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23화 (223/261)

223

아진이 두 손으로 벅벅 얼굴을 문댔다. 전생을 꿈꾼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모르겠다. 시시때때로 그때를 떠올리니 제가 꿈을 꾼 건지 기억을 되뇐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꿈의 여파에 헤엄치던 아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방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어둑함을 말미암아 늦은 오후인 것 같았고, 아무도 없어 적막했다. 손등에는 링거 자국을 가린 밴드가 붙어 있었으며 몸은…… 가벼웠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자서 그런 것 같았다. 지독할 정도로 타오르던 열기도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아픈 게 좋을 때도 있네…….”

이렇게라도 자니 다행이지.

아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이불을 들쳤다. 그러다 정말 뜬금없이, 침대가 참 넓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옆자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괜히 허전하네. 인형이라도 하나 갖다 둘까, 생각하며 침대 아래로 발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우뚝 굳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

눈이 내린다. 앓는 사이 겨울이 와 버린 모양이었다. 잎이 죄 떨어져 황량했던 정원에 눈이 차오르고 있었다.

소복소복 고요하게, 겨울이 왔다.

아진은 침대에 앉은 채 한참이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뺨을 타고 뭐가 주르륵 흘러내려서 얼른 닦아 냈다. 눈물이었다.

이게 왜……. 그가 손바닥에 묻어난 한 방울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는데. 또 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진은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조용히 내리는 눈과 달리 툭툭 시끄럽게 떨어지는 눈물이 이질적이었다. 잠시간 눈물을 보던 아진이 짧게 탄식했다.

“아…….”

제가 몸은 괜찮아졌는데, 마음은 괜찮지 않구나. 그래서 우는 것이다. 열도, 고통도 털어 냈는데 욱신거리는 가슴은 여전해서. 그건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아진은 눈물을 닦지도, 추스르지도 않았다. 그저 방관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황량한 침대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아주 오랜만에, 석주의 환영이 찾아왔다. 와이셔츠 위로 두루마기를 걸친 그가 아진이 쓰다듬던 침대에 앉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진을 보며 빙긋 웃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만 했다.

아진은 석주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한 시간이 흐르고, 눈이 정원을 온통 하얗게 덮었을 무렵. 아진의 입매가 꿈틀꿈틀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꾸역꾸역 삼키던 울음 한 자락을 흘리고야 말았다.

“흐으…….”

그와 동시에 석주의 환영이 증발했다. 마치 TV를 꺼 버린 것처럼 뚝- 하고 사라졌다.

아진의 울음이 더 거세졌다.

나는 당신을 잃었다. 당신을 버렸다. 그래서 많이 아프다. 많이 운다. 하지만 괜찮다.

당신과 함께하면 더 아플 걸 알아서.

당신과 함께하면 더 울 걸 알아서.

이 정도 아픔은, 눈물은 괜찮은 것도 같다.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근데, 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건 조금 불편하다.

* * *

사흘이 지났다. 아진은 적잖이 생기를 되찾았다. 여전히 몸에 열이 오르지만, 눈까지 내리는 한겨울이 도래하다 보니 버틸 만했다. 외로움도 그냥저냥 흘려보냈다. 선화와 쇼핑도 가고, 형과 누나를 만나 식사도 하고, 꽁꽁 언 땅을 박차고 달리기도 하며 시간을 바쁘게 썼다.

신기하게도 그 사흘 동안은 별다른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 덕분에 자잘한 상처가 더 느는 일은 없었다. 눈두덩에 붙어 있던 밴드도 뗐다.

이른 아침. 아진은 선화와 둘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며칠 아진을 돌보느라 출근하지 못하던 그녀가 오늘은 회사에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응. 난 계속 집에 있을 거야.”

아진이 밥을 국에 말며 말했다. 딱히 입맛이 없는데, 꼬박꼬박 안 먹으면 선화가 걱정할 게 뻔했다. 제가 또 아프면 저보다 선화가 까무러칠 것 같아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혹시 나가면 엄마한테 꼭 연락하고.”

“응.”

아진이 밥을 푹푹 떠먹었다. 괴로운 식사를 얼른 끝내고 싶었다. 그 후 책을 읽든 TV를 보든 한량처럼 늘어져 있을 생각이었다.

근데, 어째 선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굴비 살을 발라내면서 폭탄이라도 해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진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한숨과 함께 수저를 내려놓았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내가 일은 무슨.”

선화가 부리나케 부정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떨떠름한 미소를 띠는데. 어떻게 봐도 무슨 일이 있는 얼굴이었다.

“…….”

아진이 입술을 오른쪽으로 밀었다가 당기는데, 선화가 가시 하나 없이 발라낸 쫀득한 굴비 살을 아진의 그릇 위로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니 아진은 불안해졌다. 혹 선화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뭔데. 왜 그래.”

