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28화 (22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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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입을 벙긋 벌렸다. 그래, 공백이 있다. 제가 죽은 그 시점부터 다시 태어난 순간까지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비어 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어디서 무얼 했을까. 기억이 없었다. 다만 아주 아득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웠던 느낌만이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었다.

“보통 그사이에 업보를 청산하지. 치를 업보가 있으면 지옥에 있는 거고, 없으면 바람, 풀, 파도 같은 게 돼서 영혼을 쉬게 한다더라.”

“바람, 풀, 파도…….”

아진이 꽃님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것들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후련해졌다. 전생에 저를 괴롭혔던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벌을 받았겠구나 싶어서.

아진이 얼음만 남은 아이스티를 후루룹 빨아당겼다. 그러다 얼음 하나를 물고 과자처럼 깨 먹는데. 꽃님이 아진의 허벅지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네가 아는 사람이 전생에 그렇게 나쁜 인간이었다면 지옥도 겪었을 거고 아마 현생에서도, 그러니까 지금도 벌 받고 있을 거다.”

“……아닌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행복해 보이던?”

“어, 아니, 행복까지는 아니지만, 뭐…… 바라는 건 대충 다 이룬 것 같았어.”

아진이 얼음 때문에 차게 언 볼 안쪽을 혀로 문질렀다. 꽃님이 그런 아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매우 평이한 어투로 물었다.

“석주는 전생이 언제 기억났다던?”

“어, 한 13년 전- 뭐야! 어떻게 알았어!”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아진이 벌떡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그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가, 후다닥 다시 꽃님에게로 다가왔다. 동그랗게 뜨인 눈에 경악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 이모 신기 있어? 뭐가 보여?”

그 방정맞음에 꽃님이 그의 손목을 쥐어 자신의 옆에 앉혔다.

“빤하지, 등신아. 네가 ‘아는 사람’이 석주밖에 더 있냐. 그리고 석주 사주도 내가 빤히 꿰고 있는데. 걔 사주가 전생에 혼이랑 피를 잔뜩 잡아먹어서 아주 사납다고 했어. 무당이 혀를 차더라. 그 정도 사주면 전생을 기억하지 말란 법도 없지.”

“하……. 이모는 진짜 눈치가…….”

아진이 아이스티 잔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얼음을 입 안으로 쏟아붓는데. 꽃님이 아진 쪽으로 다리를 꼬며 넌지시 물었다.

“석주가 행복해서 불만이냐.”

“어? 아니-이? 그건 아닌데…….”

불만인가. 석주가 멀쩡해서 신경질이라도 난 건가. 에이, 제가 그렇게 옹졸할까, 싶지마는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진이 얼음을 사탕처럼 굴리며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진짜 석주가 불행하기를, 전생의 저처럼 고단하고 볼품없이 살기를 바란 건 아닌데…….

그때, 꽃님이 검지로 아진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네가 봐 온 석주의 삶이랑 석주가 직접 겪는 석주의 삶은 아주 다를 거야.”

“다르다고?”

“그래. 걔는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줄 테니까. 다른 건 숨기고 말해 주지 않겠지.”

아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다기엔 제가 석주와 너무 오래 알았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지만, 10년이나 함께하지 않았나. 그동안 석주는 한시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저와 함께 살기까지 했으며, 번듯한 직장에 몸담고 있고, 일이 많긴 하나 돈을 웬만한 임원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정도면 ‘벌’이라는 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아진의 발끝이 까딱까딱 움직이는데. 꽃님이 다시금 말을 뗐다.

“석주는 13년 전에 찾았다며. 전생 기억.”

“응.”

“넌 언제 찾았는데.”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슬쩍 꽃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말하기 껄끄럽다는 몸짓이었다. 그에 꽃님이 철썩 그의 팔뚝을 후려쳤다.

“아!”

“인제 와서 뭘 숨기려 들어.”

아진이 손바닥으로 팔뚝을 벅벅 문댔다. 그러고는 순순히 진실을 토로했다.

“한……, 한 5개월 전에?”

“그럼 석주가 13년 동안 혼자 널 기억하고 있었다고 봐도 되겠네.”

“그렇지.”

“너희가 전생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꽃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걔한테는…… 그게 업보 아니었겠냐.”

“어?”

“그 긴 시간 동안 자기를 모르는 네 곁에서 널 지켜보고 있는 거.”

“…….”

“아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심장이 쿵- 저 아래로 추락하더니 그대로 멎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아픔이었다. 놀랍게도 석주는 이미, 혼자서만 알아 온 전생이 퍽 서글펐음을 제게 이야기해 주었다.

‘근데 그냥…… 지나치더라고.’

‘그 순간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어. 미움조차 받지 못하는 아무개였지.’

‘어찌나 무섭던지. 얼마나 슬프던지…….’

며칠 전에도 그 말을 했었고, 제가 모든 걸 알았던 그날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좋았어. 너라서.’

‘내가 사랑하던 너라서.’

‘내가 사랑하는 너라서.’

