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27화 (22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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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석주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어쩜 너는 이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사랑스러운 아진이 신기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석주가 넋 놓고 아진을 쳐다보는데. 아진이 후다닥 도망치듯 현관으로 뛰어갔다.

“나 갈게요. 나오지 마요.”

그는 행여 석주가 또 잡을까,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뒤뚱뒤뚱 마당을 가로질렀다. 석주가 다시 잡으면 이번엔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 석주는 현관 앞에 서서 아진이 멀어지는 걸 보기만 할 뿐. 따라오진 않았다.

“…….”

대문을 연 아진이 슬쩍 석주를 뒤돌아봤다. 석주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기도 했다. 아진은 무심코 그를 따라 손을 흔들려다,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대문 밖으로 나왔다.

아진은 담벼락을 따라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멈춰 섰다. 구겨진 운동화 뒤축을 펴기 위해서였다. 허리를 숙이며 숨을 내쉬자 뿌연 입김이 훅 뿜어졌다. 그리고 바람에 그 입김이 사라졌을 때, 우뚝 굳어야 했다.

운동화가 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것도 제 운동화긴 한데……. 낡았으나 새것 같은, 그 묘한 간극에 있는 하얀 운동화는 전생에 제가 신던 거였다. 급하게 나오느라 잘못 신고 나온 듯했다.

“어쩌지…….”

아진이 턱을 긁적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석주가 제게 준 것이지 않나. 여전히 제 것이니 신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타박타박 주차된 차를 향해 가는 아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잘 자서 그런가. 아니면 짐처럼 느껴지던 석주의 병간호를 끝내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저 낡은 집에서 나와서 그런가. 아무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앞에 선 아진이 주머니에서 차 키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다 무심코 핸드폰을 밝히는데.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꽃님이었다.

[요즘 개차반으로 산다며. 제주도 와. 롤케이크 구워 줄게.]

* * *

제주도는 서울에 비하면 따듯한 축에 속했다. 근데 바람이 거셌다.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으면 그렇게 날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진은 제주도가 좋았다. 저번에 꽃님을 만나러 왔을 때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꽃님의 메시지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근데, 꽃님은 아진이 오자마자 앞치마부터 던져 주었다. 꽃님의 카페 로고가 수놓인 앞치마였다. 즉,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아진이 한숨을 내쉬며 앞치마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제주도는 사시사철 항상 관광객이 많다. 젊은이들도 좋아하고 나이가 있는 이들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꽃님이 운영하는 카페는 제주도의 맑은 바다를 앞에 두고, 한옥을 콘셉트로 해서 특히나 인기가 많았다. 기와지붕에, 진짜 양반집처럼 사랑채, 안채 등으로 나누어진 건물에, 소담한 연못이 있는 정원에, 제주도를 본떠 만든 음료와 맛있고 다채로운 디저트들까지. 크기며 매출이며 기업에 가까웠다.

덕분에 일하는 직원들은 죽어났다. 설거지하고 테이블 닦고, 다시 설거지하고 쓰레기 비우고, 또 설거지하고……. 직원들이 툴툴거리는 말로는 ‘설거지옥’이랬다.

아진은 그 설거지옥에 갇혀 정신없이 움직였다. 너무 바빠서 뭘 생각하고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제주도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상상한 건 꽃님의 곁에 드러누워, 그녀가 해 주는 김치전을 오물거리며 불편한 마음을 구시렁거리는 저였는데. 지금 컵을 84개째 씻고 있었다.

분명 식기세척기가 몇 대나 있는데, 항상 꽉 차 있어서 회전율이 빠른 컵은 사람이 바로바로 씻어 줘야 한단다.

“내가 전생에도 컵을 이렇게 많이 씻어 본 적이 없어…….”

아진이 으득 이를 짓씹는데. 마침 꽃님이 다가왔다. 막 베이킹 하나를 끝낸 건지, 온갖 종류의 베이킹 도구를 들고 있었다. 버터로 번들거리는 도구들을 본 아진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저건 정말이지 씻고 싶지 않았다.

근데 꽃님이 쟁반째로 그것을 아진의 앞에 턱 내려놓았다.

“수고해라.”

무심한 격려는 덤이었다. 아진이 눈을 부릅떴다.

“이모! 나 일 시키려고 불렀어?”

“뭐, 겸사겸사.”

“롤케이크 구워 준다며!”

“일 잘하면 일당으로 구워 줄게.”

“아직…… 굽지도…… 않았어……? 그냥 바깥에 있는 케이크 줘. 당장 먹어야겠어.”

“그건 파는 거고 이놈아. 눈독 들이지 마.”

“진짜…… 너무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아진이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걸친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러자 꽃님이 뒤로 묶인 그의 앞치마를 움켜쥐고 위로 쑥 올려 일으켰다. 예나 지금이나 힘이 장사였다.

“쉬지 말고 해. 쉬지 말고.”

“아, 이모!”

“쉬어 봤자 하기 싫다는 생각밖에 더하냐. 잡생각 말고 움직여.”

그러더니 팩 뒤돌아 가 버렸다. 멀어지는 그녀를 애처로이 보던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수도꼭지를 뜨거운 물 쪽으로 휙 돌렸다.

