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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의 부재는 아진에게 우울함과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몹시 괴로웠지만, 버틸 만했다. 밤에 잠을 못 자는 것도 그랬다. 시시때때로 명치를 후려치는 열감이나,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찾아오는 과거의 꿈 같은 것도 참을 만했다. 어떻게든 밤만 버티면 끝나는 시간이라서.
근데 그 밖에 온갖 불행과 불운이, 께름칙하고 불쾌한 사건들이 아진을 덮쳐왔다.
늦은 밤. 답답한 마음에 달리기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한창 숨을 헉헉거리며 달리는데, 술 취한 중년 사내를 만나 싸움이 붙었다. 아니, 싸움이 붙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시비가 걸렸다는 게 맞겠다.
취객이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소주병을 휘둘러서 피했더니 더 화가 났는지 냅다 소주병을 던졌다. 소주병이 가로등에 부딪혀 깨지면서 눈두덩이 길게 베였다.
또 하루는 난데없이 담배가 태우고 싶었다. 입 안을 채우던 매캐한 맛과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멍이나 때리자 싶어 근처 편의점에 갔다. 그리고 담배를 사 나오는 길에, 보도블록에서 전동 킥보드를 타는 웬 미친놈과 충돌해 넘어졌다. 기웠던 손바닥이 바닥에 쓸리면서 상처가 다시 터졌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크고 작은 불운들이 줄을 이었는데, 개중 가장 어이없는 건.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였다. 범인은 집에서 일하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여느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진은 늦은 새벽, 얼음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근데 드레스 룸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아진은 고양이라도 들어온 줄 알았다. 이따금 정원에서 길고양이를 본 터라. 추위에 여기까지 왔나, 하며 문을 여는데. 웬 놈이 아진의 시계장을 털고 있었다. 어깨에 멘 두툼한 백팩의 앞주머니에는 선화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걸이가 비죽 흘러나와 있었다.
아진은 소리를 질렀고, 직원은 아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다 뒤통수부터 바닥으로 넘어졌고, 결국 혹 하나를 달았다.
그렇게 아진은 일주일 만에 각기 다른 병명으로 세 번이나 병원에 방문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하필 머리가 다친 탓에 온갖 검사실을 전전한 아진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곤했다. 잠을 못 잔 데다가 불행에 시달리기까지 하니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오셨어요, 도련님.”
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인사를 해 왔다.
“네.”
아진이 흐리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병원까지 동행했던 선화는 경찰서에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아진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엎어졌다.
“하아……. 이게 뭐냐…….”
전생의 삶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이 삶도 딱히 평화롭진 않다. 양반집 도련님이라 마냥 편하게,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의식주가 더할 나위 없이 충족되어 있어도 불행할 수 있다는 걸 몸소 깨닫는 중이었다.
석주를 만나기 전에는 평생 이렇게 잦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모양인데. 선화가 자식 셋 중에 유달리 저를 끼고도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석주를 맹신하고, 그를 제 곁에 붙여 두려 집착하는 이유도.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욱신거리는 뒤통수와, 따끔한 손바닥과, 밴드가 붙어서 거추장스러운 눈두덩이 짜증 났다.
이게 다 석주가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니.
“아, 용왕님, 이건 아니지……. 진짜 이건 아니지…….”
그냥 좀 편히 살게 해 주지. 이게 뭐야. 뭘 또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강석주랑 엮어 놨어. 뭐 어쩌라고. 그 지랄을 겪었는데 이제 와 금실 좋은 부부처럼 딱 붙어서 하하 호호 하며 살라는 거야, 뭐야.
아진이 발등으로 탕탕 침대를 찼다. 그러다 그마저도 힘이 들어 축 늘어졌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눈앞도 핑핑 돌았고, 사지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는 게, 조만간 크게 앓을 것 같았다.
아진이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하도 아팠더니 이제 아픈 게 두렵지 않았다. 아프려면 아프라지. 죽기야 하겠나. 뭐 그런 심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부엌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도련님, 저녁 드세요.”
“생각 없어요.”
아진이 잠긴 음성으로 대꾸했다. 직원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진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돌렸다. 평소라면 친절히 대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체력도 없었다. 머뭇거리던 직원이 어쩔 수 없이 떠나갔다.
홀로 남은 아진은 잠들려 노력했다. 눈을 꼭 감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나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진은 계속해서 뒤척였다. 그러는 사이 통창으로 내리쬐던 햇살이 붉어진다 싶더니 곧 어둑해졌다.
“하…….”
팔로 눈을 가린 아진이 길게 탄식했다. 또 밤이다. 벌써 밤이다. 잠들 수 없는 밤은 너무 길고 괴로웠다. 아진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옹송그리는데.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녁을 왜 안 먹어.”