아진의 채근에 선화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울리지 않게 더듬더듬 느리게 말을 이어 갔다.

“그…… 네가 알면 화낼 것 같아서, 엄마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알면 더 화낼 것 같기도 하고, 응…….”

“나 엄마한테 화 안 내. 뭔데 그래.”

아진이 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가 선화에게 화낼 일이 뭐 있나. 그녀가 무슨 짓을 했든, 결국엔 저를 위해 한 일일 텐데. 아진은 선화의 부담감을 덜어 주기 위해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발라 준 굴비 살을 듬뿍 푸는데.

“너 아플 때…… 석주가 왔었어.”

“……뭐?”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아진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선화가 불안한 낯으로 변명했다.

“네가 열이 너무 올라서, 근데 약도 안 듣고 그래서,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석주한테 와 달라고 연락했어.”

“……그래서. 왔어?”

“응. 전화 끊고 이십 분도 안 돼서 왔더라.”

“…….”

“이틀 동안 잠도 안 자고, 내내 네 곁에서 너 간호했어.”

“…….”

“그렇게 안 떨어지던 열이 석주가 반나절 곁에 있었다고 뚝 떨어지더라. 그러고도 한참 네 곁에 있었어. 네가 근래 잠을 통 못 잤다고 내가 우는소리를 했거든. 그러고 네가 깰 때쯤 갔다. 인사라도 하고 가랬더니, 웃으면서 괜찮다더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가 싫어할 거 뻔한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

아진이 난도질된 굴비를 멍하니 응시했다. 흩어진 살점이며 퀭하고 물컹한 눈깔이 새삼 징그럽게 느껴졌다.

석주가 다녀갔다고. 그리고 그렇게 절절 끓던 열이 대번에 떨어졌다고. 그렇게 지독하던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아진이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곱게 아물어 가던 손바닥 상처가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제가 석주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한번 된통 앓았다고 조금이나마 그를 털어 낸 줄 알았다. 이렇게 차근차근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얼추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줄 알았다.

멍청하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데. 그게 다 착각이었다니. 하물며 그 착각조차 당신이 근저였다니. 결국엔 당신 덕에 그 화염 같은 열기를 털어 냈다니.

아진이 푹 고개를 늘어트렸다.

당신이 없었다면 난 어찌 됐을까. 여전히 침대에 누워 앓고 있을까. 아니면 화염 같은 열기에 잡아먹혀 죽어 버렸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걸. 그럼 이토록 비참하진 않을 텐데. 당신을 끊어 내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몸뚱이라니…….

아진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는데. 선화가 상체를 앞으로 슥 들이밀었다.

“근데 아진아.”

“…….”

“엄마가 이 이야기를 왜 지금 하냐면, 석주가…… 병가를 냈대.”

“뭐?”

“사흘째 출근을 안 했다네.”

아진의 호흡이 잠깐 멈추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래도 석주가 아픈 건 놀라운 사실이라. 전생에서도 몇 번 보고, 꿈으로도 봤는데 그 태산처럼 거대한 사람이 아픈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석주가 입사 이래로 병가는 처음이거든. 근데 오죽 아프면 병가를 냈겠어.”

“…….”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지……. 밥은 챙겨 먹나 모르겠다. 석주가…… 석주가 아무도 없잖아. 이 세상에 혼자 덜렁 있어서 엄마는 좀 가여워, 석주가.”

“…….”

“가 볼까 싶다가도 내가 뭐라고 가나, 괜히 가서 불편하게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선화가 다시 생각해도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괜히 그 우울에 전염된 아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화가 손수 발라 준 굴비 살은 끝내 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진이 찬물을 낚아채듯 잡아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선화가 넌지시 물어 왔다.

“그래서 말인데. 아진이 네가 한번 안 가 볼래?”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었다. 무언갈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진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내가 왜 가.”

“아진아. 사람이 싫고 좋고를 떠나서, 아프고 힘들 땐 한번 들여다봐 주는 게 예의고 도리야.”

“싫……다니까…….”

“거기다 석주는 너 아프다고 한달음에 달려왔었는데. 네가 모른 척하면 엄마가 민망하지. 자식 잘못 키운 것 같고.”

“…….”

마지막 말은 차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석주가 아프라고 빈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더군다나 예의와 도리가, 선화의 체면이 걸려 있다니. 큰 죄라도 짓는 기분이었다. 떨떠름한 마음에 아진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무는데.

“생각 좀…… 해 봐. 알았지?”

엄마 출근할게. 선화가 일어났다. 그러고는 쓸데없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바른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혼자 남은 아진은 덩그러니 앉아 굴비 눈깔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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