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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은 그의 존재감이 사뭇 좋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적막엔 이렇다 할 소리가 섞여 있지 않았는데. 그래도 마냥 좋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잘못 건 건가 했어.
“잘못 건 거 아닌데. 내가 5번 눌렀는데…….”
-그랬어?
석주가 미소 짓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괜히 부끄러워진 아진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무슨 일 있어?
석주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
아진이 흐리멍덩한 얼굴로 입을 뻐끔 벌렸다. 딱히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건 아니었다. 문득 그가 생각나서. 그 이유가 다였다. 뭐라고 대답하지……. 아진이 술기운에 붉게 익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는데.
-어디야?
석주가 재차 물어 왔다. 지극한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좋았다. 아진이 샐쭉 웃으며 대리석 벽에 기댔다. 등으로 넘실넘실 타고 오는 냉기가 반가웠다.
“그냥 바깥이요.”
대충 둘러댄 그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술 좀 마셨다고 핸드폰이 어찌나 무거운지. 누워서 받고 싶은데, 그래도 이곳이 욕실이라는 자각은 있어서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내가요.”
아진이 넌지시 말머리를 뗐다. 석주의 질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답한 게 없는데, 석주는 별다른 재촉을 하지 않았다.
-응.
그저 듣고 있다는 짧은 추임새뿐이었다. 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그도 아진만큼이나 긴장한 것 같았다. 어쩌면 아진보다 더. 갑작스레 핸드폰을 밝힌 아진의 번호가 반가우면서도 걱정되지 않았을까.
아진은 초조한 석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그 커다랗고 단단한 사람이, 사내다움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제 전화 한 통에 안절부절못하다니. 그를 지배하고, 멋대로 휘두르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제 손에서 놀아나는 걸 앞으로도 쭉 보고 싶다는 철없는 욕구가 들었다.
“내가 형을 대충…… 용서할까 해요.”
-뭐?
“용서해 주겠다고요.”
-…….
“형이 필요하니까.”
아진이 또박또박 말했다. 행여 매가리 없는 농담처럼 보일까, 눈까지 부릅떴다. 맨정신에 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우연히 주혁을 만나서, 우연히 술에 취해서, 우연히 그가 떠오른 김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다닥 처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루빨리 그와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다.
-필요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진아.
한동안 조용하던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왜 모르지. 필요하다고요, 형이. 아침 점심 저녁에 다 필요하다고요.”
-내가 전처럼 비서로 네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요. 연인으로 있어 주길 바라는 건데요.”
-…….
적막에 석주의 당황이 묻어났다. 아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용서해 주겠다고 하면 좋다고 펄쩍 뛸 줄 알았는데. 당장 저를 찾아올 줄 알았는데.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진이 핸드폰을 반대 손으로 옮겨 쥐었다.
“쉬, 쉽게 용서해 주는 건 아니에요.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도 아니고. 대충 용서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걸 이렇게 용서받기가 좀-
“아니, 나도 음, 나도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요…….”
아진은 본인이 말해 놓고도 놀라 헙, 하며 입을 막았다. 이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술에 취한 입이 방정이다. 아진이 툭툭툭 손바닥으로 입을 혼내는데. 석주의 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왔다.
-네가 잘못한 게 뭐 있어. 다 내 잘못이지.
“…….”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이었어. 비가 내리던 날, 널 처음 안았던 그 순간부터 다 내가 잘못한 거야.
“…….”
-전생의 모든 순간이 잘못이었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날 숨기고, 널 속였어.
“…….”
-용서하지 않아도 돼, 아진아. 내가 그때의 그 강석주라는 게 금방 적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아진이 엄지를 꾹 씹었다. 손가락에 앞니 두 개의 자국이 묻어났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그가 더운 이마를 마구 쓸어 올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꾸역꾸역 숨겨 오던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요.”
-응.
“나 다 알고 있었어요.”
-뭘?
“형이…… 그 사람이라는 거.”
말을 마친 아진이 눈을 꾹 내리감았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꽃님과 막걸리를 마실 때가 떠올랐다.
둘 다 술이 적잖이 올라서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아진이 발긋한 얼굴로 얼음을 깨 먹는데. 꽃님이 넌지시 그를 불렀다.
‘아진아.’
‘응?’
‘너 진짜 몰랐냐. 석주가 다 기억하고 있는 거.’
‘……몰랐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걔는 한눈에 알았다며. 근데 넌 왜 몰라. 그렇게 티가 안 나던?’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꽃님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괴며 읊조렸다.
