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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17화 (21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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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감정, 심정, 마음 같은 거 생각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아주 못되게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헌데 그런 데에는 영 재능이 없는지라 무시가 최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가 석주를 쥐어패고 해코지한다 한들 그가 아프겠나.

    아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밝히자 온갖 메시지와 연락들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나 핸드폰이 피 묻은 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아이콘을 여러 번 눌러야 했다. 화면에 뜬 선화의 연락처가 흐려졌다가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씨발, 아진이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에 욕설을 읊조렸다. 석주가 제 행동을 방해할까 겁도 났다. 다행히 통화에 성공했다. 걱정 가득한 선화의 목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진은 그것을 모두 제치고 대뜸 본론만 말했다.

    “엄마. 나 어디 있는지 알지.”

    아진이 지척에 선 석주를 올려다봤다.

    “나 좀 데리러 와.”

    통화를 마친 아진이 피에 젖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욱여넣는데. 석주가 성큼 크게 다가왔다. 아진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겁을 먹은 거였다. 아무래도 석주는 제멋대로니까.

    제가 피하려는 걸 알고, 그를 떠나려는 걸 알고 전처럼 절 어디 가둬 둘 생각인지도 몰랐다. 발목에 족쇄를 채워 두고, 함부로 옷을 벗기고, 제가 화를 내든, 눈알이 터지라 울든,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빌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 뻔했다.

    아진이 도망갈 구석을 찾아 눈알을 굴리는데. 석주가 덥석 손목을 쥐어 왔다. 눈물로 울긋불긋하던 아진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 하지 마. 왜 또-”

    “아프진 않아?”

    발악하려는 아진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석주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손바닥을 살폈다. 어디가 어떻게 째졌기에 아직도 피가 멎질 않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곱게 접힌 걸 허공에 크게 한 번 털어 펼친 후, 헤진 손바닥에 조심히 대 주었다.

    “무섭진 않았어? 피가 이렇게 나는데.”

    “…….”

    “어쩌다 이랬어. 아픈 건 질색하면서.”

    아진의 피로 시시각각 젖어 드는 손수건에 석주의 눈썹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선 앉혀 두고 치료하고 싶은데. 아니, 당장 병원부터 갔으면 싶은데. 그럼 아진이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석주가 손수건을 조심조심 싸맸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모든 걸 알면, 당신이 그때의 그 강석주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글쎄.”

    석주가 매듭을 묶으며 대답했다. 그다지 질문에 집중한 것 같지 않았다. 아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빼내려 했다.

    “……무슨 대답이 그렇게 성의가 없어.”

    그에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다시 끌어왔다. 그리고 못다 묶은 매듭을 마무리하며 읊조렸다.

    “내가 무엇을 바라고 상상하든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

    “선택은 네가 하는 건데.”

    간단하게 처치를 마친 석주가 아진의 손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아쉽게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을 스치는 아진의 피부에 애가 탔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를 만질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영원히 만질 수 없겠지.

    짧게 한숨을 내쉰 석주가 뭉그러진 눈빛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아, 나는 이제…… 아무 짓도 안 해. 내 마음은 그 언젠가 네 손에 총을 쥐여 줬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어.”

    아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잊고 있던 거였다. 그래, 그가 제 손에 총을 쥐여 준 적이 있었다.

    ‘아진아.’

    ‘내가 널 또 때리려 하거든, 이걸로 쏴 버려.’

    ‘여기 이쪽을 내 머리에 겨두고, 여기를 당기면 된다.’

    ‘못 맞추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어 줄 테니까. 네 총알이 빗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것으로 석주를 쏴 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에 아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석주가 아프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긴장하지 마.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리고, 무시하고, 문전 박대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

    석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더는 아진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몸짓이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게 선 두 사람 위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헐떡거리던 아진의 가슴팍이 잔잔해졌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석주의 지갑이었다.

    아진이 석주에게 다가가 그것을 내밀었다. 석주가 그것을 받았다. 아진의 체온이 묻어난 지갑이 따뜻했다. 석주가 그것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데. 아진이 고요히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예전에는…….”

    가까운 거리라 그의 음성이 선연히 느껴졌다. 말 중간중간 내뱉는 호흡과 머뭇거림, 입술이 달싹이는 소리 같은 게 석주에게 스며 왔다.

