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16화 (216/261)

216

“…….”

원망과 경멸이 가득한 아진의 시선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볼 안쪽 살을 꽉꽉 깨물었다가 놓으며 할 말을, 변명을 고민했다. 그러나 당황과 절망에 얻어맞은 머리통이 도통 굴러가질 않았다.

그가 코로 길게 좌절을 내뿜는데. 툭,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비라도 오는 줄 알았다. 오래된 집인 만큼 빗소리가 몹시 선연히 들려오는지라. 근데 그 간격이 넓고, 소리가 무거웠다. 비보다 진득한 액체가 떨어지는 듯한, 마치 피처럼……까지 생각하던 석주가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아진의 발치에 붉은 방울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에도 둔탁한 방울 하나가 툭, 마루를 두드리며 낙하했다.

“아진아, 너 손…….”

구두를 벗은 석주가 성큼성큼 아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쥐어 올렸다. 손바닥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피가 어찌나 많이 나는지 상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뺨이 푸르스름하게 질린 석주가 아진을 끌어당겼다.

“병원 가자.”

“놔.”

“아진아.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일단 병원부터 가자.”

석주는 아진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게 정말 죽을 만큼 싫었다. 그가 피를 흘리는 것도 싫었고, 흉터가 남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 세상의 아진은 흠 하나 없이, 아픔 하나 없이 살길 바랐다. 전생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 이번 생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아진은 다리를 바닥에 박아 놓기라도 하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오히려 홉뜬 눈으로 석주를 힘껏 노려보기만 했다. 군청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파랬다.

“놓으라고.”

“아진아, 제발…….”

“역겨우니까 놔, 이 개새끼야.”

욕설을 내뱉는 아진의 고개가 부들부들 떨렸다. 석주가 쥔 그의 손목이 시시각각 차가워졌다. 마치 그때 같았다. 아진이 손목을 그었던, 그의 몸에서 피가 죄 빠져나가 가뜩이나 찬 체온이 시체처럼 싸늘해졌던 그때 말이다.

석주가 스르륵 아진의 손목을 놓쳤다. 아진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석주가 쥐었던 손목을 닦아 내듯 문질렀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당신 전생.”

“…….”

석주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아진이 서늘하게 벼려진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대답해, 얼른.”

아진은 석주가 며칠 전이라고 대답하길 바랐다. 당장 어제도 괜찮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속아 줄 의향이 있었다. 여태 저를 모른 척한 게 아니라고, 어제 떠올라서 저도 당황스러웠다고,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렸다. 근데 석주의 대답은,

“스무 살에.”

아진이 상상하던 최악을 훌쩍 넘어섰다. 아진의 입매가 꿈틀꿈틀 경련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초연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이.”

“…….”

“네가 그랬던 것처럼. 눈 감았다가 뜨니까 여기더라.”

아진이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스무 살. 스무 살이라고. 지금부터 10년도 더 전에 알았다고. 몇 달 전, 석주가 늘어놓던 그의 과거사가 떠올랐다.

‘스무 살 때까지 방황했어.’

‘방황이요?’

‘잘 포장해서 방황이고 적나라하게 말하면 깡패 짓.’

‘갑……자기 공부는 왜 했는데요?’

‘찾아갈 방법이 그것뿐이어서.’

그땐 벼락이라도 맞은 줄 알았다. 깡패 짓을 하다 개과천선을 하다니. 근데 진짜 벼락을 맞았던 거다. 전생이라는 벼락. 그리고 저를 찾아왔다. 이 세상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걸 알고 부득부득 찾아와 곁을 차지했다.

염치도 없지. 겁도 없지. 당신은 도대체가…….

아진이 미간을 한껏 구겼다. 콧잔등이 찡했다.

“내가…… 내가 전생을 기억해 냈다는 건 언제 알았는데요.”

“그날. 병원에서. 네가 날 보며 사장님이라고 불렀을 때 혹시나, 했고 네가 오늘 날짜를 1951년이라 적었을 때 확신했어.”

석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든 게 까발려진 지금 더 숨길 것도 피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제가 이곳에 온 그 순간부터 알았다고.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을 툭 쳤다. 마음 같아선 힘껏 내리치고 싶었는데, 전신에 힘이 쭉 빠져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석주의 왼쪽 가슴에 아진의 피가 묻어났다.

“근데, 근데 나를 모른 척했어요? 내가 멀쩡한 다리로 절름발이 흉내 내는 거 보면서.”

“……아진아.”

“엄마 이름도 모르는 등신인 거 보면서.”

“…….”

“낯선 세상에 무서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거 보면서.”

“…….”

“그냥,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그랬어? 그렇게 거리를 두고, 그렇게 날 밀어 냈어?”

어찌나 서럽고 억울한지. 눈물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흐려졌다가 또렷해지는 시야 속 석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석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쁜 새끼…….”

아진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비처럼 쏟아졌다.

