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213화 (21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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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한테요?”

    “네. 영화 오디션 볼 생각 없냐고 먼저 연락하셨었잖아요.”

    “제가요?”

    아진이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도은이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어색하게 웃었다. 민망한 듯 팔뚝을 긁적이기도 했다.

    “어……. 기억 못 하시는구나. 아니면 다른 분이 하신 건가? 회사로 연락이 왔었는데. 모르고 계셨구나. 하긴 사장님처럼 높으신 분이 그런 걸 직접 하실 리도 없고.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아, 아아……. 기억나요.”

    아진이 뒤늦게 연기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뭐 제 회사 직원 중 누군가가 한 일인데. 제가 했다고 못 할 건 또 뭔가 싶었다.

    “저희 쪽에서 보낸 거 맞아요.”

    대충 아는 척을 하는 것. 그때 그랬었지, 하며 넘기는 것. 아진이 이 세상을 살아오며 키워 온 능력이었다. 아진의 긍정에 도은의 낯빛이 확 밝아졌다.

    “그때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암만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어서 배우를 그만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

    “근데 그렇게 큰 작품에 출연하게 되다니……. 멋진 선배님들이랑 대화도 하고, 좋은 감독님도 만나고, 그만큼 배운 것도 많고 정말 기뻤어요. 누구에게는 큰 배역이 아닐지 몰라도, 저한테는 정말 정말 소중한 기회였거든요. 그 영화로 다시 열심히 할 원동력을 얻었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도은이 앉은 채로 꾸벅 묵례했다.

    “아니에요.”

    아진이 덩달아 인사했다. 그러다 접시를 쳐서 접시가 파르르 진동했다. 어딘가 어설픈 모습에 도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공손히 모은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이렇게 대뜸 찾아뵙는 게 실례인 거 아는데, 반갑기도 하고, 기회다, 싶기도 해서 말 걸었어요.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기회요?”

    “혹시 제 얼굴 한 번이라도 더 기억해 주실까 싶어서요. 그래서 또 언젠가 기회가 될 때 절 찾아 주시지 않을까, 하고.”

    “…….”

    아진은 뒤늦게 그녀가 유명한 배우가 아님을 인지했다. 신인 배우더라도 이곳저곳 눈에 띌 수 있는데. 아진은 아주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쉬지 않고 봤지만, 화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게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도은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만큼 전생에 누리지 못한 것을 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주제넘은 생각인데 실로 그랬다.

    아진이 눅눅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는데. 도은이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친절하게 받아 주셔서 감사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녀의 낯엔 미련이 없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계획하고 있는 영화에 절 써 달라느니, 연락처를 받을 수 있겠냐느니, 하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신인 배우 중, 혹은 중년 배우 중 무례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녀는 달랐다.

    “잠시,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진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있던 석주의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지갑과 함께 차가운 철제 케이스가 잡혀 왔다. 그것을 꺼냈다. 자신의 명함이 든 명함 케이스였다.

    아진은 명함 한 장을 뽑아 도은에게 내밀었다.

    “이거, 제 명함이에요. 혹시 도움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어…….”

    도은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싱긋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귀하게 쓸게요.”

    아진이 그녀를 따라 웃었다. 전생에 받았던 애정을 돌려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도은이었다. 예쁘게 웃은 그녀가 뒤를 돌았다. 그대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나, 싶었는데. 두 걸음을 채 떼기 전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석주의 자리 아래에서 무언갈 주웠다.

    “이거, 떨어트리셨나 봐요.”

    아진이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받았다.

    “아, 감사합니다.”

    “네, 그럼.”

    도은은 꾸벅 묵례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맑았다.

    아진은 멀어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가 건네준 것을 확인했다.

    하나는 석주의 지갑이었고, 또 하나는 종이였다. 아진은 지갑을 건너뛰고 종이부터 살폈다. 그것은 하얗고 두꺼웠으며, 반으로 접혀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지 죄 헤져 있었다. 잘못 만지면 가루처럼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제가 석주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다 떨어트린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석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뭐야, 이게…….”

    아진이 종이를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뭔지도 모르는데, 몸이 긴장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아진은 종이가 찢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그것을 펼쳤다. 이내 종이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진이었다. 몹시 오래된 흑백의 사진.

    사진 속에는 익숙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것은 아진도 잘 아는 사진이었다. 하물며 가진 적도 있었다. 잊지 못해 덮어 두었던 사진이며, 지금 이 세상에는 없어야 하는 사진이기도 했다. 특히나 석주는 몰라야 할 사진이었다.

