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25화 (22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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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말 그대로 전생이지.”

    “형도 알겠지만, 전생의 인연이라는 게 여기서도 어찌어찌 이어지더라고요. 그러니 황 비서님이랑 친해지려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뭐 하러. 난 너만 있으면 돼.”

    석주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아진이 맺혔다.

    “너만 소중히 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

    “…….”

    “전생에 누가 그러더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게 너무 많아서, 너를 잃은 거라고.”

    먼 과거를 되뇌는 석주의 눈동자가 잠깐 흐려졌다. 이순이 한 말이었다. 금 사장의 집에서 만난 그녀는 참으로 통렬하게 저를 비난하고 제 잘못을 꼬집어 주었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죠? 내가 어쩌다 속았나, 싶고?’

    ‘…….’

    ‘강 사장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뭐?’

    ‘아진이도, 황명진이도, 식구들도, 회사도, 조직도 다 너무 사랑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그래서 아진이를 손에서 놔 버린 거예요.’

    ‘…….’

    ‘아진이만 사랑했다면 속일 필요도, 속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진이가 무얼 하든 그게 정의고 이치가 될 테니까.’

    ‘…….’

    ‘사장님도 다음 생에는 아진이만 연모해 보도록 하세요. 그럼 적어도 아진이가 사장님을 잃는 일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녀의 충고를 받들어, 이번 생에는 아진만 연모해 보기로 했다. 다른 건 다 상관없게. 무슨 일이 어떻게 터져도 오로지 아진만 생각할 수 있도록 전생의 연을 끊어 냈다. 제 핏줄 같던 명진부터 사사로운 인연들까지 모두.

    “진짜 그랬어. 명진이, 식구들, 조직, 회사, 다 내가 책임져야 했거든. 그러니까 자꾸 우선순위를 세우게 되고, 이성이 흔들리고, 그러다 너를…….”

    석주는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감히 그것들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특히나 아진의 앞에선. 목울대를 아래위로 크게 움직인 그가 단어 몇 개를 건너뛰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너만 소중히 여기려고 다른 인연은 만들지 않았어.”

    “…….”

    “근데 황 비서가 딸 낳았다는 소식에는 가만히 못 있겠더라. 촐싹 맞게 백화점에 가서 아기 용품이란 용품은 다 사서 보냈어. 그것도 네 이름 빌려서.”

    “…….”

    “그래도 그게 다야. 그랬더니 이렇게, 간호해 줄 사람 하나 없네.”

    “…….”

    “근데 하나도 외롭지 않아. 내가 불쌍해서, 불쌍한 덕분에 네가 와 줬잖아.”

    “…….”

    “와 줘서 고마워, 아진아.”

    석주가 빙긋 보기 좋게 웃었다. 아진이 그 웃음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휙 옆으로 돌렸다.

    “밥이나…… 마저 먹어요.”

    아진은 설거지를 하려 했다. 이 세상에서 눈뜬 이후로는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기회가 없어서 못 한 거지 딱히 거리낌이 있진 않았다. 그가 수세미를 집는데. 식탁을 닦던 석주가 얼른 다가왔다.

    “어, 내가 할게.”

    “……아프잖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괜찮아.”

    아진이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석주는 익숙하게 설거지를 해 나갔다.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서 집안일을 퍽 잘한다는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아진은 석주에게 부모가 없음을 문득 깨달았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전생에도 그랬다. 허나 그땐 그를 선망하며 따르는 식구들이 워낙 많아 딱히 인지하진 못했다. 저 역시 부모가 없기도 했고.

    근데 지금은 저한테 선화가 있어서 그런가. 괜히 석주가 안쓰러웠다.

    아진이 식탁 의자에 앉아 달랑달랑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데. 금세 설거지를 마친 석주가 다가왔다. 아진이 그를 올려다봤다. 석주는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넌지시 입을 뗐다.

    “차…… 마실래?”

    아진의 눈썹이 설핏 구겨졌다. 차.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석주와 마주 앉아 그런 걸 마신 기억이 없었다. 아무래도 차라 하면 김이 폴폴 날 정도로 뜨거우니까. 지나치게 고아하기도 하고. 그런 건 저나 석주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앉혀 두고 차 향기가 좋다느니 따위를 논할 생각도 없었다.

    “나 놀러 온 거 아닌데.”

    “어…… 그럼…….”

    심드렁한 거절에 석주가 다시 입을 뗐다. 등 뒤로 숨은 그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해서 아진을 조금이나마 더 보고 싶었다.

    아마 차를 우렸다면 아주 뜨겁게 우렸을 것이다. 아진은 그것이 식을 때까지 손도 대지 않을 테니까. 뭐 이렇게 뜨겁게 내렸냐며 절 노려보겠지. 그 빌미로 저는 오 분이나마 그를 더 볼 수 있을 터였다.

    석주가 그를 붙잡을 거리를 고심하는데. 아진이 벌떡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석주의 만면에 아쉬움이 스쳤을 때였다. 그가 거실에 깔린 이부자리를 가리켰다.

    “누워요.”

    “어?”

    “자는 거 보고 갈게요.”

    “…….”

