쳤던 그 차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아진은 제게 달려드는 차를 넋 놓고 바라봤다.

환영인가. 악몽인가. 현실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현실이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런 다리로는, 이런 정신으로는 저것을 피할 수 없었다. 저는 여전히 나약하고 가냘프고 겁이 많은, 열 살의 절름발이 아진이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차를 보던 아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파괴든 종말이든 죽음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지독한 공포가 끝났으면 했다.

통렬할 정도로 밝은 헤드라이트 때문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앞이 환했다. 환하다 못해 붉었다. 먼 옛날. 열 살 무렵 차에 치였을 때도 지금과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그 기묘함에 아진이 조소했다. 그와 동시에 쾅! 차가 몸을 들이박았다.

몸이 데굴데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다 벽에 퍽 부딪히고서야 멈춰 섰다.

“으…….”

아진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전신의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엄청난 충격에 뇌가 덜거덕거리는 게 느껴졌다. 근데 어째 예상만큼 아프지가 않았다. 무릎이 으스러졌을 땐 끔찍할 만큼 고통스러웠는데.

제가 차에 치인 게 아닌가. 그건 환영이었나. 그저 놀라서 고꾸라진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뜨는데. 묵직한 숨결 하나가 귓바퀴를 훅 쓸었다. 아진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뒤늦게 허리를 감싼 손을 발견했다.

크고, 두껍고, 단단한 손이 익숙했다.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 없는 손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아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역시나, 석주가 있었다.

“……형?”

석주가 어떻게 여기. 아진이 천치 같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는데. 한껏 인상을 쓰고 있던 석주가 만면에서 고통을 지워 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어떻게…….”

“하아……. 이번엔 안 늦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꽉 감싸 쥔 아진의 허리를 더욱 힘주어 안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이마를 타고 굵직한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리멍덩하던 아진의 눈빛이 대번에 움츠러들었다.

“형, 피, 피가…….”

벌떡 상체를 일으킨 아진이 석주의 이마를 감쌌다. 뜨끈하고 질척한 피가 손바닥을 채운다 싶더니 순식간에 범람했다. 석주의 한쪽 눈이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어, 어떻, 아, 지혈, 지혈을…….”

아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황량한 주차장에 지혈할 게 있을 리 없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던 그가 석주의 목에 감긴 목도리를 발견했다. 다급하게 그것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 둘둘 말아 석주의 머리에 대 주었다. 근데 도통 어디가 어떻게 다친 건지, 얼마나 다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발광했다. 뒤통수가 없던 진수가 떠올랐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었던 그 끔찍한 모습 위로 석주가 겹쳤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석주의 환영이 망막을 할퀴었다.

무서웠다. 차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올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눈물이 물씬 차올랐는데, 울지 않으려 눈을 홉떴다. 우는 건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슬픔이 아니었다.

“핸드폰이…….”

한 손으로 석주의 머리를 감싼 아진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 떨어트리고 온 것이 지금 주머니에 있을 리 없었다. 아진은 당황하지 않고 석주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코 울지 않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그때. 석주가 슬쩍 아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엄지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다쳤네. 또.”

석주의 눈가에 탄식과 후회가 차올랐다. 말간 광대 위로 거칠게 난 생채기에 마음이 아팠다. 힘껏 안는다고 안았는데. 기어코 아진에게 상처를 묻혔다. 어쩜 저는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석주가 짜증스레 어금니를 짓씹는데.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진이 마침내 핸드폰을 찾아냈다. 피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으로 화면을 밝히는데. 덜컥,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걸걸한 감탄사 하나가 흘러왔다.

“이야…….”

아진과 석주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향했다. 헤드라이트가 번뜩이는 검은 지프에서 누군가가 내리고 있었다. 쨍한 빛 탓에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아진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운전자가 헤드라이트 앞으로 나왔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이내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진걸이었다. 짝 손뼉을 친 그가 악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일타-쌍피네.”

킬킬거리며 웃는 음성이 어쩐지 기헌과 닮아 있었다. 아진은 그의 몸짓과 눈빛에, 그 역시 전생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마른 몸으로 석주를 가렸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꾹꾹 누르는데, 등신 같은 기계가 피에 젖은 손가락을 도통 인식하지 못했다.

진걸이 슬렁슬렁 느린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아진이 있는 힘껏 그를 노려봤다.

