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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달리다 보니 밤이 도래했다. 이 현란한 세상의 밤은 밤인데도 도통 어둡지가 않다. 춤추는 네온사인과 쨍한 가로등, 휙휙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눈앞이 다 빙글빙글 돌았다.
아진은 1950년도의 밤과 닮은 새까만 어둠을 찾아 헤매다, 한적한 공원에 들어섰다.
이름 없는 공원은 풀이 규칙 없이 자라 있었고, 보도블록은 드문드문 이가 나가거나 위로 솟구쳐 있었다. 벤치나 자판기 아래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바닥은 누군가가 쏟은 커피와 아무렇게나 뱉어 댄 침 따위로 끈적끈적했다.
아진이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리낌 없이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벌레가 잔뜩 엉겨 붙어 탁해진 가로등 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아…….”
아진이 숨을 고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댔다. 땀이 묻어났다. 더웠다. 어찌나 열이 오르는지 뺨이 발끈거리며 뛰어 댔다. 거칠게 내뿜는 숨결이 뜨끈뜨끈했다.
그때, 주머니가 우우웅 진동했다. 벌써 수십 분째 울리는 진동이었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진이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핸드폰이 든 주머니가 아닌 반대쪽 주머니였다. 곧 석주의 지갑이 바깥으로 나왔다. 냅다 도망치면서 얼떨결에 들고나온 거였다.
아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헤집었다. 사진은 바닥에 떨어트린 뒤 다시 줍지 않아 없었다.
아진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호기심과 공포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심정으로 지갑을 뒤적거렸다. 지폐, 수표, 카드, 신분증, 운전면허증 같은 게 나왔다. 지갑에 있는 게 당연한 것들이었다.
뜻밖의 것이라면, 지폐 속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열쇠 두 개였다. 그것들은 하나의 열쇠고리에 묶여 있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열쇠는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낡은 사진만큼 시간이 묻지도 않았고, 그저 묵직하고 깨끗했다. 아진은 그것을 다시 지갑에 넣고,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
석주가 사진을 왜 갖고 있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이렇게까지 모르는 척할 거였으면, 나를 버려둘 거였으면 차라리 정말 모르는 사람이 되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지. 나한테 들키지 말지. 그럼 적어도 이렇게 무너지는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진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버린 낡은 사진을 상기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도무지 분을 참을 수가 없어 발로 바닥을 팍 찼다.
허벅지에 올려 두었던 석주의 지갑이 철퍼덕 더러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진이 그것을 혐오스레 내려다보다, 신경질적으로 주워 들었다. 그러자 대충 꽂아 두었던 카드가 와르르 쏟아졌다.
으으! 아진이 이를 아득 짓씹었다. 또 열이 확 솟구쳤다. 관자놀이가 다 띵했다. 그냥 버리고 갈까, 어차피 제 것도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이미 카드를 줍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뒤집힌 신분증을 줍는데. 이질적인 게 눈에 들어왔다.
신분증 뒷면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주소가 이전되었을 때 새로운 주소를 투명 스티커에 인쇄해 붙이는 거였는데, 그 주소가 낯설었다. 본가는 물론 그와 제가 함께 사는 집도 아니었다.
아진이 신분증을 뒤집었다. 앞면에 적힌 주소는 부산시였다. 아마 석주가 신분증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주거지겠지. 근데 뒷면에 새로이 붙은 주소지는 서울이었다.
아진이 알기로, 석주에겐 따로 집이 없다. 그는 하루 스물네 시간 저와 함께했으니까. 이런저런 고지서도 함께 사는 집으로 왔었다.
그렇담 이곳은 어디일까.
아진은 본능적으로 이곳에 또 다른 시간이 묻혀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봐요. 돈 내야지.”
택시에서 내리던 아진이 우뚝 멈췄다. “아…….” 하고 작게 탄식한 그가 석주의 지갑에서 아무 카드나 꺼내 내밀었다.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따 빼놓고…….”
택시 기사가 쯧쯧 혀를 차며 계산했다. 아진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빠진 넋을 추스르지 못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묘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진은 돌려받은 카드와 영수증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좁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기 저 길 따라가면 그 주소 나와요. 이쪽 동네가 뭐 전통 어쩌구 보호 어쩌구 하면서 죄 막아 놔서 길이 좁아. 차로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들어서. 양해 좀 해 줘요.’
택시 기사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걷는 기분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묘했다.
높다란 건물이 가득한 서울의 흔한 거리와 달리 이곳의 집들은 하나같이 낮았다. 완전한 한옥은 아니었지만 지붕은 대개 기와였고, 오래된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물씬 났다. 집마다 하나씩 품고 있는 나무들은 수많은 계절을 겪어 온 걸 드러내듯 굵직하고 울창했다.
아진은 가로등이 내리쬐는 조용한 마을을 탁한 눈동자를 한 채 걸었다. 그는 주소만 보고 집을 찾을 만큼 지리에 밝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집 앞에서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낮은 담벼락과 검은 철제 대문이 특징인 집이었다. 대문 자체는 아주 오래되어 보였는데, 페인트칠을 최근에 새로 한 건지 반질반질했다.
아진이 담벼락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석주의 신분증에 적혀 있던 그 주소가 맞았다.
