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31화 (23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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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에요. 내가 지금 술에, 후우…… 취해서…….”

-…….

“아무튼, 나도 모르는 척했으니까. 형을 대충 용서해 줄게요.”

-…….

“형은 그냥, 전처럼 내 곁에 있으면 돼요. 딱 전처럼만. 나를 사랑해 주고, 보살펴 줘요. 그럼 나도 형 곁에 있어 줄게요. 형을…… 사랑해 줄게요.”

말을 마친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사랑. 그것을 말하고 나니 갑자기 거센 파도 같은 감정이 몰려왔다.

제 손등을 쓰다듬는 석주의 손. 저를 안고 재워 주는 청량한 품. 제 귓가에 잔잔히 울리는 낮은 목소리. 그런 것들이 몹시 그리워졌다.

동시에 제가 석주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결핍된 삶이 제 가늠보다 훨씬 힘들어질 거라는 것도.

우리에게 또 다른 재앙이 닥치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싶었다. 불행이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무궁히 행복만 하면, 그것이 끝내 우리를 삼키더라도 꽤 견딜 만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기묘한 확신이 생겨났다.

아진의 청색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막막하던 미래가 설레기 시작했다. 대충 용서하기가 이렇게나 대단하다니. 신기했다.

-…….

근데 어째 건너편에서 답이 없다. 미간을 구긴 아진이 핸드폰을 귀에 딱 붙였다. 그리고 부루퉁하게 재촉했다.

“왜 대답 안 해요.”

설마 거절하려고. 설마 싫다고 하려고. 설마 또 나를 버리려고. 설마, 설마 하며 마음을 졸이는데. 듣기 좋은 저음이 부드럽게 흘러왔다.

-보고 싶어.

“…….”

-얼굴 보고 대답하게 해 줘.

“…….”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아진아.

아진이 헛숨을 가득 삼켰다.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었다. 그러다 입꼬리가 꾸물꾸물 솟구쳐서 얼른 입을 가렸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민망했다. 그의 발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 그럼 나 좀 데리러 와요.”

주혁이가 날 집에 보내 주질 않아요. 취했는데, 자꾸 못 가게 해. 여기 너무 덥고, 불편해요. 아진이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갈게. 지금.

석주가 곧장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아진이 몸을 옆으로 돌려 벽에 뺨을 묻었다.

“바, 바쁘면 안 와도 돼요. 일을 한다거나, 음, 누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중이면…….”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아진이 비싯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너밖에 없다는 말. 중요한 건 너뿐이라는 말. 전생과 달리 이생에서는 명진도, 식구들도, 회사도 중요치 않고 오로지 너만 중요하다는 그 말이 듣고 싶어 부러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였다.

아진이 술기운 때문인지 수줍음 때문인지 더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여기 그때 그 호텔이에요. 우리 행사했던……. 몇, 몇 호인지는 모르겠는데, 음…….”

-알아서 찾아갈게.

“네.”

-끊지 말고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건너편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석주가 제게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 항상 기분이 좋다. 그의 설렘과 조급함이 생생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석주가 외투를 입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아진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 바깥에 추우니까 목도리도 해요…….”

그 말에 석주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하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기도 했다.

아진은 그 후로도 석주의 부산스러운 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그러다 석주가 차에 올라탔다 싶을 때쯤. 나직이 그를 불렀다.

“형.”

-응?

“보고 싶어요.”

-…….

“얼른 와요.”

그리 말한 아진이 핸드폰을 무릎 위로 텁 덮었다. 말해 놓고 나니 어찌나 부끄러운지.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심장을 꾸역꾸역 눌러 내리는데. 핸드폰이 우우웅, 우우웅, 진동했다. 석주였다. 핸드폰을 뒤집으며 전화가 끊긴 모양이었다. 통화를 거절한 아진이 토독토독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주혁기한테 간다ㅏ고 말할게요]

전송 버튼을 누른 아진이 끙,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바닥에 수십 분 동안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저릿했다. 그래도 덕분에 울렁울렁하던 술기운이 한결 휘발했다. 더위도 조금 가셨다.

아진은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켠 후, 욕실을 나섰다.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향하는데. 석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10분 내로 갈게.]

아진의 광대가 봉긋 올라갔다. 10분. 10분만 있으면 그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석주에게서 온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근데, 거실 풍경이 요상했다. 제가 일어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주혁을 비롯한 친구들이 지나치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있기도 하고, 소파 등받이에 빨래처럼 걸려 있기도 하고, 무용을 하는 것처럼 거실 한가운데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거나, 몸을 반으로 접은 채 구겨져 있기도 했다.

이상한 냄새도 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향로 같은 것에서 희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담배 연기보다 짙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연기가 호텔 방 가득 차올랐다.

