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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22화 (22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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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주가 그런 아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엉킨 링거 줄을 살살 풀어 방해되지 않도록 멀리 던졌다. 그 후 아진의 머리를 들어 뜨끈해진 베개를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아진을 모로 돌리려는데. 아진이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며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의 얼굴이 석주의 턱 아래로 퍼즐 맞추듯 딱 맞게 들어왔다.

    지금 각자의 감정이 어떠하든, 함께해 온 수많은 나날은 여전히 두 사람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석주가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아진의 익숙함이 기쁘다면 너무 파렴치한가. 애가 아파서 끙끙 앓는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저도 참 변하질 않는다.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진을 바라봤다. 자조하고 후회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제시간을 온전히 아진에게 퍼붓고 싶었다.

    그가 아진 쪽으로 고개를 한껏 숙였다. 그 후 땀에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넘겼다.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었어, 아진아.”

    매일 매 순간 보고 싶었어. 그것도 죄 같아서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했어. 그래 놓고 염치없이 네 앞에 이 말을 꺼내 놓고 있다. 네가 이 마음을 듣지 못해서 다행이야.

    그가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그런 채로 속삭였다.

    “아프지 마. 다치지도 말고.”

    “…….”

    “잘 먹고 잘 자야지. 그러라고 놔준 건데.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졌어.”

    그의 엄지가 아진의 눈두덩에 붙은 밴드를 조심히 매만졌다. 그러다 이불 밖으로 축 늘어진 그의 손과 눈이 마주쳤다. 두꺼운 붕대가 둘둘 감겨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거기다 반대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고, 선화에게 들은 바로는 머리도 찧었댔다.

    “내가 바란 건 네가 아프지 않은 거,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

    “내가 네 곁에 있지 않으면서 널 지킬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내가 인간이 아니라 바람 같은 거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소리소문없이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존재여야 했는데. 그럼 너의 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고, 다가오는 불행을 온몸으로 막아 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기 다른 모습으로 너를 살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그럴 수 없어서, 결국엔 이 하찮은 몸뚱이가 다인 인간이라 자꾸 딴생각이 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네 곁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앓다 보면, 언젠가 네가 나를 곁에 두는 날이 오지 않을까. 결국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운명이 아닐까, 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치졸한 욕심이 자꾸 몸뚱이를 부풀려 간다.

    “미안해…….”

    무능력해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주제에 널 사랑해서, 그 와중에 욕심만 키워 가서 미안해.

    석주가 아진을 보듬어 안았다.

    석주는 여전했다. 그 언젠가처럼, 살고 싶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아진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진을 봐야 했다. 보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 다시 태어났어도 그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석주는 여전히 아진을 봐야 사랑할 수 있었고, 그를 보지 못할 바엔 죽는 게 나았다.

    죽을 준비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제 이 비루한 목숨으로 아진이 아프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행할 수 있었다.

    헌데 신이 그와 저를 전생보다 더 질기게 이어 놓았다. 제 부재로 아진이 이리 불행하고 아파하니 뭘 할 수가 없었다.

    “하아…….”

    석주가 아진의 귓가에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내가 있어 아픈데, 내가 없어서 더 아픈 너를 어찌해야 할까.

    그가 다정하게 아진의 등을 쓸어내렸다. 열기로 뜨끈뜨끈하던 등이 천천히 미적지근해졌다. 아진의 호흡도 한결 느슨해졌다. 동글동글 쓸데없이 예쁘게 맺혀 있던 식은땀도 사라졌다.

    그것을 보던 석주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두 번이나 생을 살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어렵다.

    “그래도 억울하진 않아.”

    내가 만든 미궁이라.

    내가 아니었으면 행복했을 우리라.

    내가 찢어발긴 우리의 사랑이라.

    그저 이번 생에도 나 때문에 아픈 너에게 미안하고 송구할 뿐이다.

    #한 면과 단면

    전생의 아진은 이따금 악몽을 꾸곤 했다. 으레 사람들이 그러하듯 귀신이 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고, 정체 모를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기도 하고, 때로는 교통사고가 났던 순간을 꿈꾸기도 했다.

    후자의 악몽은 특히나 어둡고 질겼다. 뒤통수가 없는 진수가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 달라며 우짖었다. 가끔은 제가 진수가 되기도 했다. 머리통이 박살 난 채 흙먼지가 날리는 바닥에 누워 끅끅거리며 경련했다.

    아진은 그 악몽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분명 제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계속해서 절 괴롭히는 과거가 괴로웠다.

    이건 꿈이야. 벗어나야 해. 깨면 돼. 깨기만 하면 돼.

