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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32화 (23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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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그 말을 하려고 날 만나고 싶었다고요? 내 친구들한테 수억 치의 약까지 뿌려 가면서?”

    “예. 그러면 안 됩니까?”

    기헌이 턱을 슬쩍 앞으로 빼며 웃었다. 꺼림칙한 웃음이었다. 수십 년 전 그 언젠가 석주의 집에 방문했을 때. 시커먼 속내를 숨기며 웃던 얼굴이 딱 저러했다. 아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 될 건 없죠. 즐겁게 봐 주셨다니 듣기 좋네요.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이 괴상한 대화를 더 이어 나가기 싫었다. 곧 석주가 도착한다. 행여 그와 기헌이 맞닥트리기라도 하면 분명 피를 볼 것이다. 그게 그리 큰일은 아니다마는. 석주와 저의 뜻깊은 순간인데,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갈등. 위험. 폭력. 피. 그런 것과 되는대로 멀리하는 게 좋다.

    아진이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갈라진 액정에 인상을 쓰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핸드폰은 멀쩡했다. 그것을 꽉 움켜쥔 아진이 까딱 묵례했다.

    “그럼.”

    “…….”

    기헌이 중절모를 위로 올렸다 내리며 인사를 받았다. 아진은 적당한 속도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맹수 앞에서 뛰지 않고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가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기헌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아진이 문고리를 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머리채를 움켜쥐거나 콧잔등을 후려칠까 긴장했는데. 역시, 기헌도 제가 아는 기헌이 아니구나, 그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 뿐. 그리 생각하며 문고리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보기 좋네요.”

    기헌의 음성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긍정적인 문장인데 묘하게 선득했다.

    “뭐가요?”

    아진이 고개를 반만 뒤로 돌린 채 되물었다. 기헌은 여전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잘- 걷는 거요.”

    “…….”

    그 말에 아진이 휙 몸까지 돌렸다. 눈이 절로 부릅뜨였다. 기헌이 입술을 아래로 당기며 인중을 길게 늘였다. 그러더니 검지와 중지를 아래로 움직이며 걷는 걸 흉내 냈다. 끌끌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참 신기하지. 걸음걸이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여요. 절뚝절뚝, 어기적어기적 걸으면 궁핍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하다못해 불결해 보이기까지 하거든.”

    “…….”

    “왜. 병신이 그렇잖아. 가까이 가기 싫고, 께름칙하고, 병이라도 옮는 게 아닌가 싶고. 아, 귀하게 자란 한아진 씨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 주변에 병신이 하나도 없을 거 아냐.”

    “…….”

    “내가 갑자기 이 말을 왜 하냐면. 내가 예전부터 알던 병신이 하나 있거든. 근데 걔가 한아진 씨랑 약간, 아주 약-간 닮았어.”

    기헌이 검지와 엄지를 모으며 ‘약간’을 표현했다. 그러다 돌연 미간을 구기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한아진 씨가 걔라는 건 아니고. 걔는 팔자도 사납고 불쌍했어. 죽는 것도 영 불쌍하게 죽었지.”

    “…….”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전신을 뒤덮고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다 굳어 가는 시멘트 속에 파묻힌 듯, 몸이 옥죄고 시야가 깜깜해졌다.

    기헌도 알고 있다.

    전생을, 전생의 저를, 전생의 아귀다툼을 기억하고 있다.

    아진의 몸이 덜덜 경련하기 시작했다. 기헌의 비릿한 조소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가 서늘했고, 무릎이 흐물흐물하게 퍼졌다. 혀가 저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신물 특유의 시큼함이 느껴졌다. 술기운이 급작스레 휘발하며 때 이른 숙취가 올라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관자놀이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기헌이 파랗게 질린 아진의 낯을 즐겁게 바라봤다. 그러다 뒤늦게 어깨를 떨며 놀란 척을 했다.

    “어이쿠, 내가 괜한 소리를. 그럼 잘 가요.”

    “…….”

    “안녕.”

    기헌이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좌우로 한 번 까딱 흔들었다. 그새 더 짙어진 하얀 연기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파르르 떨던 아진이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 그러고는 벌컥 문을 열었다. 일단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벗어나기만 하면. 그럼 더는 기헌을 만날 일도, 그가 저를 위협할 일도, 전생과 같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전생과 다르니까. 석주가, 선화가 기헌 같은 파렴치한이 제 곁에 서성거리게 두지 않을 터였다.

    아진은 다급하게 룸을 벗어났다. 헌데 복도에 덩치 좋은 사내들이 가득했다. 검은 양복에, 험상궂은 인상에, 옷 밖으로 비죽비죽 올라온 문신에, 껄렁껄렁한 자세에. 하나같이 깡패임을 티 내지 못해서 안달 난 이들 같았다.

    그들이 일제히 아진을 쳐다봤다. 아진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깡패들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음험한 눈길로 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간 굳어 있던 아진이 쭈뼛쭈뼛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후다닥 도망치듯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곳에도 깡패 두엇이 있었다.