“뭐야…….”

아진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괴상한 광경이 께름칙했다.

분명 술에 취한 작태들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강하고 불경한 것에 취한, 이를테면 마약 같은 것에 취한……, 까지 생각하는데.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중절모를 쓴 채 뒤를 돌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허나 뒷모습만 봐도 아진의 또래는 아니었다.

아진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이야- 한아진 씨. 드디어 뵙네요.”

그 얼굴을 본 아진의 숨이 뚝 멎었다.

사십 대 중후반의 신사. 가볍게 눌러쓴 검은 중절모. 언뜻 보면 인상 좋게 휘어지는 듯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물방울 모양의 눈매. 눈에 비해 작은 눈동자. 우뚝 선 코와 얇은 입술.

그였다. 그 사람이었다.

아진이 버석하니 굳어 있는 사이, 신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박기헌이라고 합니다.”

아진이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모서리부터 바닥으로 낙하한 핸드폰 화면이 쩌적- 갈라졌다.

아진은 꽉 막힌 숨통을 도통 뚫을 수가 없었다. 사지도, 오장육부도 딱딱하게 굳었다. 오로지 기헌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눈동자만 바쁘게 움직였다.

이 사람이 왜. 이 사람이 어떻게. 어째서 여기에. 어쩌다 내 앞에.

꿈인가. 꿈일까. 또 악몽인가. 술에 취한 제가 자각할 새 없이 잠이라도 들었나.

혼란에 휩싸인 아진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기헌이 빙긋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악수를 거절당했음에도 민망해하는 기색일랑 없었다. 오히려 아진의 당황이 기꺼워 보였다.

뒷짐을 진 기헌이 제자리에서 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반가운 기색을 한껏 내비쳤다.

“전부터 한아진 씨를 만나고 싶다고 주혁이 저 친구한테 많이 졸랐어요.”

그가 소파에 엎어져 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주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선물도 많이 해 주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된다고 난처해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주는 약은 꼬박꼬박 받아 처먹고. 한아진 씨는 어찌 됐냐, 물으면 어물쩍 넘어가고.”

“…….”

“거참, 어찌나 답답하던지. 내가 저 친구들한테 뿌린 약만 해도 수억이거든요.”

어린 새끼가 간사해서……. 기헌이 널브러진 주혁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쯧, 하고 혀를 차기도 했다.

“근데 뭐 어쩌겠어. 주혁이가 아니고서는 도통 한아진 씨를 만날 다른 방도가 없어서 말이에요. 어쩔 수 없이 계-속 기다렸는데.”

기헌이 짝 손뼉을 쳤다. 그의 눈썹이 갈매기 모양을 그리며 올라갔다. 작은 눈동자에 안광이 서렸다.

“아이고, 오늘 드디어 연락이 왔더라고요. 또 약 좀 받을 수 있냐기에 된통 한 소리 해 주려고 했는데. 한아진 씨랑 같이 있다고. 그것도 한아진 씨 혼-자 있다고 하지 뭐야.”

“…….”

“그래서 냉큼 달려왔지.”

“…….”

“근데 어떻게 겁도 없이 혼자 있어, 그래.”

뒷말은 아주 작은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들리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경악에 갇혀 있던 아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 이거 기다렸던 만남이라 그런가. 엄청나게 반갑네요. 꼭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가워.”

기헌이 서글서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진이 그 미소를, 끔찍하리만큼 전과 같은 미소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러다 폐부에 켜켜이 쌓인 숨을 후욱, 내뱉으며 등을 꼿꼿이 폈다. 짙은 술 내음이 역류하고, 정체 모를 하얀 연기가 콧구멍을 들쑤셨으나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이 사람은 제가 알던 기헌이 아니다. 얼굴도, 말투도 하물며 옷차림까지 같지만 그 사람일 리 없다. 정확히는 저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진걸도 저를 몰랐다. 창두도, 도은도 하물며 꽃님도 몰랐다. 그러니 기헌도 저를 모를 것이다.

이렇게 만난 건 우연이고, 전생의 질긴 악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 대처하면 창두와 진걸 때 그랬듯 큰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진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가 폈다. 쿵쿵쿵 사납게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기헌을 직시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저는 예전의 그 절름발이 몸종이 아니다. 제겐 석주가 있고, 대단한 가족들이 있다. 그 누구도 저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저를 왜 만나고 싶으셨는데요?”

아진이 또박또박 물었다.

“아,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내가 한아진 씨 회사에서 만드는 영화, 드라마 그런 거 무척 좋아하거든.”

기헌이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무척’이라는 부사까지 곁들여 말하면서 정작 표정은 심드렁했다. 아진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개소리.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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