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29화 (229/261)

229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파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꽃님이 툭툭 아진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가자. 저녁 먹어야지. 방어가 철이야. 가는 길에 사 가자. 회 쳐 주마.”

“응. 막걸리 한잔할까?”

“그래, 좋지.”

아진이 테이블 위의 그릇과 접시를 정리했다. 꽃님이 그런 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접시를 포개고, 다 녹아서 밍숭맹숭해진 음료를 아무렇지 않게 목구멍으로 넘기는 아진이 어쩐지 그답지 않았다.

원래의 아진은 저렇지 않았다. 설거지를 시켜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손이 야무지지 못해 그가 씻은 걸 다시 씻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근데 최근의 아진은 저런 걸 참 잘한다. 잘 씻고, 잘 닦고, 그것을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못해 익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 꽃님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진이 근래 떠올렸다는 전생이 부유하고 고아하지 못했다는 걸. 그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아진이 식기를 모아 드는데. 꽃님이 그것을 휙 채 갔다.

“내가 하마.”

아진이 배시시 웃으며 꽃님의 옆에 붙었다. 그러다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이모. 오늘 한 이야기 엄마한텐 비밀이다. 알았지?”

“그래.”

“진짜로 말하면 안 돼.”

“알았다고. 근데 아진아.”

“응?”

“네 전생에 나도 있냐.”

“그-럼, 있지.”

“난 너한테 좋은 인연이었니?”

“응.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어.”

“……다행이네.”

꽃님이 빙긋 웃었다. 아진이 그녀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뒤로 파도가 철썩, 철썩, 쏴아아……, 하고 부드럽게 흩어졌다.

#강강술래

아진이 공항 밖으로 나왔다. 제주도와 확연히 다른 칼바람이 휭 몰아쳤다. 막 공항을 나온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며 옷을 여미는데, 아진은 심드렁한 낯으로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겼다.

피곤했다. 제주도에서 나흘이나 있었는데, 그중 사흘은 꽃님의 카페에서 노동 착취를 당했고, 하루는 그녀와 막걸리를 된통 먹고 숙취로 엎어져 있었다.

놀고먹으러 갔는데 뜻한 바는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던 문제는 풀린 것도 같다만 실로 제가 행하기 전까지는 달라지는 게 없을 터였다.

“으아…….”

아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차를 주차해 둔 곳을 되뇌며 슬렁슬렁 발걸음을 뗐다.

멍할 틈이 생기니 자연히 석주가 떠올랐다. 아픈 건 다 나았나. 출근은 했을까. 집은 옮겼나.

선화가 없으니 그의 소식을 일절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석주에게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뭐, 선화가 요란스레 석주가 많이 아프다, 석주가 죽어 간다, 따위의 연락을 하지 않은 걸 보니 괜찮겠지.

그럼 ‘대충 용서’는 언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제가 그를 만날 명분이 없는데. 일단 내일 출근이나 해 볼까. 일언반구 언질 없이 가도 되나. 아니, 당연히 되겠지. 바지사장이긴 해도 어쨌거나 제가 사장인데.

아진이 이마를 긁적이며 걷는데.

“어, 야! 한아진!”

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고개만 뒤로 돌렸다. 큼지막한 인영이 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길쭉한 키, 큰 덩치, 잘생긴 외모, 어딘가 방정맞은 몸짓.

“……주혁이?”

주혁이었다. 냅다 달려온 그가 아진을 푹 껴안았다. 어찌나 세차게 돌진했는지, 그의 속력을 고스란히 떠안은 아진이 뒤로 두 걸음 밀려났다. 아진을 안은 주혁이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어……. 그래 오랜만이긴 하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메시지 보내도 씹고 전화도 안 받고. 너 이 새끼 나 차단했냐?”

“차단?”

몸이 옥죈 아진이 억눌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메시지도, 전화도 본 기억이 없는데. 제 핸드폰은 늘 고요했다. 핸드폰이 고장이라도 난 건가 생각하다, 언젠가 석주가 제 핸드폰을 만졌던 이후로 주혁의 연락을 하나도 받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럴지도.”

“그럴-지도?”

주혁이 아진을 홱 떼어 내며 눈을 부라렸다. 아진이 아프게 잡힌 팔뚝에 인상을 쓰며 그를 밀어 냈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주제를 옮겼다.

“너 왜 여기 있어?”

“아, 다현이 오늘 제주도에 일 있대서 데려다주러 왔지.”

“아…….”

아진이 그의 여자 친구를 떠올렸다. 그러다 그날, 그들이 술과 약에 취했던 것까지 상기하고는 쯧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 꼴을 보고 나니 딱히 주혁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아진이 그럼 잘 가라, 이별을 고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주혁이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넌 혼자 어디 갔다 오냐? 석주 형은?”

“어…… 뭐, 이모한테.”

“아, 꽃님 이모? 잘 계신다지?”

아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구쳤다. 꽃님도 아나. 별걸 다 아네. 그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있지. 그럼 나 일이 있어서-”

“일은 무슨. 너 혼자 있는 거 보면 석주 형이 또 어디서 네 몫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겠는데.”