선화였다. 아진이 뻐근한 눈꺼풀을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막 집으로 돌아온 건지 재킷을 입은 그녀가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복도 조명등이 그녀의 뒤로 환하게 흩어졌다.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잖아. 저녁은 먹어야지. 이리 나와. 엄마랑 같이 밥 먹어.”
“…….”
“뭐 해. 나오라니까.”
선화가 달칵, 불을 켰다. 갑작스레 망막을 할퀴는 빛에 아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 으,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만사가 귀찮았다. 계속 이렇게 무의미하게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밥이고 뭐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꾸역꾸역 먹어 봐야 게워 낼 게 뻔했다.
근데 훌떡 이불이 젖혀졌다.
“한아진.”
“엄마-아…….”
“일어나.”
“나 밥 안 먹고 싶어……. 그냥 잘래.”
“자고 싶다고 잘 순 있고?”
그 말에 아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틀린 말도 아닌데 섭섭하고 속상했다. 제가 괴로워하는 걸 알면 가만히 두지, 괜히 와서 잔소리야, 하는 철없는 반항심도 들었다.
아진이 대답 대신 이불을 뒤집어썼다. 선화가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이불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그러다 푹 한숨을 내쉬며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석주 만나.”
“싫어.”
아진이 곧장 대답했다. 이불 때문인지 음성이 탁했다. 미련한 고집에 선화가 인상을 썼다.
“만나. 출근하면 만날 수 있어. 가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그럼 석주가 알아서 할 거야.”
“자르라고 했잖아.”
“걔 자르면? 어떻게, 무슨 빌미로 다시 만나려고?”
“안 만날 거라니까.”
도돌이표인 대화에 아진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밥 먹는다고 할걸. 괜히 되바라지게 굴어서 또 석주 이야기를 듣고 있다.
선화는 계속 이랬다. 병원에 갈 때마다 은근히 석주를 들먹이며 아진의 신경을 긁어 댔다. 그래서 아진은 처음으로 선화가 조금, 아주 조금 미워졌다. 아들은 난데, 왜 자꾸 석주 타령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못 들은 척 부루퉁하게 대꾸하면 입을 다물곤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선화가 이불 끄트머리를 당기며 꾸역꾸역 석주를 덧붙여 갔다.
“넌 석주가 걱정도 안 되니. 걔 너랑 같이 살던 집에도 안 가는 것 같더라. 일은 많고, 야근도 매일 하던데. 어디 가서 쉬는지 몰라. 밥은 잘 먹고 다니나…….”
“잘 못 먹고, 잘 못 자도 나보다는 잘 살걸?”
아진이 비아냥댔다. 그 건장한 사내가 저처럼 길 가다 시비가 걸리겠나, 괴한이랑 싸우겠나. 그 쇳덩이 같은 주먹을 누가 이긴다고. 뭐 때때로 제 생각을 하긴 하겠지만, 저처럼 불편하고 불운한 나날을 살진 않을 터였다.
“…….”
선화가 이불 속에 숨은 아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 이불 밖으로 비죽 나온 아진의 발목을 슬슬 쓰다듬었다. 뜨겁다 싶을 정도의 체온이 안쓰러웠다.
“아진아. 석주는 너 안 미워해. 가서 한 번 웃어 줘. 석주가 너 많이 귀여워하잖아. 그것만 해도 용서해 줄 거야.”
그 말에 아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홉뜨인 군청색 눈동자에 분노가 잔잔히 들끓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얼굴이 다 창백했다.
“……왜 그 사람이 날 용서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용서를 받아?”
“그래도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해. 석주 없으면 아쉬운 건 너야.”
“나, 하나도, 안 아쉬워.”
아진이 짓씹듯 말했다. 고집과 짜증이 한가득 섞인 어투였다. 그에 선화의 눈에도 불이 튀었다. 그녀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쉬워! 아쉬워해! 지금 네 꼴을 봐라. 이게 사는 거니? 응?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고, 병원이나 들락날락하고. 이게 사는 거냐고!”
“…….”
몸 여기저기로 푹푹 꽂혀 오는 날 선 음성에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턱을 안으로 당기는데. 선화가 아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석주 다시 만나. 제발.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아진아.”
지극한 말에 아진의 뺨이 푸르르 떨렸다. 자꾸 석주를 종용하는 선화가 미웠다. 왜 저를 이리도 채근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항상 사근사근하고, 저를 위해 주던 그녀가 윽박지르니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엄마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진이 웅얼거리듯 한 말에 선화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가 아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신경질과 짜증, 분노 같은 것들이 똘똘 뭉친 목소리가 아진을 쾅쾅 내리찍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서 답답한데, 네가 이 꼴이라 미치기 직전이야!”
“…….”
“너 데리고 병원 갈 때마다 엄마 마음이 어떤 줄 알아! 매일 아침 오늘은 너한테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가슴 졸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