    “…….”

    숨이 콱 막혀 왔다. 뺨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갑자기 사위의 공기가 날카로이 움츠러들었다. 분명 심장과 폐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죽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스토랑에 은은히 깔린 클래식 음악 소리,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같은 게 아득하게 멀어졌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아진은 그 구덩이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갔다.

    아진이 툭 사진을, 아니 과거를 놓쳤다. 그것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전생의 석주와, 이불처럼 커다란 두루마기를 입은 절름발이의 아진이 앞을 보며 웃고 있었다.

    #덩이진 마음

    아진은 목적지 없이 달렸다. 다리가 부서지라 달렸다. 발목이 지끈거리고 무릎이 덜거덕거릴 때까지, 빵빵하게 부푼 폐가 쓰라리고 목구멍이 시큼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석주와 자신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었다.

    ‘강 비서님.’

    ‘예, 사장님.’

    ‘혹시 저 아세요?’

    아마 당신은 그때, 내가 물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았을 것이다.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었다.

    ‘가족 관계부터 시작해서 좋아하시는 음식이나 취미와 특기처럼 사사로운 건 물론,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신상 일체까지 모두 알고 있죠.’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면서 낯선 곳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나를 방치했다.

    ‘우리 연인이에요?’

    ‘…….’

    ‘사랑하냐고요, 서로.’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사이.’

    연인이냐는 질문에 단호히 부정을 내놓았고,

    ‘이렇게 거리를 두시면, 제가…….’

    ‘……제가?’

    ‘제가…… 조금 슬픕니다.’

    그러면서도 건방지게, 내가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면 되잖아. 사장님이 술 드시는 거 싫습니다. 친구분이랑 만나는 거 싫습니다. 뭐 그렇게. 물론, 네가 그런다고 들어 처먹을 새끼냐마는 말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냐?’

    ‘…….’

    ‘근데 절대로 말 안 해. 네가 뭘 하든,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지켜보면서 괴로워해. 뭔 벌 받는 사람처럼 꾹 참고 있어. 힘들면 거리를 좀 두든가. 붙어 다니긴 또 뒤지게 붙어 다녀요.’

    아무도 내리지 않은 벌을 자처하며 홀로 속죄하고,

    ‘이 새끼가 또 도둑질을…….’

    전생의 악연을 처단하는 데에 하등 망설임이 없었으며,

    ‘연애해요, 우리.’

    ‘아진아. 잘. 판단해야 해. 잘.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다른?’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다른 이유라면 뭐요?’

    내가 과거의 당신을 떠올린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다른 이유’를 들먹이며 관계를 피하려 했고,

    ‘형도 나 좋아해요?’

    ‘항상. 항상 그랬어. 항상 좋아했어. 항상 사랑했어.’

    ‘…….’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너를 모르던 순간에도 너를 사랑했고, 널 볼 수 없을 때도 널 사랑했고, 널 만난 후로는 모든 시간 단위로 너를 사랑했어.’

    그런데도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다만…… 겁이 나서 그래.’

    ‘…….’

    ‘두려워. 많이.’

    ‘뭐가 겁이 나는데요.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자기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들킬까 겁을 냈고,

    ‘근데 아진아.’

    ‘버려도 돼.’

    ‘……뭐라고요?’

    ‘버리고 싶으면 버려.’

    ‘…….’

    ‘발로 차고, 내팽개치고, 문전 박대해. 그래도 돼.’

    그 와중에도 도망칠 틈을 만들어 둔 당신은 정말이지…… 못됐다. 비겁하고, 나쁘다.

    아진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토해 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땅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하아, 하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모른 척했을까. 모든 걸 안 내가 당신을 버릴까 두려워했을까.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당신은 정말이지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이게 날 내팽개쳤던 그 과거와 무어가 다른가.

    어떻게든 내 곁에 있겠다는 고집으로, 결국 당신은 나를 또 버렸다. 이렇게나 교활하고 기만적으로 나를 버렸다.

    이 머나먼 시간에 덩그러니 눈을 뜬 나를 모른 척하고, 과거에 짓눌려 떠는 나를 못 본 체하고, 매일같이 당신의 잔상에 시달리며 진창으로 가라앉는 나를 무시했다.

    “개새끼…….”

    욕설을 읊조린 아진이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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