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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진이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그와 달리 제 체온은 뜨거웠다. 손끝이 봉숭아 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불그스름했다.
이 온기를 조금만 나누어 줘도 석주가 한결 편해질 텐데.
그럼 조금 더 따사로이 잘 수 있을 텐데.
따뜻한 체온이 언 몸에 스며드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얼마나 편안하고 따뜻한지 알고 있는데.
석주가 가르쳐 준 따뜻함인데.
그가 밉지만, 이 넘치는 체온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에게서 옮겨 온 체온이니, 조금 돌려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진이 머뭇거리는데, 석주가 콜록콜록 기침했다. 그에 입술을 꾹 겹쳐 문 아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건 간호다. 우리 둘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간호. 이 유난스러운 체온의 유일한 치료제.
아진의 손이 석주의 손에 닿았다. 손끝만 스쳤을 뿐인데, 뜨끈한 체온과 차가운 체온이 훅 휩쓸렸다. 놀란 석주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아진이 얼른 말했다.
“눈 뜨지 마요.”
“…….”
“뜨지 마.”
석주가 어금니를 꾹 씹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용케 눈은 뜨지 않았다.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석주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붙였다.
석주의 가슴이 두툼하게 솟아올랐다. 미간도 설핏 구겨졌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아진은 왠지 즐거워졌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아진이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석주의 서늘한 체온이 밀려왔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아진은 석주의 손을 미약한 힘으로 주물렀다. 언젠가 석주가 제 손을 이렇게 주물러 줬었는데, 그게 참으로 좋았다. 보살핌받는 기분. 걱정받는 기분. 사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석주도 그 기분을 느꼈으면 했다. 정말 특별한 기분이라.
아진은 정성스레 그의 손을 주물렀다. 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럴수록 석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눈을 뜨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아진이 꾹 웃음을 삼켰다. 그러다 슬쩍 입을 뗐다.
“날 어떻게 찾았어요?”
“응?”
“스무 살에. 전생이 불현듯 떠올랐다면서요. 그리고 나를 찾아오려고 공부했다면서. 근데 어떻게 찾았어요?”
궁금하던 거였다. 기억을 찾기 전, 석주는 부산에 있었는데. 어떻게 절 찾아왔을까. 아무리 우리가 질긴 인연으로 묶여 있다지만, 실로 연결된 것도 아니고.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에 석주가 피식 웃었다. 난데없는 질문이 너무 시답잖아서 기뻤다.
“너 한아진이잖아.”
“네?”
“그냥 아진이 아니라, ‘한’아진이잖아. 네 이름 검색했더니 네가 어느 집 아들이고, 가족 관계는 어떻고, 무슨 학교에 다니는지까지 다 나오던데.”
“아…….”
아진이 탄식했다. 그래, 인터넷이 있었구나. 더군다나 제 가족들은 기사는 물론, TV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이고. ‘찾는다’라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했을 터였다.
궁금증 하나를 해결한 아진은 곧장 또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그럼 과외 선생님으로는 어떻게 왔어요?”
“우리가 인연이 깊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석주가 아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눈은 뜨지 않았다. 다만, 아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엄지로 손등을 문지르는 건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다. 석주는 아진의 손을 쥔 채 단조로이 과거를 나열해 갔다.
“내가 대학생 때 어렵게 살았거든.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고, 그 와중에 장학금도 받아야 하니까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뭐, 정신없을 만큼 바쁘게 살았어.”
“…….”
“젊은 청년이 그렇게 살면, 어른들이 유독 예쁘게 봐 줘. 기특해하고, 안쓰러워하고.”
“…….”
“그러다 어느 날은 과 교수가 부르더라. 아주 좋은 과외 자리가 들어왔는데, 해 볼 생각 있냐고. 좋은 집안이라 돈을 많이 줄 거라고. 그거면 아르바이트 관두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그게…….”
“너였지.”
말도 안 돼. 용왕님 진짜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이네, 아니 신이네. 어쩜 그렇게까지 저와 석주를 만나게 하려고 수를 썼나. 어이가 없었다.
“원래 내 계획은 열심히 공부해서 너희 회사 비서 팀으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그러다 우연히라도 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그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뭐 경호원이나 본가 가사도우미나, 뭐든 해 볼 생각이었어. 근데 네게 가는 길이 참…… 짧더라고.”
석주가 다시 생각해도 우습고 신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길이 아무리 멀고 비비 꼬여 있어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가 아진의 손가락을 슥 쓸어내렸다. 그러다 손바닥을 더 깊이 붙이며 손을 잡아 왔다. 아진은 흠칫 몸을 떨었으나 손을 빼내진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다리도 쭉 뻗어 펼쳐 놓았다.
“그렇게 날 처음 봤을 땐 기분이 어땠어요. 과외 선생님으로 왔던 날 말이에요.”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그럼요?”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니. 제 기억상으로는, 그러니까 수없이 꾼 꿈들에 의하면 분명 그때가 처음인데. 교복을 입은 저와 묘한 표정의 석주가 마주 보던 때 말이다.