“미친놈…….”
아진이 헛웃음과 함께 짧은 욕설을 읊조렸다.
이곳은 아진의 집이었다. 아니, 70년 전 한때 아진의 집이었던 곳이었다. 비록 계절 하나 제대로 살아 내지 못했으나 아무튼 그의 집이었다. 지금은 석주의 집이 된 듯하지만. 아니, 따지고 보면 그때도 석주의 집이었나.
재차 조소한 아진이 대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진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문을 바라보다, 석주의 지갑에 있던 열쇠를 떠올렸다.
아진이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그때의 열쇠와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보통 긴 시간이 지난 게 아니니 열쇠고 열쇠 구멍이고 많이 녹슬고 마모되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석주라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을 테니 새로이 맞춘 것이리라.
아진이 두 개 중 큰 열쇠를 열쇠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열쇠가 부드럽게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손목을 돌리자 철커덕, 하며 문이 열렸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언젠가 한번. 재킷을 몸에서 떼 놓지 않는 석주를 이상하다 생각한 적이 있다. 날씨가 덥든 춥든 항상 재킷을 입고 있었고, 식사하러 가서 식당 직원이 재킷을 걸어 주겠다, 말해도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어떤 순간에도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도 이유를 묻진 않았다. 그저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런 거겠거니, 했는데.
재킷 안에 든 지갑 때문이었구나. 정확히는 그 지갑 안에 든 사진과 열쇠 때문이었구나. 누가 볼까 싶어서. 제가 알까 싶어서. 들킬까 싶어서. 차마 몸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던 거다.
“미친놈…….”
아진이 재차 욕설을 읊조렸다. 그러다 짧게 심호흡한 후, 대문을 밀었다. 기름칠을 잘해 둔 대문이 큰 소음 없이 열렸다.
마당은 조명이 없음에도 환했다. 담벼락 바로 뒤에 붙은 가로등 때문인 듯했다. 그 덕에 아진은 한눈에 마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마당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텃밭과 단상이 있었고, 돌길 끝엔 집 현관이 있었다. 아진이 느린 걸음으로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엔 대파와 오이, 배추 따위가 심겨 있었다. 그것을 보는 아진의 표정이 모호하게 뭉그러졌다.
언젠가 석주와 나란히 서서 이것을 내려다보던 때가 있었다.
‘이거는 시금치고요, 이거는 대파예요.’
‘그래?’
‘네. 그리고 이거 보세요. 대파는 벌써 싹이 났어요. 파가 원래 빨리 자란다고 하던데, 책에 적힌 것보다 더 빨리 자랐어요. 볕이 잘 들어서 그런가 봐요.’
‘응, 그런가 보네.’
‘여름에는 오이랑 배추도 심을 거예요. 다른 것도 심어 보고 싶은데, 제가 밭일은 처음이라서 겁나요. 얘들도 생명이라고 죽으면 미안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해 보려고요.’
그땐 이렇게 사사로운 게 그리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래 봤자 석주에겐 하찮은 풀 따위에 불과할 텐데. 어디 모자란 애처럼 배시시 웃으며 이딴 것들을 자랑했었다.
그 순진함이 뒤늦게 부끄러웠다. 동시에 짜증도 났다. 석주가 그것을 기억하고 되뇌어 이 텃밭을 가꾸었구나 싶어서.
“이딴 걸로 뭘 하겠다고…….”
아진은 배추를 걷어차 주려 다리를 올렸다. 그러나 차마 발길질을 하지 못했다. 저 작은 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아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았다. 그러자 단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진의 만면이 눅눅해졌다.
“…….”
단상은 이 집에서 유달리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동시에 고통도 잔뜩 묻어 있었다.
저곳에 드러누워 하늘도 쳐다봤고, 낮잠도 잤다. 순철과 미숫가루도 타 먹고, 통닭도 뜯어 먹었다. 집들이라며 쳐들어온 명진과 술도 마셨다. 그러다 어느 날은 피범벅이 됐고, 그때가 이 집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아진이 단상으로 다가갔다. 단상은 많이 낡았다. 아무래도 바깥에 두는 것이다 보니 비와 바람에 많이 시달렸으리라. 다리는 이미 몇 번 주저앉았던 모양인지 색이 다른 나무가 못질되어 박혀 있었다.
단상 다리를 타고 줄줄이 흘러내리던 피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지웠는지, 시간이 지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단상을 바라보던 아진이 현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 겁이 났다. 마당처럼, 저 집 안도 1950년에서 시간이 멈추어 있을 게 뻔해서.
아진이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댔다. 한 발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내디디며 갈등하던 그가 훅 콧김을 뿜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작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철컥.
이번에도 문은 쉽게 열렸다.
“…….”
아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문고리를 쥔 채 잠시 굳어 있던 그가 짧은 한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집 냄새가 파도처럼 물씬 밀려왔다. 탁한 나무 냄새였다. 언뜻 먼지 냄새도 났는데, 진짜 먼지가 아니라 오래된 집에서 날 수밖에 없는 세월의 냄새였다.
아진이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오래된 전등이 깜빡깜빡 바쁘게 부산을 떨더니 뭉근한 빛을 내뿜으며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