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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18화 (21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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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장 앞에 멈춰 선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심호흡도 한 번 했다. 그리고 구두에 발을 꿰는데.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신발 뒤축이 유달리 닳은 운동화가.

    “흐윽…….”

    아진은 끝내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가슴이 왜 아픈가 했더니, 석주가 불쌍해서였다.

    그 긴 세월을 거슬러 저보다 십수 년이나 앞서 이 세상에 도착한 그가, 수많은 날 동안 저를 그려 온 그가, 그렇게 절절히 그리워하고 사랑해 왔으면서도 절 붙잡는 말 한마디 못 하는 그가, 제게 버림당함으로써 온전히 혼자가 된 그가 몹시도 불쌍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불쌍해하는 제가 참…… 안타까웠다. 다리를 절던 그때나 지금이나 병신 같은 건 다름이 없다.

    현관문을 움켜쥔 아진이 투둑투둑 눈물을 떨구었다. 문을 밀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석주에게 돌아가는 건 더욱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뒤통수 저 멀리서 석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아.”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울지 마.”

    “…….”

    “나 같은 거 때문에 울지 마. 나는 괜찮아.”

    그 말에 아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렸다.

    미친놈.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어떻게든 저를 보내려 애쓰는 꼴이 처량했다.

    그 처량한 꼴을 봐 버려서, 아진은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의 이 통렬할 정도로 뜨겁고, 엘 정도로 차가운 나날은 언제쯤 미적지근해질까.

    꾹 이를 짓씹은 아진이 벌컥, 문을 열었다.

    * * *

    마취를 했는데도 한 땀 한 땀 상처를 꿰맬 때마다 따끔거리는 통각이 느껴졌다. 살이 곱게 찢어지지 않은 탓에 의사가 이따금 난감함의 신음을 흘렸다. 아진이 찔끔찔끔 피를 쏟아 내는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고운 손 하나가 눈앞을 가려 왔다.

    “어우, 무섭게 그걸 왜 보고 있어.”

    선화였다. 손을 꿰매는 건 아진인데 그녀의 얼굴이 온통 구겨져 있었다. 마치 아픔을 대신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진은 그 집에서 나와, 선화의 손에 이끌려 곧장 병원으로 왔다. 손수건을 축축하게 적시다 못해 손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에 선화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당장 병원에 가자며 야단을 떨고, 온갖 군데에 전화를 걸며 병원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온 병원은 고요했다. 아진은 1인실 소파에 앉아 치료를 받았다. 의사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선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별별 자질구레한 검사도 했다.

    꿰매기를 마친 의사가 능숙하게 붕대를 싸맸다. 그렇게 치료가 끝났다. 아진이 붕대 너머로 빼꼼 드러난 손가락을 움직거렸다.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은 탓에 둔한 느낌이 신기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뒷정리를 하던 간호사가 피에 젖은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석주가 묶어 준 그 손수건이었다.

    “버려요.”

    아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선화가 선수를 쳤다. 간호사가 피 묻은 거즈가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통에 수건을 던져넣었다. 아진이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곧 간호사가 의료 카트를 밀며 병실을 나섰다.

    선화가 차가운 물을 떠 와 아진에게 내밀었다. 아진은 그것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병실 구석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자 선화가 붕대가 둘둘 감긴 아진의 손을 이리저리 살피며 방정을 떨었다.

    “또 어디서 다쳐 온 거야. 엄마 속상하게.”

    “…….”

    “그러게 석주랑 꼭 붙어 있으라니까, 응? 석주랑 있으면 목이 꺾일 화도 산들바람으로 스쳐 간다 그랬단 말이야. 석주 만나고 나서는 이렇게 크게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휴…….”

    선화가 연신 한숨을 내쉬는데. 똑똑 소리와 함께 선화의 비서가 나타났다. 그가 타 온 약을 내밀었다. 항생제와 진통제 등이 포함된 약이었다.

    “약 적게 달라고 분명 말했는데 무슨 약이 이렇게 많아. 아이참, 엄마는 너 약 많이 먹는 거 싫은데. 아픈 것 같아서…….”

    선화가 떨떠름한 낯으로 약봉지를 뜯어 아진에게 내밀었다. 아진은 별다른 말 없이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물을 머금는데. 선화가 핸드폰을 보며 툴툴거렸다.

    “근데 석주 얘는 왜 전화를 안 받아. 아직도 너 찾아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일단 메시지는 남겨 놨는데. 너 석주 못 만났어?”

    “…….”

    “걔가 너 없어진 거 알고 얼굴이 아주 새파래져서 뛰쳐나갔거든. 엄마는 석주 10년이나 봐 오면서 그런 얼굴 한 건 처음 봤다. 애가 너무 놀라니까 내가 놀랄 겨를이 없더라.”