“네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갔었어.”
“……뭐라고요?”
“잘 준비해서, 번듯한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야겠다, 뭐 그런 이성적인 생각까지 할 겨를이 없었어. 조급했거든. 너를 보고 싶었어. 이 괴상하고 신기한 세상에도 네가 있다는 걸 당장 확인해야 했어. 네가 없는 세상에서는 딱히 살고 싶지 않았거든.”
“…….”
“네가 다닌다는 학교 앞에서 무작정 널 기다렸어. 늦은 오후가 되니까 교복 입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더라. 그리고 그 틈에…… 아진이 네가 있었지.”
“…….”
“내가 알던 것보다 조금 더 작고 앳된 너였는데, 그래도 너였어.”
석주가 당시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전생에서는 아진이 스무 살 때 처음 만났다. 그때도 아직 덜 자란 소년 같았는데, 그보다 더 어린 아진은 훨씬 말랑하고 뽀얗고 풋풋했다.
“아……. 숨이 멈추는 것 같았어. 기쁘더라. 감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
“그리고 나는 기대했지. 네가 날 보고 욕을 해 주길. 주먹질이라도 하길. 뭐 하다 이제 나타났냐고 화를 내길.”
이어지던 석주의 미소가 사그라졌다.
“근데 그냥…… 지나치더라고.”
“…….”
“그 순간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어. 미움조차 받지 못하는 아무개였지.”
“…….”
“어찌나 무섭던지. 얼마나 슬프던지…….”
석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과거에서 되돌아온 검은 눈동자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 아진이 그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온통 검고 검은데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석주의 눈동자가 신기했다.
석주가 아진의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뺨을 묻었다.
“널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었지.”
“…….”
“네가 날 잊은 것 같아 무서웠어. 슬펐고, 우울했고, 염치없이 섭섭하기도 했고. 근데 또 반가웠고, 네가 날 잊은 듯해 다행이었고, 다행인데 아쉬웠고…….”
“…….”
“너도 그랬겠지. 이 세상에서 처음 눈떴을 때, 눈떠서 네 옆에 있는 날 봤을 때. 별별 감정이 다 들었을 거야.”
“…….”
“그런 널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또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게 해서 미안해.”
“…….”
“미안해……, 아진아.”
석주의 목소리가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아진은 손을 내어 준 채, 그의 사과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진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밤을 맞이한 세상이 온통 어두웠다. 가로등 특유의 주홍색 빛이 창으로 은근히 스며 오고 있었다. 바람에 덜거덕거리는 창문의 신음은 낮보다 더 시끄러웠다.
아진은 몇 번 더 눈을 깜빡이고서야 자신이 어디서 잠이 들었는지, 제 허리를 안은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저는 석주의 품에 안겨,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주만 제 체온이 편한 게 아닌데. 저도 석주의 체온을 안온히 여긴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등신같이 여기서 퍼질러 자냐. 간호하러 왔다고 큰소리 떵떵 쳐 놓고 나자빠져 자고. 선화가 알면 분명 등을 후려칠 터였다.
어찌나 잘 잤으면 머리가 다 맑았다. 몸도 아주 가뿐하고 개운했다. 아진이 헛웃음을 흘리는데.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잘 자더라. 밤에 잘 못 잤어?”
기겁한 아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석주와 함께 덮고 있던 이불이 훌떡 젖혀졌다. 그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석주를 쳐다봤다. 옅게 잠기운을 묻힌 석주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전보다 환했다. 추워 보이지도,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잘 먹고 잘 잤다고 그새 몸살기를 털어 낸 모양이었다.
“잘…… 잤는데.”
아진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웅얼거렸다.
거짓말이었다. 근 며칠 딱히 잘 자진 않았다. 긴 밤의 반은 잤고, 반은 뒤척거렸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반쪽짜리 불면이었다. 근데 그걸 석주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 이미 짐작하는 듯하지만.
“미안. 네가 소파에 기대서 자는데 너무 불편해 보이고, 또 너무…… 따뜻해 보여서. 욕심냈어.”
“…….”
아진은 적나라한 고백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광대만 불그스름하게 붉혔다. 그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구겨진 옷을 탁탁 아래로 잡아당겼다.
“가야……겠어요.”
“……그래야겠지.”
석주가 그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바래다줄까?”
가늠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했는데도, 하다못해 그를 안고 자는 호사까지 누렸는데도 아쉬웠다.
“아니요.”
아진이 곧장 거절을 내놓았다. 석주의 눈가에 실망이 스쳤다. 그래, 이만하면 과분하지. 그가 남겨 놓은 체온으로 며칠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을 달래는데.
아진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바깥에…… 많이 추워요.”
“…….”
“내가 기껏 간호해 준 게 겨울바람에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