    “예전에는 나한테 당신뿐이었어요. 꽃님이 아줌마가 죽고 나선 정말 당신밖에 없었어. 그게 너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나는 당신이 필요했어.”

    “…….”

    “외로워서. 고독하고 무서워서. 쓸쓸해서. 그 넓고 광활한 하늘 아래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는데도, 당신을…….”

    아진이 말을 멈추었다. 그가 입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그의 시선이 석주에게로 모였다.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 들었다.

    “당신을 사랑했어…….”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다. 해 줄 수가 없었다.

    당신을 사랑했어.

    이 말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이야.

    아진이 꾹 눈을 감았다. 굵직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는 왜. 우리는 어째서. 어떻게 이다지도.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흘러왔나. 그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를 집어삼킨 파도는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끌고 갈 셈인가. 얼마나 더 깊은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하나. 대체 얼마나, 얼마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아진이 벽을 짚었다. 손을 감싼 손수건에 담뿍 밴 피가 벽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힘겹게 선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고백을 이어 갔다.

    “너무 사랑해서, 이 세상에 와서도 당신을 그리워했어. 등신같이. 등신같이…….”

    아진의 울음소리가 낡은 집을 고요하게 울렸다. 그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손수건을 타고 흐르던 피가 전보다 더 굵직한 모양새로 툭툭 떨어졌다.

    아진은 서럽게 울었다. 이를 악물고 울다가도 드문드문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참지 못했다. 피와 눈물이 함께 낙하했다.

    석주는 넋을 놓고 있었다. 아진의 고백과, 피와, 눈물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흩어진 그것들을 삭삭 긁어모아 다시 아진에게 쏟아 넣고 싶은데.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서 있던 석주가 천천히 아진에게 다가갔다. 울지 마.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지금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라면, 하는 알량한 기대도 있었다.

    “아진아…….”

    아진의 앞에 선 석주가 그의 팔꿈치를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근데 아진이 그 손길을 팩 쳐 냈다. 눈을 홉뜬 그가 석주를 대차게 노려보았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

    “당신 하나 없어도 괜찮아.”

    “…….”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주 많거든.”

    석주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런 비수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지가 너덜거릴 정도로 두들겨 맞아도 아픔 같은 거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주제도 모르고 아팠다. 삶에서 저를 지워 낼 만큼 성장한 아진이 기특하면서도 슬펐다.

    아진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게 식은 눈물이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깊게 심호흡한 그가 벽에서 손을 떼고 바르게 섰다. 그리고 석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

    “당신이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날 내팽개쳤던 것처럼.”

    “…….”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버릴 거예요.”

    석주의 호흡이 우뚝 멈췄다. 줄줄이 쏟아지는 자신의 죄가 어찌나 무거운지. 무릎이 다 휘청거렸다. 욱신거리는 가슴팍에 목구멍 너머로 시큼한 신물이 느껴졌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뗐다.

    “…….”

    아진은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할 말이 궁금했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빌려나. 아니면 잘못했다고 울기라도 하려나. 뭐가 됐든 아주 처절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느꼈던 그 비참함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는 찰나.

    아진의 핸드폰이 우우웅, 울렸다. 선화였다.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아진이 고개를 들었을 때, 석주의 입은 이미 다물린 상태였다.

    아진은 하려던 말이 뭐냐고 캐묻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아 냈다.

    이번 생에는 당신 때문에 다치지 않을 거야.

    당신 때문에 죽지 않을 거야.

    그 다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석주와 얽히면 보나 마나 피를 볼 것이다. 아파하는 것도, 우는 것도 제가 될 것이다. 결국 상처받고, 피를 흘리고, 죽는 건 제 몫일 터다. 그러니 여기서 끝내야 했다. 그게 맞았다.

    입을 앙다문 아진이 천천히 발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뗐을 땐 아직 시야에 석주가 있었다. 그러나 세 걸음을 걷자 석주를 지나치게 됐다. 고작 한 걸음인데,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아진의 만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이 몹시도 무거웠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누가 심장에 절구질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련해야 하는데. 통쾌해야 하는데. 왜 이리도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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