카페가 마감되고,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업무를 마친 직원들도 모두 퇴근했다. 꽃님은 크고 작은 조명을 모두 끄고 하나의 불만 켜 두었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내려 테라스 좌석으로 향했다.

바다를 눈앞에 두고, 활활 타오르는 길쭉한 난로를 곁에 둔 테이블. 그곳엔 아진이 늘어지다시피 앉아 있었다. 포크를 든 그가 롤케이크를 밥 푸듯이 퍼 입 안 가득 집어넣었다. 꽃님이 소리 죽여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맛있냐?”

“맛있지. 이모가 만든 건데.”

볼을 빵빵하게 채운 아진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꽃님이 그의 앞에 갓 내린 차를 내려놓았다. 하얀 김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그것을 본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뜨거운 거 싫어.”

그러더니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티를 쭙쭙 빨아 마셨다. 꽃님이 쯧쯧 혀를 찼다. 아무리 제주도라도 겨울밤이고 바다 앞이라 추운데, 저렇게 차가운 걸 들이켜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아진이 신기했다.

꽃님이 어깨에 두른 담요를 추스르며 차를 홀짝이는데. 신발을 벗은 아진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얀 양말이 귀엽게 움직였다.

“식기세척기를 하나 더 사. 아니, 한 세 대 더 사. 그리고 컵도 백 개 더 사 버려. 아니면 내가 사 줄까? 얼른 안 사면 직원들이 다 도망갈걸? 설거지 진짜 너무 힘들어. 너무 싫어. 나 나름 러닝도 하고 누나랑 테니스도 치는데. 노동은 확실히 다른가 봐. 종일 서 있으려니 죽을 맛이야.”

아진은 연신 롤케이크를 퍼먹으며 주절주절 불평을 해 댔다. 꽃님은 그런 아진이 익숙한 듯, 먼바다를 응시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한동안 불평을 하던 아진은 그마저도 힘이 든 건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앉은 채로 의자를 들어 꽃님의 옆에 딱 붙었다.

두 사람은 잠시간 별다른 말 없이 바다를,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썩철썩, 쏴아아, 철썩철썩, 쏴아아……. 아무도 감시하고 있지 않은 밤임에도 혼자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파도가 대단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아진이 포크로 그릇에 남은 롤케이크 크림을 삭삭 긁어 먹었다. 그러고는 배부른 새끼 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축 늘어졌다. 꽃님이 픽 웃으며 그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아진이 배시시 눈을 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나직이 꽃님을 불렀다.

“이모.”

“왜.”

“이모는…… 전생 믿어?”

“전생?”

아진의 입에서 나오기엔 영 이질적인 단어에 꽃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전생이고 사주고 그딴 게 어딨느냐고 경기를 일으키더니. 갑자기 왜? 궁금해졌어?”

“내가 그걸 싫어했어?”

아진이 되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꽃님이 헛웃음을 흘렸다.

“싫어했지. 엄-청 싫어했지. 무당 좀 만나러 가자면 싫다고 길바닥에 엎어졌지, 아주. 지 아플 때 살린 게 굿인 줄도 모르고…….”

그녀가 쯧쯧 혀를 차는데. 아진이 반색했다.

“그럼 이모는 믿는다는 말이네?”

“뭐, 없으란 법은 없지. 근데 왜.”

“어……. 어느 날 갑자기 전생이 기억날 수도 있을까?”

“왜? 너 요즘 헛것 보이냐?”

“아니. 그냥 묻지 말고, 답만 해 줘, 답만.”

아진이 팩팩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꽃님이 흐음, 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먼바다를 바라보며 그것을 홀짝였다.

“석주 만나기 전에, 네가 하루걸러 아프고 다치고 할 때. 네 엄마랑 용하다는 집이란 집은 다 다녔거든?”

“응.”

“그러면서 주워들은 게 많은데. 전생에 정해진 삶을 다 못 채우고 죽으면, 다음 생에 그걸 기억하게 해 준다더라.”

“…….”

“누려야 할 걸 못 누리고 죽었을 테니까, 다음 생에서라도 채우라고 기회를 주는 거지.”

“뭘…… 어떻게 채우는데?”

“방법이야 여러 가지지. 먹고, 자고, 돈 쓰고, 사람 만나고, 사랑하고 그런 거 아니겠냐.”

“…….”

“또 그렇다고 좋은 것만 있을까. 복수도 있을 거고, 미움이나 원망도 있을 거고, 덜 받은 벌 받으라고 기억을 되살려 줄 수도 있겠지.”

“벌…….”

아진이 짧은 단어를 읊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의아했다. 굳이 따지자면 석주는 후자의 이유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봐야 한다. 허나 그렇다기엔…….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전생을 기억한대. 근데 그 사람은 전생에 무지무지, 진짜 무-지 많은 죄를 지었었거든? 어, 그렇다고 또 되게 나쁜 사람은 아니고. 나쁜 사람들한테 나쁜 사람이었는데, 아니, 안 그럴 때도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데 딱히 벌을 받은 것 같지는 않던데.”

어렵게 풀어 가는 석주의 사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진이 답답한 마음에 정수리를 긁적이는데. 꽃님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럼 지옥에서 충분히 썩었나 보지.”

“……지옥?”

“전생과 현생 사이에 공백이 있잖으냐. 인간이 죽자마자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 그 공백은 찰나처럼 짧다가도 영원처럼 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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