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커다란 금색 보자기를 든 아진이 작동은 하는 건가, 의심이 될 만큼 낡은 초인종을 노려봤다. 그러다 훅 콧김을 뿜으며 그것을 꾸우욱 짓눌렀다. 딩동, 예상보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자기가 눌러 놓고 놀란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진은 별다른 불만 없이 기다렸다. 초가집과 비등할 정도로 오래전에 지은 집이라, 인터폰으로 문을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인이 직접 바깥으로 나와 대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아진이 운동화 밑창으로 딱딱하게 언 바닥을 슥슥 긁고 있는데. 저 멀리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아진이 저도 모르게 담벼락 아래로 숨었다.
“어휴, 등신…….”
숨긴 왜 숨어. 아진이 눈을 꽉 짓이기듯 감으며 자신을 타박했다. 연신 내쉬는 한숨에 뿌연 입김이 흩날렸다.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그러다 이내 끼이이 대문이 열렸다.
집주인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바깥에 의아해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아진이 몸을 드러냈다.
“……아진이?”
집주인이, 석주가 놀랍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누가 장난을 쳤나 싶어 미간에 어렴풋이 스몄던 짜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진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뒤틀어 시선을 피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네가 왜 여기…….”
석주가 대문을 놓쳤다. 그러자 묵직한 바람이 대문을 밀었다. 석주가 얼른 다시 대문을 잡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크게 쓸고 지나갔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아프다는 게 꾀병은 아닌 것 같았다. 석주는 낯빛이 창백하고, 그새 살이 빠지기라도 한 건지 뺨이 수척했으며 턱선이 날카로웠다. 흰자위는 불그스름했고, 입술은 부르튼 상태였다. 목소리도 갈라져서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두툼한 맨투맨을 입고 있었는데, 춥고 위태로워 보였다.
이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위태로워 보이다니. 보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놨다.
“얼마나 대차게 아프면, 앓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해요.”
“……회장님이 아셨구나. 미안. 난감했겠다.”
“네. 너무 난감해서 여기까지 왔네요.”
부루퉁하게 대답한 아진이 다시 시선을 멀찌감치로 돌렸다. 그 덕에 석주는 잠시나마 아진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봤지만, 내내 자는 모습만 보았다. 눈을 뜬 얼굴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겨울에 더 푸르스름해진 군청색 눈동자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아진은 생기가 가득했다. 뺨은 분홍빛이었고 입술도 붉었다. 이곳에 온 게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충분히 건강해 보였다. 석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얼굴…… 좋아 보인다.”
“형 얼굴은 개차반이네요.”
곧장 받아치는 말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가 자신의 뺨과 턱을 쓰다듬었다. 면도를 하지 않아 까끌까끌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인지하자 확 부끄러워졌다. 뒤늦게 제 꼴을 자각한 것이다. 아진과 수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이런 꼴을 보인 적은 없었다.
“미안. 네가 올 줄 몰라서.”
석주가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알았으면 정장이라도 차려입고 있었으려고요?”
“그랬을지도 몰라.”
한껏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하는 건 지나친가, 하며 타이를 들었다가 놓으며 한참 고민했을 터였다. 석주가 못난 얼굴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흘끔흘끔 아진을 훔쳐봤다.
아진은 연신 닿았다가 떨어지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묵직한 보자기를 반대 손으로 바꿔 쥐며 물었다.
“계속 여기 서 있을까요?”
“어, 아니, 아니, 들어와. 이건 내가 들게.”
석주가 짐을 채 갔다. 바윗덩이처럼 무거운 짐이었는데, 석주는 매우 가볍게 쥐었다. 아무리 아파도 힘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눈 덮인 텃밭과 단상을 지나쳤다.
“근데 이게 뭐야?”
석주가 고급스러운 금색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엄마가 갖다 주래요. 반찬이에요.”
“아……. 신경 쓰셨나 보다. 죄송하다고 전해 드려. 감사하다고도.”
“형이 직접 해요. 우리 엄마랑 친하잖아.”
“그래. 전화 드릴게.”
석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짐을 들지 않은 반대 손으로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집은 예전에 왔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석주의 냄새가 났다. 근래 여기 머물며 묻어난 냄새 같았다. 운동화를 벗은 아진이 마루에 발을 디디며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 두 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아진이 신던 하얀 운동화와, 지금 아진이 신고 온 값비싼 명품 운동화가 묘하게 어울렸다.
“어디가, 아프냐고요.”
아진이 짜증스레 다시 물었다. 석주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어, 별거 아니야. 그냥 감기몸살. 겨울마다 한두 번씩 앓는 거야.”
아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본 아픈 석주도 감기몸살이었다. 몸이 꽝꽝 얼어서 얼음장 같았지. 전생에 저도 수없이 걸려 본 병이었다. 차게 얼어서 아릿한 손발을 상기하자 등줄기가 다 부르르 떨렸다.