    예상외의 전개에 석주가 눈을 끔뻑였다. 아진이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가 놨다. 그의 눈가에 짜증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별,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형도 내가 아플 때 와서 간호했다면서요. 그런 정성을 받았으면 돌려주는 게 이치랬어요, 엄마가.”

    “그래, 고마워.”

    석주가 얼른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여 아진의 마음이 바뀔까 빠른 몸짓으로 이부자리로 향했다. 이불을 들치고, 곱게 눕자 아진이 비척비척 어디 끌려가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석주는 자려고 누운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말똥한 눈으로 아진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윽고 아진이 이부자리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소파에 툭 등을 기댔다. 오래된 소파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는데, 그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

    무릎을 모아 안은 아진이 석주를 바라봤다.

    “…….”

    석주도 아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눈을 맞추고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이 사라지니 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수십 년 전, 아진이 유독 적응하기 어려워했던 그 적막함이었다. 석주에겐 이 적막함이 어떻게 다가갈까, 궁금해지려는 찰나. 덜커덕.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아진이 거실에 달린 창을 바라봤다. 오래되어 조금씩 어긋나고 뒤틀린 창틀이 작은 바람에도 힘겨워하고 있었다. 때때로 어디선가 바깥 공기도 스며 왔다. 앞머리가 은근히 흔들리거나, 콧잔등이 싸해질 정도로 차가운 공기였다.

    “여긴 춥네요.”

    아진이 석주가 덮은 이불을 쥐었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내리고 있는 그가 추워 보여서 덮어 주려는 거였다.

    “추워? 어, 외투 갖다 줄까?”

    근데 석주가 휙 이불을 들치고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진이 온통 인상을 쓰며 그의 어깨를 바닥으로 눌렀다.

    “나 말고 형이요. 형이 춥겠다 싶어서.”

    누워요, 얼른. 그 말에 석주가 스르륵 다시 몸을 뉘었다. 아진이 묵직한 이불을 끌어당겨 그의 턱 끝까지 덮어 주었다. 석주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래된 집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뭐 하러 여기 있어요. 멀쩡한 집 놔두고. 우리 같이…… 살던 집. 거기로 돌아가요. 내가 안 가면 되잖아.”

    “…….”

    “아니면 그 집 형 줄게요.”

    이불을 정리해 준 아진이 소파에 다시 등을 붙이며 말했다. 시선이 멀리 멀어지는 걸 보아 이 대화가 불편한 것 같았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네가 없는 그 집에 뭐 하러. 그곳은 돌보지 않아도 건강한 집이지만, 이 집은 사람이 살면서 생기를 묻혀 줘야 해. 안 그럼 시름시름 앓다가 크게 병들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야. 이곳만은 잃고 싶지 않아.

    근데 그렇게 주절주절 말해 봐야, 아진에게 제 감정을 짐처럼 얹어 주는 게 될 것 같아 말았다.

    “……그래.”

    석주는 자질구레함 없이 긍정했다. 그리고 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진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눈 감아요, 빨리.”

    자라니까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잘 생각 없으면 갈래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석주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요하게 달라붙던 시선이 사라지니 어깨가 다 느슨해졌다.

    대화가 끊기자 다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진 스산하고 춥게 느껴졌는데, 듣다 보니 또 괜찮았다.

    아진은 조용히 집을 살폈다. 여기저기 켜켜이 묻은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한쪽에 서 있는 책장이 특히나 낡았다. 즐겁게 보던 책들이 누레지고, 드문드문 삭기도 한 게 울적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마침내 시선이 석주에게 닿았다. 석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을 하는 건지, 자려고 노력하는 중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진은 찬찬히 그를 훑어보았다.

    높다란 콧대. 짙은 속눈썹. 보기 좋은 곡선을 띤 광대. 밥 좀 먹었다고 제법 생기를 되찾은 입술. 누워 있어서 더욱 도드라진 목울대 같은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잘생긴 얼굴이 멋지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아진이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그러면서도 석주에게서 눈을 떼진 않았다. 그러다 턱 끝까지 올려 준 이불이 그새 목 아래로 내려와 있는 걸 발견했다. 키가 워낙 큰 탓에 이불이 간당간당하게 그를 덮고 있었다. 손은 밖으로 비죽 나온 채였다.

    “…….”

    아진이 그 손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석주의 손은 여전했다. 크고, 곧고, 도드라진 마디가 사내다웠다. 근데 분위기가 달랐다. 항상 뜨끈한 열을 머금고 있던 손바닥이 차게 식어 있었다. 손끝은 창백할 정도로 하얬다.

    그래 봤자 손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손이 시린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어서 그랬다.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경험하는, 차가운 바깥 공기에 손이 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바깥 공기도 차가운데, 제 속에서 뿜어지는 체온도 차다. 피부가 먼저 어는 게 아니라 뼈가 먼저 언다. 제가 껴안고 있는 한기와 바깥에서 몰아치는 한기에 꽁꽁 언 손은 잘 구부러지지도 않고, 감각도 무디다. 오로지 고통만 또렷하다.

    그건 정말이지 지독하고 끔찍한 느낌이었다. 하루 이틀 참아서 끝나는 게 아니라, 겨우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 더 끔찍했다.

    그리고 지금은 석주가 그 혹독한 추위를 감내하고 있을 터였다. 저와 체온이 바뀌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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