    그렇게 억척스레 몸을 뒤트는데. 도무지 악몽에서 깰 수가 없었다. 집채만 한 차가 계속해서 진수를, 아진을 밟고 지나갔다. 그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포기하고 사지를 늘어트렸을 때였다.

    ‘아진아.’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따뜻한 체온이 이마를 짚어 왔다. 아진은 그 체온을 잡고 현실로 올라왔다. 스르륵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왜 이렇게 끙끙 앓아. 못된 꿈 꿨어?’

    ‘사장님…….’

    석주였다. 맨 상박에 두루마기만 걸친 그가 제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진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잠을 털어 냈다.

    몇 시간 전, 일이 많다는 석주를 두고 제가 먼저 침상에 누웠었다. 담배를 물고 설핏 미간을 구긴 채 장부를 끄적이는 그를 구경하다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꾼 것이다.

    아진이 걱정 가득한 석주의 낯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쿵쾅거리며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고요해졌다.

    석주의 얼굴을 보면 모든 불행과 공포가 증발한다. 어떤 악몽을 꾸든, 그가 옆에 있다는 걸 인지하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졌다. 아무래도 그는 힘이 세니까. 사내 중에서도 사내이니까. 그 어떤 귀신이나 괴한이 와도 물리쳐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제가 그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걸 방관할 사람이 아니니까.

    다행이었다. 석주가 제 곁에 있어서.

    아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데.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몸이 차네. 추워? 장작 좀 더 넣으라고-’

    ‘그거 말고…….’

    ‘그럼?’

    ‘안아 주세요.’

    아이 같은 칭얼거림에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털썩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양반다리를 한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안아 달라면 안아 줘야지. 이리 와.’

    이불을 들친 아진이 그의 품을 향해 네발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곧 손끝에 석주가 닿아 왔다. 그러자 석주가 아진의 허리를 쥐어 자신의 다리 위로 올려 주었다. 아진이 익숙하게 그의 목을 안고,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석주의 따뜻한 체온이 뭉근히 스며 왔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섞인 그의 체취도 느껴졌다. 아진이 그것을 열심히 들이켜며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안전을 느낀 몸이 뒤늦게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주가 다정히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관자놀이와 뺨에 애정이 담뿍 담긴 입맞춤을 해 주기도 했다.

    아진이 석주를 더 세게 껴안았다. 석주가 웃는 게 느껴졌다.

    석주는 무슨 꿈을 꾸었냐, 왜 그런 꿈을 꾸었냐 묻지 않았다. 그저 아진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진은 그게 정말, 정말 좋았다. 나중엔 악몽이고 뭐고 석주의 품이 좋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가만가만 등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끼면서, 뜨거운 체온에 스며들면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진의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질 무렵. 석주가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네.’

    ‘나는 힘도 세고, 돈도 많지만 그렇다 한들. 네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하고, 추위를 타지 않게 할 순 없어.’

    뜬금없는 말이었다. 아진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등을 뒤로 물리고 석주와 시선을 맞췄다. 군청색 눈동자 위로 불안함이 일렁거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지분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악몽에서 깨워 줄 순 있다.’

    ‘…….’

    ‘네 추위를 데워 줄 순 있어.’

    ‘…….’

    ‘그건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진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석주가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가 놨다. 그리고 턱선을 따라 꾹꾹 입술 도장을 찍었다.

    ‘네가 혼자 괴로워하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마.’

    ‘사장님…….’

    ‘혹여 네가 괴로운 순간에 내가 곁에 없거든.’

    ‘…….’

    ‘날 불러.’

    ‘…….’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달려가마.’

    달콤하고 다정한 말이었다. 여간 애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아진이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에 행복이 가득했다.

    그쯤, 현생의 아진은 꿈에서 깨기 시작했다. 석주의 방이 흐려졌다. 가구들이 연기처럼 뭉그러지고, 석주의 몸도 뿌예졌다. 그러다 이내 얼굴도 아득해졌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사장님. 절 혼자 두지 마세요, 사장님. 사장님, 제발…….

    아진은 꿈에서 깨지 않으려 노력했다. 흩어지는 석주를 움켜쥐고, 매달렸다. 그러나 석주는 잡혀 주지 않았다. 손가락에 엉켜 있던 두루마기가 허탈할 정도로 쉽게 빠져나갔다. 새까맣게 어두워진 사위에 그의 낮은 목소리만 아스라이 남았다.

    ‘과거든, 미래든, 죽음이든. 내가 반드시 가마.’

    그 말을 끝으로,

    “하아…….”

    아진이 완전히 꿈에서 깨어났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