석주의 눈가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가 애꿎은 주먹만 꽉꽉 말아쥐며 손바닥에 손톱자국을 새기는데. 아진이 훅 다가왔다.

“기분이 어땠어요. 내가 전생의 그 절름발이 종놈이라는 걸 알고, 기분이 어땠어. 여태 잘 숨겨 왔는데. 곧 들키겠구나, 쫓겨나겠구나, 좆됐다 싶었어요?”

아진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석주가 부러 모진 말만 골라 하는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좋았어.”

“……뭐라고?”

아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자 석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 감정을 상기하듯, 그의 검은 눈동자에 기쁨이 스몄다.

“좋았어. 너라서.”

“…….”

“진짜 너라서.”

“…….”

“내가 사랑하던 너라서.”

“…….”

“내가 사랑하는 너라서.”

“…….”

“너라서.”

단조로이 이어지는 감정들에 아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쏟아 냈다. 석주가 검지로 그의 턱에 매달린 눈물을 슬쩍 거두어 갔다.

“그래서 욕심이 났어. 운명이 아닐까, 싶었어. 신이 너와 나를 다시 이어 준 것 같았어. 내가 용서를 빌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어.”

“…….”

“내가 죽은 거, 다시 태어난 거, 널 기억해 낸 거.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네가 나와 있으면 잘 잤고, 아프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아서 이번 생은 다를 거라고 믿었어. 내가 널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 그걸 빌미로 널 볼 수 있었고 네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가 아닌 나로 네 곁에 서고 싶었어.”

“…….”

“미안해. 여전히 이기적인 개새끼라서.”

아진은 줄줄이 쏟아지는 석주의 마음에 목이 옥죄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그가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석주는 멀어지는 아진을 응시하기만 할 뿐, 잡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아진의 시선이 여기저기로 나부꼈다. 미친놈, 정신 나간 놈, 파렴치한 놈, 온갖 비난을 해 주고 싶었는데. 그걸로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것으로 석주가 상처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저만 분기탱천하여 방방 뛰겠지.

그냥 석주는…… 그의 말마따나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그 못된 깡패 새끼인 거다. 제 의사와 하등 상관없이 아득바득 움켜쥐고 곁에 두려던 그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아진이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훔쳐 냈다. 그리고 손으로 집을 휘젓듯 가리켰다.

“당신이 당신이 아니고 싶었다면, 여기는…… 왜 이렇게 뒀어요.”

“…….”

“뭘 바랐던 건데, 대체.”

석주의 말과 이 집은 상응하지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이 집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지갑에 사진도 없었어야 했다. 자신이 전생을 알고 있다는 흔적을, 증거를 모두 없애는 게 맞았다.

어깨를 느슨히 늘어트린 석주가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70년 전 이 집을 처음 샀을 때, 공을 많이 들였다. 아무래도 아진이 살 집이었기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편히,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혹 걷는 게 불편할까 집 안의 문지방이라는 문지방은 죄 없앴다. 턱도 없앴고, 계단은 단 한 칸도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지은 이 집에, 아진이 무슨 표정으로 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처음 이 집을 둘러볼 때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책꽂이 가득 꽂힌 책을 흥미로이 보는 표정이 어떠했는지, 예고 없이 방문한 제게 쿠키를 내어 주던 표정이 어떠했는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널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서 지키고 싶었어.”

“…….”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잖아. 남아 있는 게 여기뿐이었어. 그마저도 유난스럽던 태회파 식구들 덕에 가능했던 거고.”

“…….”

“이런 거라도 하고 싶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석주의 시선이 아진에게로 돌아왔다. 검은 눈동자에 사랑해 마지않는 얼굴이 담겼다. 그 얼굴이 참 고와서, 밤하늘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이라, 그 옛날에도 지금도 제 앞에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네가 너무…… 그리웠어.”

“…….”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석주의 낯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목소리가 눅눅해졌다. 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매일 그 오래된 흑백 사진을 쳐다보며 그리움을 삼켰어. 그러다 차마 견딜 수 없는 날이면, 이곳에 와서 네 냄새가 남지 않은 이불을 움켜쥐고 울었어.”

느리게 말을 이어 가던 석주가 손을 내렸다. 드러난 그의 눈이 붉었다. 목구멍에 걸린 뭉툭하고 뜨거운 무언가를 삼켜 낸 그가 다시금 입을 뗐다.

“근데 진짜 네가 나타났어. 내가 사랑하던 네가, 내가 사랑하는 네가. 다시 와 줬어.”

“…….”

“아진아 나는…… 나는 지금 네가 이 집에 있는 게 너무, 너무 기뻐.”

“…….”

“미안해. 마냥 좋아서.”

석주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아진의 눈치를 보고는 얼른 입매를 고쳤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무언갈 말하려던 그는,

“개……소리…….”

짧은 이죽거림으로 석주의 감정을 무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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