그 말을 하는 석주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당시엔 그저 미친놈이라고, 눈치도 없다고, 어떻게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화를 냈는데. 석주는 그 모든 걸 상회할 만큼 제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게 기뻤던 것 같았다.

그렇겠지.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알지만 동시에 모르는 저와 함께해 왔을 테니까. 이제는 같은 걸 기억하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니 분명 기쁠 터였다.

아진이 후우욱 헛숨을 들이켜는데. 파도가 세차게 철썩였다. 꽃님이 그의 무릎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걔가 전생에 얼마나 나쁜 놈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보는 석주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던데.”

“이모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타적이고 착하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너한테 나쁜 놈이 아니었단 말이야.”

“…….”

“어디서 저렇게 기특한 게 굴러 들어왔을까 싶을 정도로 너한테 지극정성이었어.”

그래서 선화랑 내가 석주 칭찬을 많이 했다. 꽃님이 차로 마른입을 축였다. 그녀를 보던 아진이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지극정성이었던 건 중요치 않았다.

원래도 그랬으니까. 모든 진실이 알려진 후부터 내내 그랬고, 아진은 그것을 딱히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석주도 그것을 벌을 받는다는 둥, 당연히 해야 한다는 둥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절 모시는 게 기분 좋아 보인달까. 속죄라는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아진이 입술을 비죽 뒤트는데. 꽃님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매우 좋았다.

“지옥에서도 충분히 벌 받았을 거고, 다시 태어나서도 전생의 업보를 받아, 삶의 반절을 너만 보며 살아왔는데. 용서해 주지 그러냐.”

“……용서?”

민감한 단어에 아진이 우뚝 굳었다. 선화도 그렇고 꽃님도 그렇고 용서를 참 쉽게 말했다. 아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걸 그렇게…….

제가 당했던 고통을, 흘렸던 눈물을 줄줄이 읊어 대면 꽃님은 그 언젠가처럼 날카로운 걸 들고 석주의 배를 쑤실지도 몰랐다. 선화도 분기탱천하겠지.

근데 말해 봐야, 제 고통을 그녀들에게 얹어 주는 게 될 것이 뻔해서 함구하고 있는 거였다.

아진이 미간을 한껏 구기는데. 꽃님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근데 아주 용서해 주지 말고, 대충 용서해 줘. 대충.”

“대충 용서? 그게 뭐야.”

해괴한 단어의 조합에 아진이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자 꽃님이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며 그의 뺨을 슬슬 문질렀다.

“몰라. 너한테 개새끼였다니 갑자기 조금 미워지려고 하네.”

“개, 개새끼라고는 안 했어.”

“나쁜 놈이면 개새끼지.”

“그건…… 그렇지만…… 막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니까…….”

아진이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영 모질지 못한 그에 꽃님이 픽 웃었다.

“석주가 아주 개새끼든, 적당히 개새끼든. 걜 내칠 순 없잖으냐. 걔가 없으면 네가 아픈데.”

“…….”

“진아, 인정할 건 인정해라. 너한테는 석주가 필요해. 있어야 해. 그래야 너희 엄마 두 발 뻗고 잔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겨울이야 어찌어찌 넘겨도 내년 여름에 석주 없이 어쩌려고 그러냐, 너.”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푹푹 찌는 여름, 그 뜨겁고 기나긴 밤을 석주 없이, 그의 체온 없이 버틸 걸 생각하니 등줄기가 다 부르르 떨렸다. 꽃님이 그런 아진의 등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니까 대충 용서해 줘서, 곁에 두고, 부려 먹으면서 살아. 걔가 바라는 것도 그거 아니냐?”

“…….”

“용서 그거 했다고 당장 다음 날부터 마주 보고 하하 호호 하면서 지낼 필요는 없다. 그냥 대충대충 상황에 맞게 적당히 어울리면 되는 거지.”

쉽게 생각해, 쉽게. 꽃님이 금세 차게 식은 찻잔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다고 누가 욕을 하겠냐, 자존심도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냐, 혀를 차겠냐. 어차피 너희 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전생인데. 편하게 살아, 편하게.”

“편하게…….”

아진이 꽃님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흐음, 하고 목으로 신음하며 그녀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대충…… 용서…….”

입에 익는 단어들은 아니지만, 그 어감이 나쁘진 않았다. 거창하고 완벽하게 용서하지 말고, 대충 용서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쉽진 않겠지만 못 할 것도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진이 자신의 가슴팍을 슥슥 쓰다듬었다. 깊숙이 박혀 있던 가시가 뽑기 좋게 쑥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단하던 총알이 물렁물렁하게 녹은 것 같았다. 얼떨떨했다.

꽃님이 그런 아진의 뒤통수를 크게 쓰다듬었다.

“그 기억이 걔한텐 벌이고, 너한텐 상이야. 그렇게 생각해.”

“……응, 그래 볼게.”

아진이 다시 꽃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파도가 몰고 온 바다 특유의 물 내음을 담뿍 들이마셨다. 가슴이 싸-하게 식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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