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19화 (219/261)

219

아진이 텁텁한 입천장을 혀로 긁어내리는데. 선화가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대체 회사는 왜 안 가. 너 없으면 석주가 두 배로 고생해. 걔가 고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연봉을 올려 주고 올려 주는데도 늘 미안하다니까.”

“…….”

“진아. 네가 아무리 바지사장이라지만 자리는 지키고 있어야지. 그게 예의야. 석주에 대한 예의.”

강석주, 강석주, 강석주.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그의 이름에 멀미가 났다. 아진이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꾹 짓눌렀다. 뻑뻑한 눈알에, 메슥거리는 속에, 줄줄이 이어지는 석주의 이름에.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엄마.”

아진이 인상을 쓴 채 선화를 불렀다.

“왜.”

“강석주 잘라. 그럼 출근할게.”

그 말에 선화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진과 꼭 닮은 눈매가 놀라움을 너머 경악을 나타냈다. 그녀가 텁 테이블을 짚었다.

“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석주 자르면 일은 누가 하니?”

“다른 사람 구해. 이 큰 대한민국에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강석주 하나야?”

순진하면서도 무책임한 소리에 선화가 코웃음을 쳤다. 얘가, 얘가……. 쯧쯧 혀를 찬 그녀가 석주의 특별함을 막힘없이 나열했다.

“우리랑 오래됐고, 믿을 수 있고, 탐욕스럽지 않고, 똑똑한데 과묵한 애는, 거기다 너한테 아주 지극정성인 데다가 사주팔자도 딱 맞는 애는 대한민국에 석주 하나라고 봐도 되지?”

이번엔 아진이 코웃음을 쳤다. 석주가 선화에게 아주 잘하긴 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편을 드는 걸 보니. 뭐, 특별하긴 했지.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 없긴 하지. 턱을 괸 아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그냥 회사 강석주 줘 버려. 어차피 그 사람이 키운 회사잖아.”

“하……. 너 회사가 무슨 물건인 줄 아니? 그냥 막 주고받게?”

“엄마도 나한테 막 줬잖아. 무식하고 능력도 없고 흥미도 없는 나한테. 회사 줬으면서.”

“그건…….”

선화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쓸어 넘겼다. 주름조차 없는 고운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 반지가 반짝거렸다. 잠시간 숨을 고르던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가 뭐라도 했으면 해서 그런 거야. 네 성격에 위에 누가 있으면 경기 일으킬 것 같고. 그렇다고 평생 놀고먹게 할 수는 없고, 고민하다가 석주도 있겠다 싶어서- 어휴. 됐다.”

선화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다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결국엔 다시 석주였다.

“왜 싸웠는데. 이유가 뭐야. 너희들이 싸운 건 처음이라 엄마는 좀 당황스럽다? 응? 너희가 언제 싸운 적이 있어야 말이지. 맨날 네가 석주 괴롭혔지 싸운 건-”

“안 싸웠어.”

“그럼?”

“헤어졌어.”

아진이 술잔에 술을 콸콸 따랐다. 쏟아지는 구릿빛 액체를 보고 있으니 목구멍이 텁텁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 마실 생각은 없었다.

“…….”

선화가 입을 뻐끔 벌렸다. 놀라움과 당혹감이 가득한 낯이었다. 그 얼굴이 괜히 귀엽고 안쓰러워서, 아진은 픽 웃고야 말았다. 제가 지금 사고를 크게 친 것 같은데. 동시에 불효도 하는 것 같고.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아, 모르겠다.

아진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강석주 이야기 좀 하지 마.”

“…….”

“강석주 자르기 전까지는 회사 안 가, 나.”

그가 술을 들이켰다. 목젖을 녹일 듯 뜨겁고 따끔거리는 술에 신경이 뭉그러졌다. 눈꺼풀이 무겁고 귀가 먹먹한 느낌이 좋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듯한 게 묘하게 익숙했다.

잠시 공상을 부유하던 아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또 술병으로 손을 뻗는데. 선화가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술 더 마실 거면 밥이나 먹고 마셔. 갖다 줄게.”

그녀가 특유의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화와 대화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뭇잎이 또 우수수 떨어졌다. 그게 괜히 아쉬웠다.

아진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아진은 오랜만에 과거를 꿈꾸었다. 꿈속의 앳된 아진은 집 복도를 걷고 있었다. 석주와 아진이 함께 사는 집의 복도였다.

그는 야구 점퍼와 비슷한 디자인의 바시티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등 뒤로는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가방이 납작한 걸 보아 딱히 뭐가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검지에는 차 키가 달랑달랑 움직였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걷던 그가 익숙한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강석주. 일어나. 웬일로 이 시간까지 누워 있어?’

무례하고 시끄러운 방문에도 방 주인은 이렇다 할 기척이 없었다. 두툼한 이불을 코까지 덮어쓴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 들어간 그가 이불을 휙 들쳤다. 석주가 나타났다.