기헌은 공포의 대상이다. 허나 진걸은 미움의 대상이었다. 두려움의 질이 달랐다. 기헌에게는 감히 덤빌 생각조차 못 했으나 진걸은 된통 싸워 보고 싶었다. 질 게 뻔하지만, 개차반이 된다 하더라도 그의 코 정도는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새끼…….”

아진이 주먹을 말아쥐는데. 석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도리가 떨어지면서 기껏 틀어막아 놓았던 피가 그의 뺨과 턱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석주가 손등으로 그것을 대충 닦아 냈다.

그가 아진을 가리고 섰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며 찌뿌듯해진 목을 슬쩍 뒤틀었다. 피를 뒤집어쓴 눈앞이 시뻘겋고,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으나 진걸쯤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형.”

아진이 석주의 바지춤을 잡았다. 석주가 괜찮다는 듯 지그시 눈을 맞춰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진걸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요, 싸우게요?”

그 말을 끝으로 여기저기서 깡패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호텔 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그 깡패들이었다. 언뜻 봐도 열댓은 되어 보였다.

“…….”

석주가 차게 식은 눈동자로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래 봐야 수만 많은 잔챙이들이다.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치미는 싸움 특유의 저릿한 흥분감과 긴장감이 반가웠다. 건장한 사내 열댓 명이 험상궂은 낯으로 서 있는데 두려움일랑 없었다.

각목이나 파이프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회칼이면 더 좋았을 거고. 허나 없는 대로 싸우는 것도 그 맛이 있으리라.

석주가 손을 말았다 펴며 깡패들을 살피는데. 진걸이 그런 석주를 짜증스레 쳐다봤다.

“미친 새끼…….”

분명 석주가 이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이미 크게 다쳤고, 혼자이다. 전생에 아무리 내로라하는 싸움꾼이었대도 장정 열댓 명을 깔아 눕히고 멀쩡하게 걸어 나갈 순 없었다.

근데 왜 벌써 진 것 같지. 목젖 언저리를 살살 긁어 대는 이 패배감은 뭐지.

진걸이 손등으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빙긋, 과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이, 형님. 우리 촌스럽게 굴지 맙시다. 여기서 싸운다고 형님이 이길까요? 된통 얻어맞기나 하지.”

“…….”

“그냥 얌전히 갑시다.”

그 말에 석주가 코웃음을 쳤다.

“얌전히는 씨발…….”

얌전히 가자면 예, 하고 가겠나. 저도 질 낮은 깡패 짓을 십수 년이나 해 봤지만, 저런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석주는 누군가를 끌고 가야 한다면, 그치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짐짝처럼 끌고 갔다. 그게 그가 정의하는 ‘얌전함’이었다.

비아냥 가득한 석주의 모습에 진걸의 낯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고 딱딱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아니면 아진이 대가리에 구멍 납니다.”

총이었다. 그것은 곧장 아진을 향했다. 탁하게 번뜩이는 총구를 본 석주가 아진을 더 꼼꼼히 가리고 섰다. 총알이든 폭탄이든 몸뚱이로 막아서려는 모양이었다.

진걸이 쯧쯧 혀를 찼다. 제아무리 단단하고 큰 몸집이래도 결국엔 인간의 몸이거늘. 석주는 예나 지금이나, 아진만 관련되면 지나치게 무모하고 헌신적이다. 그래서 실수하고, 끝내 피를 본다.

“형님이 막아서도 아진이는 못 구해요. 형님이 죽고 몇 초 뒤에 쟤도 죽겠지. 아니면, 우리가 좀 가지고 놀다가 한참 뒤에 죽일 수도 있고.”

“…….”

“가지고 노는 방법으론 뭐가 좋을까요. 손가락도 몇 개 숭덩숭덩 자르고, 눈알도 뽑고, 떡도 칠까요? 저야 뭐, 저 절름발이 놈한테 흥미 없는데 여기 있는 누구 하나는 흥미 있지 않겠습니까?”

아진이 쟤가 반질-반질하게 생겼으니까. 진걸이 주위의 장정들을 둘러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깡패들이 따라서 킬킬거렸다. 질 낮은 시선이 아진에게 기어가 달라붙었다. 아진이 목을 움츠렸다.

석주가 픽 웃으며 앞머리에 무겁게 매달린 핏방울을 털어 냈다. 이렇게나 싸구려 같은 말에 일일이 분기탱천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기분은 더러웠다. 진걸이 아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석주가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걸을 응시했다.

“그럴 수 없을 거야.”

“…….”

“넌 그전에 죽어.”

단조로운 음성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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