잠시 석주를 바라보던 아진은 거리낄 것 없이 거실로 향했다. 근데, 거실에 두툼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들친 이불과 가운데가 오목하게 눌린 베개가 있는 걸 보아 석주는 멀쩡한 침실 두고 이곳에 누워 있던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태블릿과 서류로 말미암아 그 와중에도 일을 한 듯싶었고.
대체 왜. 침대 두고 뭐 좋다고 여기서 자나.
아진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데. 석주가 슬쩍 옆에 섰다.
“비밀인데. 나는 여전히 침대보다 바닥이 편해.”
“…….”
“별것이 다 여전하지?”
석주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나직이 웃었다. 근데 아진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근데 왜 침대에서 잤어요? 본가에 있는 형 방에도, 우리가 같이…… 같이 살던 집 방에도 침대가 있었는데.”
“네가 내 옆에서 자는 걸 좋아했으니까.”
“…….”
“넌 귀한 도련님이라 바닥에선 절대 못 잤거든. 침대도 아주 까탈스럽게 골랐어.”
“…….”
“천성이 천민인 나와 달리 너는 지체 높은 핏줄이니 당연하지.”
석주의 만면에 미소가 스몄다. 잠자리를 따지는 그 까탈스러움 마저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아진이 볼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가 놨다. 석주의 입에서 전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불편하고, 짜증 나고, 아프고, 동시에 안쓰럽기도 하고, 온갖 감정이 다 들었다.
볼품없는 이부자리를 내려다보던 아진이 팩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석주의 손에 들려 있던 보자기를 채 주방으로 향했다.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꽉 묶인 매듭을 풀었다.
“밥 먹었어요?”
“아니.”
“밥 먹어요. 엄마가 뭘 엄청 싸 줬어요.”
“아, 어. 금방 차릴게.”
석주가 얼른 찬장에 붙어 섰다. 그리고 쓰지 않은 지 한참 된 그릇들을 차곡차곡 내놓았다. 아진이 말로 그를 막아섰다.
“아니, 내가 할게요. 엄마가 꼭 내가 하라고 했어요. 병문안 가 놓고 형이 시중들게 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잔소리를…….”
도톰한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석주를 보러 가겠다고 하자마자 선화는 냉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복죽에 삼계죽, 갈비찜과 불고기, 물김치, 떡갈비, 송이버섯 등 귀한 음식들을 한 아름 싸 주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당부를 하던지. 다 외우지도 못했다.
아진이 수북한 반찬 통을 하나하나 내려놓는데, 석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배회했다. 아진이 가만히 좀 있으라는 눈으로 석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석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나, 어, 씻고 와도 될까? 면도도 좀 하고…….”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진짜? 이 순간에? 어이가 없었는데, 석주는 진심인 것 같았다. 아진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석주가 부리나케 욕실로 향했다.
아진의 눈동자가 멀어지는 그를 좇았다. 그러다 그가 달칵, 욕실 문을 닫고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혼잣말을 읊조렸다.
“씻고 광내 봤자 환자인 주제에…….”
웃긴 사람이야, 정말.
아진은 식사하는 석주의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가 밥 먹는 걸 다 보고 오라는 선화의 명령 때문이었다. 석주는 천천히 식사했다. 특히나 뜨겁게 데운 국을 자주 먹었다. 그러다가 콜록콜록 둔탁하게 기침하기도 했다.
아진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아픈 석주를 한 시간째 보고 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이전에는 아픔이라 하면 항상 제 몫이었던 터라.
석주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저와 뒤바뀌어 태어난 체온에 저리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 이 세상에서 반년을 채 살지 못했지만, 여름도 겨울도 겪어 본 결과. 차라리 더운 게 살 만한 것 같았다. 에어컨이라는 아주 기막힌 발명품도 있고 말이다. 석주는 여름에는 에어컨이 휭휭 돌아가는 건물 안에서 일하고, 겨울에는 겨울 그 자체로 괴로우니 고통이 곱절일 터였다.
그럴 땐 저처럼 체온 높은 사람이 손을 잡아 주거나 안아 주면-까지 생각하던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전생에 저의 언 손을 꾹꾹 주물러 주던 석주가 떠올라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아진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오래되어 황량하고 스산하게 느껴지는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쩜 이렇게 아픈데 간호하러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러게.”
“친구 없어요?”
“없어.”
석주가 죽을 뜨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퍽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한 질문인데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무심한 반응에 오히려 아진이 의아해졌다.
“황 비서님 있잖아요.”
“황 비서는 황 비서지. 친구가 아니야.”
“전생…….”
아무렇지 않게 전생을 말하던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의 숟가락도 멈칫거렸다. 아진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침을 한 번 삼켰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전생에는 친형제처럼 친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