평소보다 창백하고, 입술이 희게 질린 석주는 척 보기에도 어디가 안 좋아 보였다. 아진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차 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뭐야. 또 감기 걸렸어?’

‘……아진이?’

‘겨울만 되면 왜 그러냐, 대체.’

아진이 간신히 눈 뜬 석주의 이마에 덥석 손을 올렸다. 식은땀이 묻어나는 걸 보아 열이 절절 끓을 줄 알았는데.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아진이 감탄했다.

‘와, 개 차가워. 형은 어떻게 감기에 걸려도 몸이 차?’

‘원래 그래.’

석주가 아진의 손을 밀어 냈다. 그러다 그의 온기가 아쉬워 손을 잡고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학교 가야지. 오늘 강의 1교시 아니야? 얼른 가. 끝날 때쯤 데리러 갈게.’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입술이 좌우로 익살맞게 움직였다. 멀뚱히 선 채 십 초 정도 고민하던 그가 돌연 가방을 벗어 던졌다.

‘쨀래.’

석주의 눈썹이 구겨졌다.

‘또 왜.’

‘형 아프잖아.’

‘내가 아픈 거랑 네가 학교를 빠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 말에 아진이 배시시 눈을 휘며 귀엽게 웃었다.

‘내가 간호해 줄게!’

‘…….’

‘형한텐 나밖에 없잖아!’

석주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약간의 조소가 섞인 웃음이었다.

‘네가? 됐어. 죽 끓인다고 또 부엌 뒤엎으려고. 그냥 학교 가.’

‘하! 누가 죽 끓여 준대? 김칫국 마시기는…….’

아진이 새치름히 석주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재킷을 벗었다. 하얀 반팔 티가 덜렁 드러났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석주가 아무리 더위를 탄다고 해도 겨울인데, 그 옷차림은 너무하다는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아진이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그러더니 냉기 가득한 이불을 들치고, 석주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 후 석주를 올려다보며 으스대듯 속삭이는 것이다.

‘이게 간호야.’

‘…….’

석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담뿍 밀려왔다. 적당히 말랑하고, 작고, 그러면서도 따사로운 온기에 얼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석주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아진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 반응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진짜 춥나 보네. 밀어 내지도 않고.’

‘응, 추워.’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아진의 냄새가 온통 밀려들었다. 꽝꽝 얼어 있던 오감이 아진을 향해 반갑다는 듯 달려들었다. 그것을 느끼던 석주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너의 겨울은 이다지도 추웠겠구나, 내가 그 겨울을 더 혹독하게 만들었겠구나, 싶어.’

‘뭔 소리야. 난 겨울에도 반팔 입고 다니는데.’

‘그냥…….’

‘그리고 그 노친네 같은 말투 좀 고쳐. 존나 김첨지 같아.’

아진이 석주의 쇄골을 만지작거리며 비난했다. 석주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웃었다.

‘김첨지도 기억해? 기특하네. 가르친 보람이 있어.’

무시하는 듯한 말에 아진이 이마를 석주의 가슴팍에 짜증스레 박았다. 석주가 그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쥐고 꽉 껴안았다. 아진이 숨 막힌다며 버둥거렸다. 석주는 한동안 그를 안고 있다, 명치 언저리가 따뜻해지고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하아……. 몸이 아픈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매년 겨울 아프면서 처음 아픈 것처럼 말한다?’

‘그러게. 매년 아픈데. 힘들어.’

아진이 매가리 없이 대답하는 석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힘들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마조야, 뭐야. 아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턱을 안으로 당기는데. 석주가 아진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겼다.

‘그래도 네가 아픈 것보단 내가 아픈 게 낫지.’

‘나 안 아파. 되게 건강해.’

‘그래. 그래서 다행이야.’

미소 짓던 석주가 쿨럭, 기침했다. 아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가 작은 손바닥으로 석주의 차가운 팔뚝을 슥슥 쓸어내리며 물었다.

‘……약 사 올까?’

‘약 먹어도 안 듣는 거 알잖아.’

‘그래도…….’

뭐라도 해 봐야지. 안 그럼 일주일 내내 이 꼴일 텐데. 아진의 말간 얼굴 위로 걱정이 덧씌워졌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만히 보던 석주가 아진의 머리 뒤로 팔을 넣었다.

‘간호해 주겠다며.’

‘응.’

아진이 익숙하게 그의 팔을 벴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조금 더 바짝 안았다. 그리고 아진의 귓가에 코를 파묻은 채, 낮은 목소리로 단조로이 말했다.

‘이거면 됐어.’

‘…….’

‘충분해. 더 바라지 않아.’

그 말이 웅웅 탁하게 울린다 싶더니,

“하아…….”

아진이 잠에서 깨어났다.

상체를 일으킨 아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꿈속에서 석주의 한기를 온통 묻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진이 주섬주섬 이불을, 어둠을 뒤집어썼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