‘뭔지는 몰라도 걔가 널 더 많이 가슴에 품고 있긴 했던 모양이다.’
그 말에 아진의 눈썹이 위로 삐뚜름히 올라갔다. 석주와 제 감정을 비교하는 게 못마땅했다. 제 마음이 그보다 더 가볍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얼음 잔을 깰 듯 힘껏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진의 입매가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시선은 아래로 내려앉았다. 꽃님이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진아, 너 설마…….’
경악 가득한 꽃님의 낯을 떠올린 아진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석주가 제가 알던 그 석주라는 거. 저와 같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다. 제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보던 석주의 환영이 저를 봐 주지 않았던 건, 석주가 이미 제 곁에 있어서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었다.
석주는 나름대로 숨긴 듯하지만, 말, 눈빛, 몸짓, 그 모든 것에서 티가 났다. 크고 작은 증거가 턱턱 걸릴 때마다 아진은 숨이 우뚝 멎었으나, 눈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며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인 척 연기했다.
-아진아.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석주의 목소리가 대번에 튀어 올랐다. 아진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벅벅 문댔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알이 지끈거렸다.
“다 알고 있었다고요.”
-…….
“모를 수가 없었어. 모르고 싶었는데. 형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그 사람이었어. 두루마기를 입지 않아도 그 사람이었고. 몸에 흉터가 없는데도 그 사람이었어. 그냥 다…… 그 사람이었어요.”
여전하다 말하는 목소리도.
저를 담은 검은 눈동자도.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의 움직임도.
제 손을 쓰다듬는 엄지도.
너무나 석주였다.
저를 사랑하고, 아끼고, 애타 하던 그 석주였다.
손바닥에 눈을 묻은 아진이 젖은 숨을 들이마셨다.
“근데…… 근데 알고도 모르는 척했어.”
-…….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척하면 모르는 게 될 수 있었다. 아진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석주가 자신의 입으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애당초 그럴 마음으로 함구했다.
아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석주가 무어라 대답할지 가늠이 안 됐다. 화를 내려나. 너도 그래 놓고 나를 비난했냐며 분노하겠지. 분명 그러겠지.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까지 생각하는 찰나. 석주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아진이 흠칫 어깨를 굳히는데.
-……힘들었겠네.
낮은 목소리가 아진을 보듬었다. 아진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왜, 어째서, 당신은 또…… 또 이렇게 쉽게 내 감정을 무너트려. 석주가 미웠다. 미운데 안타까웠고, 불쌍했으며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힘들었냐고요? 아니, 끔찍했어요. 진짜 너무, 너무 끔찍했는데 아는 척하면 더 끔찍해질 것 같아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질 것 같아서.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야 하니까. 그게, 그게 맞으니까…… 근데 그러기 싫어서 아득바득 모르는 척했어요.”
-아진아.
석주가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그러나 아진은 그 부름을 무시했다. 여태까지 멸시하고, 짓밟고, 억눌러 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다. 석주에게 다 쏟아 내고 싶었다. 그가 어느새 아롱아롱 눈앞을 물들인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그래서 내가…… 노력하라고 했잖아요.”
-…….
“나한테…… 버림받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했잖아.”
언젠가 석주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마음을 내비치고,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날. 아진이 행복 속에서 몸부림치던 때. 석주가 냅다 찬물을 끼얹었었다.
‘버리고 싶으면 버려.’
‘발로 차고, 내팽개치고, 문전 박대해. 그래도 돼.’
아진은 그 의미심장한 말에 내포된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난 노력할 거예요. 형을 안 버리도록.’
‘그러니까 형도 나한테 버림받지 않도록 노력해요.’
노력하라고. 모든 걸 알고 있어서 했던 말이었다. 들키지 마. 내가 진실을 외면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이 환상 아닌 환상 속에서 가짜 행복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해. 그 뜻으로 한 말인데. 끝내 이리됐다.
아진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움켜쥐었다. 충혈된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러니까 그 개 같은 사진을 뭐 하러 들고 다녀서 들켜요! 왜 내가 모르는 척할 수 없게 하냐고!”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한껏 묻어났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그걸 보지만 않았으면……. 아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나갔다.
-……미안. 미안해, 아진아.
“…….”
-미안해. 아무것도 몰라서. 노력하지 않아서. 내가 더……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석주는 사과했다. 전생부터 여태까지 수십, 수백 번을 한 사과인데 질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음절 음절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아진이 흡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제가 석주를 너무 몰아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전화한 건 아닌데. 술기운에 감정이 너무 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