    호텔 곳곳에 기헌의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 호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기헌이 절 순순히 보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마음 같아선 비상구로 도망치고 싶었는데, 눈알을 아무리 굴려 봐도 비상구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숫자가 어찌나 느리고 더딘지. 아진이 초조함에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탁탁탁 두드렸다.

    빨리, 빨리, 빨리.

    용왕님. 제발 살려 줘요. 제발. 한 번만.

    불안감에 입술이 다 하얗게 질렸을 때쯤.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진은 잠깐 머뭇거리며 옆에 서 있는 깡패들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타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진을 막아서지도 않았다. 그저 문지기처럼 우직이 서 있기만 했다.

    분명 이상한데, 그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덤빈다고 한들 주먹질을 업으로 삼은 이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마른침을 삼킨 아진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닫힘 버튼을 세 번 연타하고, 다음으로 주차장 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깡패 하나가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와 동시에 아진도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곧장 석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헌을 만났을 때부터 걸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차마 걸질 못했다. 어디 전화를 거는 거냐며 해코지라도 할까 봐.

    신호음은 두 번이 채 가기 전에 끊겼다.

    -응, 아진아. 나 다 와 가.

    “박, 박기헌을 만났어요.”

    아진은 앞뒤 설명 없이 곧장 본론을 내놓았다. 석주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몸이 심하게 떨렸다. 시야가 흔들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다.

    -……뭐?

    “박기헌이 날, 날 아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전생의 나를요. 그 사람도 다 기억하고 있나 봐요.”

    -지금 같이 있어?

    “아니요. 나왔어요. 지금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으니까 그리러 와요.”

    아진이 전광판의 숫자를 보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근데, 그 순간. 삐- 하고 이명이 울렸다. 눈앞이 우유라도 쏟은 듯 하얘지더니 몸이 서늘하게 식었다. 꼭 전생 때처럼. 한겨울 홑옷 차림으로 바깥에 서 있는 듯 추웠다. 그러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제대로 서 있는 게 힘들 정도였다.

    “으…….”

    휘청거리던 아진이 엘리베이터 벽에 쿵 머리를 박았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상모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두통도 일었다. 누가 망치로 정수리와 이마에다 못질을 하는 것 같았다.

    먼 과거, 칼을 들고 제 손가락을 썰던 기헌의 모습이 가혹할 정도로 또렷이 떠올랐다. 먼지 구덩이를 나돌던 제 손가락을 상기하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진아. 내려오지 말고 로비에 있어. 사람 많은 곳에.

    “…….”

    -아진아.

    “…….”

    -아진아?

    “흐…….”

    석주의 목소리가 탁하게 들려왔다. 차가운 물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귀가 먹먹하고 정체 모를 소음이 뇌를 헤집었다. 아진의 눈썹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하염없이 슬퍼졌다. 괴로웠고, 두려워졌다.

    그래. 전생에 제게 그리 가혹했던 신이 이번 생에 난데없이 절 예쁘게 여겨 줄 리 없었다. 제가 뭐라고. 좋은 걸 줬으면 나쁜 것도 주겠지. 그게 응당한 이치인데 너무 안일했다.

    신이 저와 석주에게만 전생을 기억하게 해 준 줄 알았다. 꼬인 채로 끊긴 매듭을 풀 기회를 준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어찌 되려나. 또 예전처럼 손가락이 잘리려나. 가슴에 구멍이 나려나. 콸콸 쏟아지는 피와, 시시각각 잇새로 흘러나가는 영혼을 느끼며 죽어 가려나.

    안 되는데. 아직 석주를 만나지 못했는데. 꽃님에게, 선화에게 작별도 고하지 못했는데. 형과 누나도 만나고 싶은데.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진의 눈알이 붉어졌다. 몸을 뒤척이던 그가 핸드폰을 툭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아진이 열린 문을 멀거니 응시했다. 군청색 눈동자가 혼이 빠진 것처럼 탁했다.

    그가 비척비척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호텔의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이 사라지고, 주차장 특유의 시멘트 바닥이 밟혔다. 그리고 수많은 차가 그를 맞이했다.

    “…….”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차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 지는 한참 됐다. 제가 차를 직접 몰고 다닐 정도인데 무서워할 리 없었다. 그래서 안일하게도, 제가 트라우마를 털어 낸 줄 알았다.

    헌데 돌연 차가 괴물로 보였다. 기헌을 만났기 때문일까. 전생의 공포를 떠올려 버렸기 때문일까. 그간 잊고 있던 검은 불안감이 앞다투어 달려왔다. 그것이 아진을 한입에 꿀꺽 삼키곤 콰드득콰드득 씹어 댔다.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리는 환영이 눈알을 따끔하게 찔렀다. 거센 엔진 소리가 귓바퀴를 콱콱 깨물었고, 매캐한 흙먼지가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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