“…….”

이 새끼 뭐지. 왜 다 알고 있지. 아진이 신기한 마음 반, 불쾌한 마음 반을 담아 주혁을 쳐다보는데. 주혁이 씨익 입을 째며 웃었다.

“우리 오늘 호텔에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아니.”

“응, 좋다고? 그럴 줄 알았어.”

“싫다니까.”

“차 어디 댔냐. 네 차 타고 가자. 나 어차피 이틀 뒤에 여기 또 와야 해. 차 두고 가도 괜찮아.”

주혁은 도통 말을 들어 먹지 않았다. 어깨를 꽉 움켜쥐는 손에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잖아도 피곤했던 몸과 정신이 더욱 고단해졌다.

우연이 또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가져왔다.

이쯤 되니 우연이 싫어졌다.

* * *

주혁의 손에 이끌려 온 호텔은 언젠가 아진이 회사 행사로 왔던 그 호텔이었다. 널찍한 호텔 룸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익숙한 이들은 주혁의 생일잔치 때 봤던 이들이고, 나머지는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하는 거로 보아 기억은 없으나 안면은 있는 이들 같았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꽤 됐는지, 빈 술병도 많았고 다들 적잖이 취해 있었다. 몇몇은 금연이건 말건 담배도 뻐끔뻐끔 피워 댔다.

아진은 주혁의 손에 이끌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았다. 빼도 박도 못하는 자리였다. 낭패감 가득한 그의 낯에 주혁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위스키를 따른 잔을 들려 주었다.

“마셔, 마셔. 애들 따라잡아야지.”

“별로 안 당기는데…….”

“안 당겨도 마시면 들어가는 게 술이야.”

주혁이 보란 듯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크, 하며 걸쭉한 신음을 흘렸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여기서 도망칠 방법은 없을 듯싶었다. 석주라면 또 모를까. 그가 짠- 하고 나타나서 언젠가처럼 주혁의 어깨를 탈골 시켜 주면 좋을 텐데.

아진이 무심코 석주를 떠올리며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에 취한 몸이 끝도 없이 무거워지고, 더워졌다. 소파가 등을 빨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텔 룸 통창으로 펼쳐진 서울 풍경이 파랬다가 붉었다가 지금은 검었다.

그것을 곁눈질하던 아진이 푸후, 숨을 내쉬었다. 알코올 냄새가 한껏 역류했다. 그게 역해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코앞으로 또 술잔이 들이밀어졌다.

“마셔.”

“주혁아…….”

“왜.”

“나 집에 가고 싶어.”

“에이, 뭐 벌써 가. 좀만 기다려. 너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곧 온대. 너 있다고 하니까 급하게 오는 거라 시간이 좀 걸린다네.”

그 말에 가물가물 내려앉던 아진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 석주 형?”

“뭔 소리야. 석주 형이 여기 왜 와.”

주혁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아진을 흘겨봤다. “그놈의 석주 형, 석주 형. 징그럽다, 새끼야.” 그가 아진의 손에 굳이 굳이 술잔을 쥐여 주었다.

“짠 해, 짠. 오랜만에 만난 만큼 뒤지게 마셔 보자, 친구야.”

“안 마신다고.”

아진이 그것을 쾅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취한 몸이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서 술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손이 질퍽하게 젖었다. 아진이 에이, 하며 손을 털었다.

“취했냐?”

주혁이 휴지를 북북 뽑아 아진에게 주었다. 아진이 그것을 낚아채 손을 닦았다. 그러다 이 자리를 벗어날 묘안을 떠올렸다.

“나 화장실 가야겠다.”

“같이 갈까?”

“징그럽다, 새끼야.”

아진이 주혁의 말을 따라 하며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주혁은 피식 웃더니 아진이 나갈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진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의 존재를 확인했다.

널찍한 스위트룸은 방이 세 개나 됐다. 방마다 욕실도 달려 있었다. 아진은 개중 술판이 벌어진 다이닝 룸과 가장 먼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도 씻고, 찬물에 세수도 했다.

아진이 젖은 앞머리를 훌떡 뒤로 쓸어 넘겼다.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그는 깊게 호흡하며 술기운을 털어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때려 붓다시피 한 술은 몸은 물론이거니와 뇌까지 지배한 상태였다. 아진이 욕실 벽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았다. 무거운 고개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하아…….”

이성이 뭉개지니 자연히 석주가 떠올랐다. 일종의 버릇 같은 거였다. 전생에는 이렇게까지 그에게 의지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현생에서는 뭐가 조금이라도 번거롭거나, 힘들거나, 귀찮거나, 외롭거나 하면 곧장 석주가 떠올랐다. 그가 10년 동안 이 몸뚱이를 제대로 길들인 모양이었다.

아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앉은 채로 몸을 휘청거렸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핸드폰을 밝혔다. 5번을 찾아 누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석주 형]

오랜만에 핸드폰에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진은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멍하니 보다, 뒤늦게 전화가 연결되었음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얼른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아진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고, 낮으며, 안정감 있는 저음. 듣기만 해도 긴장이 풀리는 목소리. 아진의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앉았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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