    선화가 레스토랑을 뛰쳐나가던 석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아진이 쥐고 있던 빈 약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 아진의 곁에 털썩 앉아 그의 허벅지를 슥슥 쓰다듬었다.

    “대체 어디 갔었니. 네가 아무리 막 나갔어도 가출 같은 건 한 적이 없잖아. 네 나이에 갑자기 사춘기가 왔을 리도 없고. 아니, 너는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사춘긴데, 그래서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잖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화의 말에 아진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따금 후끈하게 치미는 열기에 앞머리를 쓸어 올리기만 했다. 선화가 그런 아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아들이 걱정됐다. 평생을 봐 온 아들인데 이토록 음울해하는 건 처음 봤다.

    그의 불안에 감염된 선화의 뺨이 시시각각 창백해지는데. 허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아진이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엄마.”

    “응. 왜.”

    “엄마는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우리 엄마니까?”

    “당연하지. 엄마가 너 두고 어디 가.”

    “나는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이모도 있잖아.”

    “그렇지.”

    “그럼 나는 앞으로도 혼자일 리 없지?”

    선화의 눈썹이 구겨졌다. 아진은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의 온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토록 원색적으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석주를 만난 이후로는 더더욱.

    선화가 아진의 다치지 않은 손등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무슨 일 있니?”

    사랑과 관심이 지극히 묻어나는 물음에 아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통통한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더니, 이내 속에 든 감정들을 게워 냈다.

    “나 너무…… 너무 억울하고, 섭섭하고……, 짜증 나.”

    “그러니까 뭐가. 뭐가 짜증이 나는데? 누가 너 괴롭히던? 어느 새끼가? 어느 개새끼가 우리 아들을 괴롭혀?”

    선화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마지막 문장은 꽃님 특유의 윽박지르는 말투와 똑같았다. 아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도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강석주가.”

    그 말에 선화의 낯에서 분노가 씻겨 내려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 그랬다.

    “……석주가?”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선화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아진을 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울먹울먹하던 아진이 그녀의 품에서 눈물을 토해 냈다.

    그러고 있으니 헤진 손바닥이 아파 왔다. 마취가 풀리는 모양이었다.

    * * *

    추적추적 비가 왔다. 가을을 맞아 울긋불긋해졌던 집 정원이 앙상해졌다. 세찬 비를 버티지 못한 단풍잎이 줄줄이 아래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아진은 정원이 보이는 복도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려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알코올 특유의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가 콧구멍을 통해 훅 뿜어졌다.

    흐린 날씨 탓에 스산해진 정원을 멍하니 보던 아진이 잔에 술을 따랐다. 이름 모를 위스키가 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잔을 집기 위해 손을 구부리다, 손바닥이 따끔거려서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아야…….”

    하필 오른손이 다쳐서는……. 아진은 손을 허공에 한 번 털었다가 다시 잔을 쥐었다. 그리고 독한 술을 단번에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 시큼한 액체가 위에서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후끈한 열이 뻗쳤다.

    열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만, 맨정신으로 있는 게 더 짜증이 나서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꾸역꾸역 쏟아붓는 중이었다.

    아진은 사흘째 출근도 하지 않고 한량처럼 술이나 들이켜고 있었다. 처음부터 술을 마신 건 아니었다. 원체 술과 친하지 않았던 터라. 근데 밤에 잠이 와야 말이지. 술을 마시면 잠이 오려나 싶어 한두 잔 들이켜게 된 게 사흘 내도록 마시게 됐다.

    온종일 취해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제가 지금 우울한 상태인지 기쁜 상태인지 분간하기 모호한 감정이 유지되는 게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왜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덥다…….”

    술 두 잔을 연달아 들이켠 아진이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에 이마를 묻었다. 그러고 있으니 사뿐사뿐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진은 그 발소리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진아.”

    역시나 선화였다. 아진이 마지못해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리 망나니처럼 산대도 부모에 대한 예는 다해야 할 것 같아서.

    술기운에 축 처진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선화가 푹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젊다고 그렇게 몸 막 쓰다간 나중에 병치레한다. 응?”

    “……미안.”

    “어이구, 나한테 왜 미안하니? 웃긴 애야, 정말.”

    “…….”

    아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선화가 그 반푼 같은 얼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술병을 옆으로 민 그녀가 테이블 위로 팔짱을 낀 팔을 올려 두었다.

    “무슨 사내새끼들이 이렇게 유난스럽게 싸워. 석주 걔도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나 몰라. 왜 싸웠냐고 물어보면 입을 꾹 다물고 말이야.”

    아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종종, 선화를 통해 석주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생각보다 잘 사는 것 같았다. 출근도 꼬박꼬박 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회사는 별 탈 없이 굴러갔고, 세상은 평화로웠으며 아무도 아진의 부재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 멀쩡했다. 아진만 이 꼴이었다.

    그것도 짜증이 났다. 저도 모르게 석주가 멸망이라도 하길 바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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